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등 뇌물 수수 폭로로 새로운 국면…청와대와 특검은 의지를 보여줄 것인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이 김성호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를 비롯한 삼성그룹의 불법 로비 대상 명단을 추가로 공개한 것은 ‘삼성 특검’의 1차 수사 기한(3월9일)을 나흘 앞둔 3월5일이었다. 사제단이 지난해 11월12일 임채진 검찰총장(당시 후보자) 등 3명의 ‘떡값 검사’ 명단을 발표한 지 약 넉 달 만이기도 하다.
“직접 전달” 증언의 증거 능력
이번 수뢰자 명단 공개는 지난해 11월의 명단 공개와는 대략 두 가지 점에서 차이를 띤다. 첫째는 김용철 변호사가 뇌물 수수 장면을 “직접 보았”거나 뇌물을 “직접 전달했”다고 밝혔다는 점이다. 김 변호사는 사제단의 기자회견문을 통해 “김성호 후보자는 삼성의 관리 대상으로 평소에 정기적으로 금품을 수수했고, (나 자신이) ‘직접’ 금품을 전달한 사실도 있다”고 밝혔다. 또 “이종찬 청와대 민정수석은 이학수(삼성그룹 부회장) 사무실을 방문해 여름 휴가비를 직접 받아간 적도 있는데, 이 일로 삼성 구조본(현 전략기획실) 직원들이 수군대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김용철 변호사가 지난해 11월 사제단을 통해 뇌물 검사의 명단을 공개할 때 “제공된 현금 액수(를 적은 명단)를 보았다”거나 “삼성이 관리한 검찰 명단을 보았고, (내가) 주요 보직 중심으로 로비 대상 명단을 보완했다”고 증언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수뢰 사건에서는 돈을 준 쪽의 증언도 증거 능력을 갖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공개처럼 ‘뇌물 수수 현장에 실제 있었고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는 대목은 유의미한 차이로 평가된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차이점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핵심 실세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뇌물을 받은 것으로 거론됐다는 사실이다. 국정원장과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정 기관의 핵으로, 새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구실이다. 의혹에 휩싸인 것만으로도 새 정부에 큰 짐을 안기는 막중한 자리다.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을 중심으로 한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 문제’가 뇌물 명단을 고리로 ‘이명박 정권의 핵심 문제’로 번진 것이다. 사제단의 기자회견 종료 직후 재빨리 청와대가 이동관 대변인을 통해 “자체 조사 결과 거론된 분들이 떡값을 받았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후진적 정치 음해”라고 대상자들을 적극 엄호한 건 이런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명단 공개는 사제단 쪽에 일정한 성과와 만만찮은 부담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삼성의 불법 로비 의혹에 대한 특검팀의 수사를 압박하는 효과를 거뒀다는 점은 성과다. 사제단의 기자회견 이튿날 삼성특검팀의 윤정석 특검보는 “김용철 변호사의 진술과 여러 가지 자료들을 취합해 불법 로비 의혹을 조사하고 있다”며 “김 변호사로부터 구체적인 진술을 받고 필요하면 사제단의 자료를 협조받아 의혹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특검팀은 또 지난해 11월 공개된 임채진 검찰총장, 이귀남 대검 중수부장, 이종백 전 국가청렴위원장의 수뢰 의혹에 대해서도 조사하겠다고 했다. 올 1월10일 출범한 삼성 특검팀이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수사에만 주력했을 뿐 임 총장을 비롯한 당사자들을 한 번도 소환하지 않는 등 비자금의 사용처(불법 로비) 조사에는 손을 대지 않았던 기존 태도와 달라 보인다.
사제단으로선 이런 성과 못지않게 ‘부담’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어 보인다. 특검의 수사 결과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뇌물 수수 사건의 본질적인 특성상 진실이 명쾌하게 가려지는 게 쉽지 않다. 정기적으로 뇌물을 주고받는 불법 로비는 현금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돈을 건넸다는 당사자의 증언 외에 영수증 같은 물증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뇌물을 받은 것으로 지목된 쪽에서 “아니다”라고 부인하는 순간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지난해 11월의 떡값 검사 명단 공개 때나 이번의 뇌물 명단 공개 뒤에도 어김없이 진실게임 양상을 보이는 데서 뇌물 사건의 특성은 잘 드러난다.
사제단의 전선은 두 갈래
전선이 두 갈래로 나뉘고 있다는 점은 사제단 쪽에 안겨진 또 다른 짐이다. 사제단과 김용철 변호사 쪽은 지난해 10월29일 삼성 비자금 폭로 뒤 지금껏 ‘삼성 사건’의 핵심으로 이건희 회장 일가의 불법·변칙 경영권 세습 의혹을 꼽아왔다. 탈법적인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관계에 불법 로비를 펼친 것은 그 핵심에서 뻗어나온 곁가지로 여겼다. 따라서 주요 싸움의 대상은 총수 가문과 가신 그룹이었다. 이번 2차 명단 공개로 이제 이명박 정부까지 싸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자칫 전열이 흩어지고 삼성 사건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는 상황이다. 사제단이 명단 공개를 두고 막판까지 고심을 거듭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제단은, 김용철 변호사가 2월29일 평화방송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명단 공개 뜻을 비친 뒤 닷새 만에야 기자회견을 결행했다. 3월7일 김성호 후보자에 대한 국회 정보위의 청문회 자리에 김용철 변호사가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은 것 또한 ‘삼성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정치 쟁점화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제단이 부담을 덜 수 있는 관건은 특검팀의 의지와 김용철 변호사의 추가 진술 내용에 달려 있다. 김 변호사가 특검에서 좀더 구체적인 로비 정황을 제시하고, 여기에 특검팀의 의지가 보태진다면 명확한 물증 없이도 뇌물을 받은 것으로 지목된 이들의 수뢰죄 성립은 가능하다는 게 법조계의 해석이다. 이 경우 당사자들의 의혹을 전면 부인한 이명박 정부로선 법적·도덕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뇌물죄 사건에선 수표를 건네거나, 현금을 주다가 현장에서 걸리지 않는 이상 ‘물증’이 있을 수 없어 결국 줬다는 사람의 주장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줬는지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뇌물죄를 판단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받은 사람은 당연히 받은 적이 없다고 할 테고, 그럼 결국엔 돈을 줬다는 진술의 신빙성으로 판단한다. 정황이 구체적이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전군표 전 국세청장 수뢰 사건은 그 극명한 예로 꼽혔다. 돈을 받은 게 드러나도 대가성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선 “평소에 관리 목적으로 준 것이라면 뇌물로 보며, 공무원 뇌물 사건의 경우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눠 받은 것이라도 큰 그림에서 하나로 본다”고 말했다.
김용철 변호사는 와의 전화 통화에서 “특검팀이 수사할 의지가 있다면 언제라도 출석해 돈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건넸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도 “김 변호사는 김성호 후보자와 대질 신문을 받을 용의도 있다”며 “돈을 건넨 김 변호사의 양심 고백과 뇌물을 받은 당사자의 변명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특검 수사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 공방을 가름할 핵심 열쇠인 특검의 의지에 대해 사제단이나 김용철 변호사는 지금까지 그다지 큰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특히 사제단은 삼성 특검에 대해 능력도 의지도 없다며 사건을 차라리 검찰에 넘기라고 질타할 정도였다.
삼성이 버티는 걸 왜 그냥 놔두나
김 변호사는 사제단의 기자회견 하루 전날 과 만난 자리에서 “특검팀이 의지를 갖고 있었다면 삼성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면서 버티는 걸 그대로 놔둘 리 없었다”고 말했다. “승지원(서울 한남동 이건희 회장 집무실)을 압수 수색할 때 (삼성 쪽을) 제압해 엄히 추궁했어야 한다. 거짓말을 추궁해야 함에도 이학수 부회장이나 김인주 사장을 8시간 정도 조사하고 바로 내보냈다. 단순 절도범에 대해서도 그렇게는 안 한다. (내가 검사 시절에) 운전면허 브로커 비리 사건을 맡았을 때 두 달 내리 불러 조사한 적도 있다. (특검팀이) 나중에 변호사로 돌아가 일할 때 공격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것인지, 다른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김 변호사는 “수사는 ‘신’이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하는 것”이라며 “수사는 ‘의지’다”라고 강조했다.
삼성의 불법 로비 명단을 둘러싼 진실 공방은 특검에서 가름되기 전까지 팽팽한 줄다리기가 길게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특검 수사 뒤에도 공방은 쉽게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김성호 후보자 등 수뢰자로 거명된 이들이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며 강력히 부인하고 있어서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통합민주당까지 가세하면서 민감한 정치 쟁점으로 부각됐다는 점도 치열한 다툼을 예고한다.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대립으로 3월7일로 예정됐던 김성호 후보자에 대한 국회 청문회가 제때 열리지 못하고 파행을 겪은 데서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이런 상황에선 “청와대가 김용철 변호사의 문제 제기에 대해 신중한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핵심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개인 비리 차원을 넘어 삼성과 유착돼 있고, 삼성의 관리 대상이라는 의혹은 정권의 성패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청와대가 자체 조사를 했다면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인 부동산 투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임기 초반이란 중요한 시기에 새 정부의 정책 신뢰성과 직결된 사안임을 감안해야 한다. 청와대가 김 변호사를 직접 면담하든 대질 신문을 하든, 진실을 둘러싼 양쪽 주장을 엄밀히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의혹의 당사자가 사정 기관의 핵심 자리에 올라앉으면 새 정부와 재벌의 밀착 관계를 만들어낸다”며 “그것이 결국은 삼성의 수사뿐 아니라 경제정책의 신뢰에 영향을 끼쳐 결국은 이명박 정부의 실패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특검 빨리 끝내자는 대통령?
김용철 변호사도 청와대 쪽의 섣부른 판단을 경계한다. 그는 과 만난 자리에서 “죄를 논할 때는 현실을 논하는 게 아니다”라며 “실용이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실용이고 사이비 실용”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의 덩치와 경제적 기여도를 감안해 적당히 타협하는 식으로 사법 처리를 마무리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조차 삼성 특검을 빨리 끝내자고 한다. 저 양반이 수사를 받아보기나 했나? 내가 매출 1천억원짜리 회사의 비리를 추적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삼성그룹의 매출은 250조원인데, 삼성 특검팀에는 검사가 3명뿐이고 수사 기간은 최장 105일이다. 조사를 빨리 끝내라?” 김 변호사는 “겨우 공소 유지가 가능할 정도로 (삼성 문제를)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건 특검만 비난할 게 아니고 결국 한국 사회 전체의 수준 문제”라고 말했다.
3월9일로 1차 수사 기한이 지난 삼성 특검팀은 30일 연장해 4월8일까지 조사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특검법에 따라 여기서 다시 수사 기간을 15일 더 연장할 수 있지만, 2차 연장 기간에는 사건을 마무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할 것으로 알려져 4월 중순쯤이면 삼성 특검의 활동은 사실상 마무리된다. 특검이 한국 사회의 수준을 높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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