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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라디오 연설 10회 뜯어보니… 행동가형 리더십 부각 속 공감할 비전 안 보여
등록 2009-03-27 14:55 수정 2020-05-03 04:25

글은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지난해 10월13일 정부 정책과 국가 비전을 쉽게 소개하고 국민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겠다는 뜻에서 시작된 라디오 연설 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은 몇 차례나 연설문을 직접 뜯어고칠 정도로 이 연설문에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런 라디오 연설이 3월23일 11번째 전파를 탄다. 지난 5개월 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라디오 정례 연설문을 통해 드러난 ‘이명박’은 어떤 모습일까?

1월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새해 국정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런 통상적인 연설에 더해 라디오 연설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례화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1월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새해 국정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런 통상적인 연설에 더해 라디오 연설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례화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1. 그는 무슨 말을 했나

‘국민’ 66차례, ‘기업’ 39차례, ‘경제’ ‘나라’ ‘일’ 각각 37차례. 이 김일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에게 의뢰해 이명박 대통령의 10차례 연설문을 분석한 결과, 이 대통령이 연설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으로 드러난 명사들이다.

‘최고경영자(CEO) 대통령’을 자처해서인지, 경제가 온 국민의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어려워서인지 이 대통령이 많이 사용한 단어는 유난히 경제나 경제난과 관련이 많다. 경제와 관련한 또 다른 단어로는 ‘위기’가 28차례, ‘중소기업’이 21차례, ‘일자리’가 20차례, ‘돈’과 ‘극복’이 17차례씩 등장했다.

많이 쓰인 형용사를 봐도 ‘없’이 44차례, ‘어렵’이 42차례 언급돼 각각 1·2위를 차지했다. ‘힘들’과 ‘힘겹’이 각각 9차례와 4차례, ‘안타깝’이 7차례 쓰였다. “단순히 많이 사용한 단어가 더 유의미하다고는 할 수 없다. 문장의 맥락을 봐야 한다”는 김일환 교수의 조언을 감안하더라도, 10차례 연설 가운데 8번을 경제를 주제로 이야기할 정도로 이 대통령 연설문의 초점은 경제에 맞춰져 있다.

그 밖에 이 대통령은 ‘희망’을 27차례, ‘가족’을 21차례, ‘원칙’을 19차례 언급했다. “어려울 때마다 가족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통해 희망을 키워가자”(7차)거나 “당면한 경제위기를 대응하는 데 있어서도 경제 운용의 원칙을 되새기고 있다”(8차)는 식이다. 경제가 어려우니 국민들에게 희망을 품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동시에 ‘안전망’으로서의 가족, 경제난 극복을 위한 원칙 고수 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2. 커뮤니케이션 방식

이 대통령은 첫 연설을 “조그만 회사의 수위로 일한 적”이 있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했다. 또 “늘 어려운 생활에 별 궂은일을 다 당하고 남몰래 많이 울기도 했지만 자식들에겐 늘 희망을 말씀하셨”(7차)던 자신의 어머니가 “정신의 뿌리와 같은 존재로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계”(5차)신다고 언급했다. 이뿐만 아니라 “사채까지 써가며 노력했는데 문을 닫게 될 것 같다”(2차)는 미용실 사장의 이야기를 비롯해 경제위기 극복을 강조하는 연설에선 빼놓지 않고 ‘가슴 찡한’ 사례를 소개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의 눈에 비친 그의 연설은 어떨까? 신호창 서강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의 분석은 이렇다. “대통령이 연설에서 자신의 아버지·어머니가 고생했던 이야기를 비롯해 ‘신파조’의 감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어렵게 살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아침 방송에나 적절한 소재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대통령의 연설로는 적절하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 라디오 연설문에 많이 쓰인 단어

이명박 대통령 라디오 연설문에 많이 쓰인 단어

같은 연설 안에서도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충돌하거나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과 정반대여서 오히려 국민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정부는 언제라도 북한과 마주 앉아 모든 문제를 풀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도 “과거와 같이 북한의 눈치를 살피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하다가 끝이 잘못되는 것”이라고 말한 8차 연설, “사교육을 완전히 추방한” 학교를 소개하는 동시에 “경쟁”을 강조한 9차 연설이 대표적인 사례다.

신 교수는 “대통령의 말은 항상 국가 정책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관리’가 중요하다”며 “이 때문에 연설문은 최고의 정책가·전략가가 머리를 맞대어 작성해야 하고, 국민에게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면서 왜 지금 이런 정책을 펴는지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메시지가 나와야 하는데, 이 대통령의 연설은 그런 점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3. 이명박식 리더십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연설문에서 드러난 이 대통령의 리더십 유형을 ‘CEO형 리더십’과 ‘행동가형 리더십’ 두 가지로 분석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 대통령의 특징이 연설문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각각의 리더십 유형은 양면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우선 이 대통령은 ‘CEO 대통령’답게 “외화 유동성에 대한 우려는 거의 없어졌다. 이제는 실물경제를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할 때다. 대통령으로서 내가 꼭 그렇게 하겠다”(2차)거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4차)며 경제난 극복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반면, ‘탈여의도’를 강조하는 만큼 정치에 강한 불신감을 보였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눈부신 산업화에 못지않은 세계적인 자랑거리였다. 이번 국회의 폭력 사태는 그런 우리의 자부심에 찬물을 끼얹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6차), “서울의 교통체계를 개편한다고 했을 때 정말 반대가 심했다. 정치권도 물론이었다”(8차) 등의 발언에서 그런 불신의 단면이 읽힌다. 정치를 경제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로 이해하는 것이다. 최진 소장은 “이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불가피하지만, 그런 감정을 밖으로 표출해 반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국가 통합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거의 모든 연설에서 자신이 방문한 현장이나 직접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감으로써, ‘행동가형 리더십’의 면모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수치 등으로 구성된 연설문이라 비교적 쉽고 재밌게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도 ‘뒷면’이 있다. “국정 운영 철학이나 깊이 있는 담론, 국민이 공감할 만한 거시적인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최 소장의 진단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대통령이 경제위기 극복을 강조할 땐 거의 어김없이 ‘희망’이나 ‘용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5차 연설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관심과 용기”, 7차 연설에서 “희망이 있는 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10차 연설에서 “지금 어렵지만 우리 모두 희망을 가지자”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줄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이나 장기적인 비전은 찾아보기 어렵다. ‘행동가형 리더십’의 또 다른 이면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4. 대체 그는 왜 이런 말을?

연설문 기저에 깔린 이 대통령의 태도를 ‘야메 상담가’ 김어준씨는 “자화자찬과 남 탓”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으로 격렬한 노사 대립과 거리의 불법 시위, 그리고 북한 핵을 꼽았다”(6차), “걱정스러웠던 노조”(10차) 등의 표현 때문에 이 대통령의 ‘남 탓’ 논란은 이미 언론에서도 여러 차례 다뤄진 바 있다.

김어준씨는 이에 더해 10차 연설을 “자화자찬의 사례”로 꼽았다. “각국 지도자들은 우리가 가장 먼저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와) 외교상 전례없이 공식 만찬이 끝난 후에도 수행원들을 물린 채 밤늦게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말한 대목이다. 김씨는 “립서비스에 불과해도 ‘외국 총리’의 칭찬을 들으니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진 거다. 사실 이런 얘기는 대통령이 자기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 않느냐”고 촌평했다.

김씨의 이어지는 분석이다. “남을 탓하고 자기 자랑을 대놓고 하는 사람은 교양이 부족하거나 자기중심적이고 타인과의 교감 능력이 떨어진다.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못하기 때문에 상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를 못한다. 이건 역설적으로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말도 된다. 자기가 못났다는 방증이 될까봐 상대를 인정하지 못한다. 연설문을 들여다보면, 이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5. 소통이 필요하다

이 대통령은 첫 번째 연설에서 라디오 연설 시간을 “국민의 목소리도 더 많이 듣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청와대는 자문그룹을 통해 연설의 피드백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연설문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청와대의 이런 설명에 의문을 표시했다. “연설문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쌍방향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진 소장은 “라디오 정례 연설은 대통령의 개인 생각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라고 깔아준 ‘멍석’이 아니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자신의 라디오 연설인) 노변정담을 들은 국민들이 보낸 편지를 연설에 적극적으로 참조했다. 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보면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려는 것 같은데, 그보다 국민들의 반응에 더 귀를 귀울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호철 교수도 “예를 들어 연설문을 블로그에 올려두고 거기 달린 찬반 의견을 있는 그대로 수렴해 정책에 활용하면 라디오 연설은 대통령이 지지율을 회복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민 의견 수렴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본 아니냐”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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