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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가 지방 싸움 부추기네

주공·토공이 합치면 어느 도시로 가나… 이전 기관 통폐합 두고 혁신도시 예정지역은 양보 없는 줄다리기
등록 2008-09-11 18:55 수정 2020-05-03 04:25

전북 전주와 경남 진주가 뒤숭숭하다. 진주로 간다는 대한주택공사(주공)와 전주 이전이 정해진 한국토지공사(토공)를 통합한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두 도시에 비상이 걸렸다. 통합 기관의 본사를 끌어오기 위한 승부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분란을 초래한 정부를 성토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당장 유치 전략을 짜는 게 더 시급하다.
전북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도민비상대책위가 출범하고, 100만 명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주민들은 국회·정당·정부 방문, 이전기관 초청 세미나, 도민 결의대회 등을 추진한다.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는 변호사들도 힘을 보탰다. 김영복 전북지방변호사회장은 “정부는 토공과 주공의 통합에 앞서 혁신도시 성공을 위한 대책을 세우라”며 “통합이 불가피하다면 상대적으로 낙후도가 심한 전북에 통합 기관의 본사를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9월4일 충북 청주시 청주체육관 앞에서 충청도민들이 모여 ‘중부내륙첨단산업·관광벨트 관철 충북도민 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지난 9월4일 충북 청주시 청주체육관 앞에서 충청도민들이 모여 ‘중부내륙첨단산업·관광벨트 관철 충북도민 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공공기관이 안 온다, 발칵 뒤집힌 충북

경남은 조용하게 대응했다. 이달 초 혁신도시발전대책위를 꾸리고 본사를 유치하는 활동에 나선다. 통합한다면 자산·매출·인력 면에서 규모가 큰 주공 쪽이 주도권을 행사하리라는 기대 섞인 관측도 있지만 속단하기는 어렵다. 김일식 진주YMCA 사무총장은 “주공의 경남 이전은 변경될 수 없고, 통합하더라도 본사가 당연히 이전해야 한다는 게 주민의 바람”이라며 “정부의 일방통행식 발표로 자칫 지역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충북 진천·음성은 정부의 2차 공기업 민영화 계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 대상인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을 통폐합하고, 한국노동교육원은 아예 폐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애초 충북에 이전할 공공기관 12곳의 면면에도 불만이었다. 예산은 5천억원, 직원 수는 2100명으로 다른 지역의 2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며 볼멘소리를 해왔다. 그런데 이마저도 차질을 빚어 예산의 33%, 면적의 32%, 인원의 16%가 줄어들며 토막이 나게 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주민들은 즉각 들고일어섰다. 정부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잇따라 방문해 항의했다. 통폐합될 3개 기관이 이전하지 않으면 혁신도시의 건설이 무의미하다고 못을 박았다. 대안으로 신설할 정보통신산업진흥원과 방송통신산업진흥원 이전, 공공부문 노동교육을 대체할 한국기술대학교 이전 등을 내놓았다. 정부가 이전 대상 공공기관과 연관된 기업·대학·연구소 등을 함께 입주시켜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수용 전망은 불투명해 주민들의 상실감이 깊다.

진천·괴산·음성·증평이 지역구인 김종률 민주당 의원은 불만과 우려로 가득 찬 주민 정서를 그대로 전달하며 “국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통폐합하는 공공기관을 이전하지 않으면 충북 혁신도시는 지방 발전의 거점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라며 “이곳이 정보통신과 인력개발 분야를 기반으로 성장해야 다른 혁신도시에도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고 호소했다.

한전이 민영화 대상에서 빠진 광주·전남은

이전 대상 기관인 한국전력이 민영화 대상에서 빠진 광주·전남은 고민의 빛깔이 달랐다. 혁신도시가 들어설 나주시 금천·산포면 일대는 추석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지난해 토지 보상이 얼추 매듭지어지자 자식들의 내왕도 뜸해졌다. 내년 추석부터는 타지에서 명절을 맞아야 할 70대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조상 묘지를 이장했으니, 이제 우리 거처를 마련해야지”라며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실시설계와 토지공급이 이뤄지면 늦어도 내년 봄에는 고향을 떠나야 한다. 이번 추석에는 편입되는 12개 마을 어디에서도 흔한 화합잔치나 노래자랑조차 열리지 않는다. 주민 427가구 1200명 대부분이 아직 갈 곳도 할 일도 정하지 못해 마음이 어수선한 탓이다. 앞날이 불안하니 명절이 다가와도 자녀를 찾아 도시로 역귀성을 하는 축이나 마을에 남아 막걸리를 기울여야 하는 축이나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이병연(54) 금천면 동악리장은 “주위에 잔뜩 기대를 부풀려놨지만 언제 한전이 들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동네 사람들은 하나둘 고향을 등지는데 외지인들이 생계조합을 꾸린다, 실버타운을 짓는다며 활개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 혁신도시 예정 지역 10곳의 체감온도는 사뭇 다르다. 새 정부 출범 뒤 4월부터 몰아친 ‘백지화’ 태풍이 지나는가 싶더니 8월에는 ‘민영화 계획’이라는 회오리바람이 불어댔다. 잦은 바람에 주민들은 혼란스러웠다. 약속을 저버리려는 정부·여당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선 때도 있었다. 지난 6월10일 전남 나주에서 열린 ‘지방 살리기와 혁신도시 건설촉구 대회’에는 전국에서 5천여 명이 참석했다. 일부는 단상에서 삭발까지 하며 혁신도시의 축소나 변경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촛불 정국이 펼쳐지자 정부·여당이 자세를 낮췄다. 정부는 혁신도시를 일정대로 추진하고 공기업 민영화의 범위를 줄이는 방식으로 지방의 민심을 달랬다. 혁신도시로 이전하는 공기업의 민영화나 통폐합이 필요해도 일정대로 이전한 뒤 진행하겠다는 약속도 보탰다.

“일관성 없는 정부 믿기 어렵다”

“이 정부를 믿기 어렵습니다. 신뢰할 수 있게 일관성을 갖고 해온 게 별로 없어요. 혁신도시 건설이나 공기업 민영화도 내부에서 뚝딱뚝딱 해서 발표하고 반발이 있다 싶으면 쏙 빼버리고 했잖아요.”

이창용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전국회의’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혁신도시 건설은 공기업 민영화 계획이나 수도권 규제 완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정부와 지방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도 정부가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런 방식으로 밀어붙인 탓에 수도권 대 비수도권, 지방 대 지방의 갈등과 알력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공기업 민영화 방안이 나온 뒤 전북(토공)과 경남(주공), 전남(정보보호진흥원)과 충북(인터넷진흥원), 충북(소프트웨어진흥원)과 경남(전자거래진흥원), 대구(정보사회진흥원)와 제주(정보문화진흥원)가 이전 기관의 통폐합을 두고 양보 없는 줄다리기에 들어갔다. 지방끼리 대립각을 세우는 이런 분란은 공기업의 구조조정과 통합작업이 추진되는 동안은 내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조진형 금오공대 교수(산업시스템공학)는 “공기업이 방만해진 것도 낙하산 인사를 하고 정치자금을 조달한 정치권에 더 큰 책임이 있다”며 “공기업 민영화를 혁신도시 건설의 발목을 잡는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한겨레 지역부문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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