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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와서 데려간 내 딸, 돌려달라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숨진 베트남 신부 쩐타인란 어머니의 울부짖음, 힘겨운 한국살이 기록된 일기장도 발견돼

▣ 경산=글·사진 박영률 기자 한겨레 지역팀 ylp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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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아, 란아, 내 딸아. 내 딸을 돌려다오.”

대구·경북 지역 2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결혼이주여성 란씨 사망사건 진상규명 긴급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연 3월13일 경북 경산경찰서 앞. 지난 2월6일 숨진 베트남 신부 쩐타인란(22)의 어머니 후인킴아인(48)은 딸의 이름만 끝없이 부르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다 끝내 탈진해 풀썩 주저앉았다. 딸의 사인을 알고 싶어 머나먼 한국 땅을 찾은 지 일주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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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로 온 딸 유골과 위로금 290만원

딸 란이 숨진 날은 한국의 최대 명절인 설 전날이었다. 모두가 가족 품에서 들뜬 휴가를 시작하던 날, 딸은 한국 남편과 살던 아파트 화단에 쓰러져 숨져 있었다. 이들의 집은 14층이었다. 주검은 경찰 검시관의 검안을 거쳐 이틀 만인 2월8일 서둘러 화장됐고, 후인킴아인은 보름 뒤 베트남에서 택배로 온 딸의 유골을 접했다.

어렵게 살아온 딸이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떡과 채소 등을 팔며 혼자서 아버지 없는 딸을 키웠다. 가난한 살림에 딸은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시장에서 엄마를 도와야 했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에도 명랑하고 순진하고 장난이 심한 아이였다. 관절염으로 고통에 절절매는 엄마에게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매일 아파요?” 하나뿐인 딸은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엄마는 늘 딸을 품에 안고 잤다. 처녀로 자라난 딸이 어느 날 말했다. “한국으로 시집가면 엄마를 편히 모실 수 있대요.”

후인킴아인은 딸을 말리지 못했다. 사위 덕은 바라지도 않았다. 딸이라도 풍요로운 나라 한국에 가서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버리길 바랐다. 딸은 빚을 얻어 버스로 5시간 거리의 호찌민에 있는 결혼 중개업체를 찾아갔다. 지난해 8월 초부터 결혼 중개업체에 머물며 한국 남성들과 선을 보더니 8월11일 남편인 ㅎ씨를 만났다. 선을 본 다음날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인 올해 1월11일 딸은 한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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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에 한 통화가 마지막 대화였다. “힘들고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며 울먹이는 딸에게 “좀 참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딸과 연락이 끊겼고 집으로 전화해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 된 2월6일 “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딸의 유골은 위로금 3천달러(약 290만원)와 함께 택배로 왔다.

엄마는 딸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호찌민의 한국 대사관과 베트남 외교부를 찾아가 진상을 밝혀달라고 매달렸다. 지난해 이미 베트남 신부 두 명의 불행한 죽음 소식이 알려진 터라 베트남 언론은 다시 한 번 들끓었다. 한 베트남 기업인의 도움으로 후인킴아인은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입 없는 사람처럼…” “무슨 일 생길지 무섭다”

한국에 온 그는 딸의 죽음을 수사하고 있는 경북 경산경찰서에서 수사 진행 상황을 듣고 사위도 만났다. 사위는 “아내가 적응을 잘하지 못해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이혼하기로 서로 합의하고 베트남으로 돌려보내려고 비행기표까지 끊어뒀는데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고 설명했다.

후인킴아인은 한국 경찰에게서 건네받은 딸의 일기를 보고서야 연락이 끊긴 시기에 딸이 겪은 참담했던 한국 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베트남 공책을 찢은 종이 8장에 앞뒷면으로 빽빽이 기록된 일기는 아파트 화단에서 발견된 딸의 주검 옆 손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딸은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하루라도 빨리 엄마와 가족, 친구들이 있는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다. 엄마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돼 돌아온 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그건 상관없다. 다만 (건강도 안 좋은) 엄마가 더 마음 아파할 게 두렵다.”(1월18일치)

딸의 글을 한줄한줄 읽을 때마다 후인킴아인은 오열했다. 슬픔은 내장 깊은 곳에서 치밀어올라 마지막 남은 기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듯했다. 일기에서 딸은 거의 매일 남편·시어머니와 여러 가지 갈등을 빚었다고 썼다.

란은 1월23일치 일기에서 “나는 그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입 없는 사람처럼 묵묵히 있을 뿐이다. 매일 그냥 방에 조용히 누워 베트남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며 극심한 무력감을 표현했다. 란은 남편 쪽으로부터 인격적 모멸감을 느낀 사연들도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다. 언어소통이 안 되는 것이 양쪽의 관계를 더욱 극단으로 몰아갔다. 말이 안 통하고 불안한 분위기에서는 숟가락으로 반찬통을 치며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는 시어머니의 사소한 ‘폭력’도 큰 충격이 됐다.

일주일 만에 합의 이혼, 귀국 직전 투신?

남편이 무슨 이유에선지 입국 당시 사준 겨울옷 두 벌을 버리고 결혼 사진이 든 액자를 깨버렸다는 날, 란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베트남에 돌아갈 때 아무것도 안 가져간다. 내 가족은 가난하지만 모든 게 다 있다. 이혼하고 돌아가면 그만인데 그들이 왜 그럴까. 빨리 돌아가고 싶다. 매일 무슨 일이 생길지 무섭다.”(1월24일치)

같은 날 그는 “내가 그들에게 베트남에 와달라고 한 게 아니다. 자기들이 필요해 베트남으로 와서 결혼하자고 한 게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인간이다. 단지 나라만 다를 뿐이다”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란은 정작 죽음에 이른 2월6일까지의 마지막 7일간은 어떤 사정에선지 일기를 쓰지 않았다.

경찰은 사실상 “조사는 거의 끝났으며 입국한 뒤 일주일 만에 이혼에 합의한 란이 이혼·귀국 결정에 따른 절망감에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잠정 결론을 내린 상태다. 정지천 경산경찰서 수사과장은 “일기 내용 중 일부는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서 오해가 빚어진 부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후인킴아인은 “일기에 베트남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썼던 내 딸이 귀국을 불과 일주일 남겨놓고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젓고 있다.

후인킴아인은 동행한 베트남 기자 푸프억행(49)과 함께 현재 대구이주민선교센터의 사무실에 딸린 방에서 머물고 있다. 딸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거의 식사를 못해 건강이 나쁜 상태다.

“배우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돈벌이가 목적인 국제결혼 업체의 중개 속에 상품 고르듯이 이루어지는 국제결혼이 낳은 ‘예견된 비극’이다. 국제결혼을 피할 수 없다면 양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관련 시민사회단체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적극 개입해 준비된 국제결혼을 이끌어야 한다. 특히 한국에 온 결혼이민 신부들이 어려움에 처할 경우 기댈 수 있는 기관을 마련하고 신부들을 이곳과 의무적으로 연결해주는 등 다양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후인킴아인 일행을 돕고 있는 경산이주민지원센터 김헌주 소장의 말이다. 현재 한국에는 12만6천 명 이상의 결혼 이주여성이 있으며 최근 들어 농촌 총각 4명 중 한 명꼴로 동남아 여성을 아내로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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