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새 정부 들어 ‘수도권 규제 철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정부가 비수도권 눈치를 너무 보고 있다”이라고 말한다. 충북에서는 9월4일 김 지사의 발언을 비판하고 정부의 지역 균형발전 정책 후퇴를 규탄하는 도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전북의 한 기업인은 “대한민국에는 수도권만 있을 뿐 지방이 없다. ‘대한민국’과 ‘서울공화국’은 각각 다른 나라인 셈”이라고 말한다.
한가위를 앞두고도 시름만 깊은 한국의 ‘비수도권’.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서민들의 한숨과 신음 소리를 직접 들어봤다. 편집자
“그래도 아버지가 세우고 아들 형제가 이어가는 전통 있는 공장인디 망하기야 하겄소.” 전북 익산시 인근 한 농공단지에 입주해 있는 플라스틱 업체 A사. 압출기가 뽑아내는 농업용 비닐을 들여다보고 있던 고아무개(45) 부장이 손사래를 쳤다. 올 초 20명이던 직원은 16명으로 줄었고, 15대의 기계 중 절반은 놀고 있었다. 지난해 말 kg당 1250원 선이던 폴리에틸렌 등 원재료 가격은 2천원으로 갑절 가까이 뛰었는데, 납품 단가는 1900원에서 2500원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공장 운영이 힘들겠다는 질문에 고 부장은 “사장님이 작전을 잘 세운 덕에 다른 회사들보단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항변’했다. 원재료를 미리 사서 쌓아두고 상반기를 버티다, 지난 7월 초 단가 인상을 요구한 전략이 먹혀들었다는 것이다. “사업이 위태위태한데 사재기 좀 했다고 누가 뭐라 하겄소?”
광주, 산업 구조조정 중 실업률 1위지방 산업단지들의 ‘체감 고통지수’가 천정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굴뚝기업들이 몰려 있는 산업단지와 농공단지는 고유가와 원자재 파동의 직격탄을 맞았다. 지방 중소기업들은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제품 원가와 납품 단가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지방 건설사들의 몰락은 이들에게 납품하는 협력업체들에도 동반 부실을 안기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특정 산업의 수출 호조로 공장 가동이 활발한 지역에서도 비정규직과 사내하청 일자리만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제조업체 종사자들은 부쩍 뛰어오른 제수용품 가격 탓에 추석 장보기도 버거울 판이다. 지난 7월 지방 주요 도시들의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더한 고통지수는 두 자릿수를 돌파하면서 ‘가장 살기 힘든 도시’로 꼽히던 서울(8.8)을 멀찌감치 추월했다.
지방 산업기지들에서 만난 중견·중소기업들은 한결같이 자원 대란과 환율 약세의 여파로 채산성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전북 군산시 옥구읍의 포장업체 B사 사장은 “t당 32만원 하던 골판지가 40만원으로 뛰는 바람에 원가에서 원부자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70%를 넘는 형편”이라며 “3년 전 경매로 반값에 공장을 샀는데, 땅값이 오르기만 버티고 있는 형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인근 모터업체 C사의 정광영(50) 이사는 “요즘 대기업들은 상생경영을 한다며 필요도 없는 연구개발 자금을 빌려주겠다고 나선다”면서 “환율 덕분에 수출은 잘되고 원자재 부담은 납품업체들이 떠안아주니 곳간이 넘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실업률 전국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광주 지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광주 하남산업단지에 입주한 도금업체 D사의 강아무개 사장은 “광주 지역에서는 삼성 광주공장의 1차 협력사들 중 몇 곳이 부도가 날 것이라는 괴담이 떠돌고 있다”고 말문을 뗐다. 백색가전을 주로 생산하는 삼성광주전자에서는 최근 1차 협력사들을 30여 개사에서 17개사 안팎으로 줄였는데, 여기서 탈락한 업체들은 자금 결제 기한이 15일에서 두 달로 길어지기 때문에 유동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게 근거였다. 강 사장은 “우리 회사를 비롯해 주변 공장들 중 절반은 이번 추석에 상여금을 못 주는 형편”이라며 “공단 주변 7만 세대 아파트단지도 분양이 10%가 안 됐다고 하니 광주 경기가 IMF 수준이란 게 과장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잘나가는 창원, 비정규직만 넘쳐나광주 지역 산업체들에 닥친 한파는 일종의 산업 구조조정 탓이기도 하다. 하남공단에 입주한 900여 개 업체들은 대부분 기아차, 삼성전자, 캐리어, 대우일렉, 금호타이어 같은 소수 대기업들에게 납품하는 플라스틱 사출이나 프레스 가공 업체들인데, 청소기나 에어컨 같은 백색가전은 중국으로 생산거점이 옮겨지고 있고 자동차 쪽도 고유가 탓에 생산 물량이 정체됐다. 지난해 300여 명을 명예퇴직시킨 캐리어는 올 들어서도 9월 한 달 동안 부분휴업에 들어갔고, 과거 3천 명을 웃돌았던 대우일렉 직원 수는 450명 선까지 떨어진데다 최근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올 초 430여 명을 구조조정하겠다는 금호타이어의 계획은 노조의 반발로 간신히 철회됐고, 삼성광주전자의 경우 청소기 부문을 러시아 공장으로 넘긴다는 소문이 무성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강영태 광주전남지역 본부장은 “광주는 대기업 납품업체라 해도 매출 규모가 500억원을 밑돌 만큼 영세하고, 대기업들이 주요 생산 품목인 백색가전을 국외 생산기지로 이전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면서 “생산라인이 줄어들면 용역 업체들을 재계약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량해고가 발생하기 때문에 최근 실업률이 높아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광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김기홍 정책부장은 “지역에 진출한 대기업들이 미래 전략산업에 대한 투자를 외면하면서 비정규직 일자리만 양산하는 ‘고용없는 성장’이 이뤄지는 상황”이라며 “공식 통계만 2만7천명에 이르는 지역내 실업인구는 좀처럼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경남 창원이나 경북 구미처럼 조선·휴대전화·자동차부품 등 잘나가는 수출 주력 품목을 생산하는 지역에서도 공단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들까지 생산라인에 정규직을 쓰지 않고 사내 하청업체를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간접 고용된 노동자들의 급여가 법정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생산구조는 제조업황이 활발한데도 임금체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낳고, 생산직 노동자들의 낮은 소득은 고스란히 지역경제의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불황’의 악순환이 지방 도시들을 덮치고 있는 것이다.
경남 창원시 팔룡동의 유성전자에서 일하는 김옥선(40)씨는 최근 추석 제수용품을 사러 갔다가 장바구니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섯 식구와 명절에 찾아올 친척들을 먹이려면 넉넉히 준비해야 하는데, 과일과 육류는 아예 엄두도 못 내고, 3만원어치는 사야 하는 생선 포와 새우도 각각 1만원어치만 샀다. 김씨와 동료들이 다니는 공장은 잘 돌아가지만, 밀린 임금과 상여금을 이번 추석에도 못 받을 처지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다니는 유성전자는 삼성테크윈에 납품할 휴대전화 카메라 렌즈를 가공하는 업체인데, 김씨는 3곳의 사내 하청업체 중 하나인 남영전자 소속이다. 한 달 26일을 8시간씩 일하면 78만원을 받고 잔업특근을 더해도 98만원을 받는 김씨는 8월달치 상여금을 못 받았고, 회사 사정이 나빠졌다며 해고된 30여명의 전 동료들은 퇴직금도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4년 전에도 다른 사내 하청업체 소속으로 유성전자에서 일했었다”는 김씨는 “1년 이내에 해고되기를 반복하며 퇴직금도 없이 일당제로 일하는 팔자”라고 하소연했다.
제조업 비정규직의 고용불안과 임금체불은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경북 김천의 휴대전화 케이스 공장에서 일하는 라오토우(23)는 “8만위안(약 1200만원)을 들여 한국에 온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중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대구 인근 대학의 ‘위장 유학생’으로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4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용역업체 사장이 4~5월 두 달치 월급을 떼먹고 도망갔다. 삼성전자·LG전자와 거래하는 대구·구미 지역의 납품업체와 임가공업체들 가운데는 불법체류 중인 이주노동자를 쓰면서, 임금 지급이나 법적인 문제를 용역업체에 떠넘기는 곳이 많다.
충남 서산 동희오토의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씁쓸한 한가위를 맞고 있다. 기아차 모닝을 위탁생산하는 동희오토는 850명이 일하는 생산라인 전체를 13개 사내하청 업체에 맡기고 있다. 고유가로 경차가 인기를 끌면서 수익성도 좋아지고 생산 물량도 늘었지만, 생산직들은 일용직 노동자 대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의 비정규직 노조 관계자는 “회사는 대박이 났는데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다는 현장의 불만이 높아지자, 추석 격려금 20만원을 더 주고 제 돈 내고 먹으라던 아침 식대 2700원 중 1700원을 지원해주겠다고 하더라”면서 “한 달 150만원 정도인 임금은 제자리이고 주야 맞교대로 돌아가는 라인의 노동 강도는 높아지는 형편”이라고 하소연했다.
대전·충청 지역 업체들 중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수도권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는 ‘수도권 규제 완화’ 주장에 울화를 터뜨리는 사례가 많다. 지난해 서울 구로동에서 충북 충주로 옮겨온 중견 금속가공업체의 최아무개 사장은 “10년 전 평당 100만원 하던 시화·반월공단 땅값이 최근엔 500만~600만원까지 오르면서 사업을 키우려는 중견·중소기업들이 상당수 대전 인근으로 몰려왔다”면서 “기업 수가 늘어나면서 납품업체도 찾기 수월해지고 공단 환경도 개선됐는데, 다시 수도권에 특혜를 준다면 누가 지방에 남으려 하겠느냐”고 호소했다. 아파트 건설업체들에 PVC파이프를 납품하는 충남 천안시 인근 중견기업의 이기열 과장은 “건설경기가 어렵기 때문에 수도권에 신도시나 공단이 새로 조성되면 숨통이 트이게 되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방 이전 기업들에 토지 구매비의 절반을 지원하는 등 혜택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수도권 기업 밀어주기 정책을 취한다면 코미디 같은 일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수도권 규제완화 경제 발목 잡을 수도대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이광진 사무처장은 “수도권 건설경기를 살리고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규제 완화에 나선다는 발상은 결국 국내 제조업의 체력을 약화시키고 부동산 투기판만 키우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전 지역 벤처기업 경영자들을 만나보면 지역에서 제품 개발이나 공정 혁신에 골치를 썩이는 대신, 절대농지나 그린벨트가 해제된 수도권 공장 땅을 사서 10년간 그럭저럭 유지하는 게 훨씬 수지맞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게 이 사무처장의 설명이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수도권 규제 완화가 새로운 성장축을 찾아야 하는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1990년대 이전으로 시계를 되돌려버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위원은 “그동안 한국 경제, 특히 제조업은 사실상 수도권과 동남 벨트 두 축을 중심으로만 돌아갔고, 선진국이 되려면 플러스 알파의 새 성장축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라며 “다시 수도권에 특혜를 줘버리면 기업들 버전의 ‘수도권 부동산 불패신화’가 강화돼, 결국 지역 산업 육성과 선진국 도약은 영영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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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안·군산=글·사진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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