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황 부진·육류 소비 증가·바이오연료 수요 증가에 가속화한 농산물시장 개방으로 생산이 수요 못 따라잡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우리나라는 식량 자급률이 28%이고 전세계 5위의 국제 곡물 수입국이다. 쌀을 제외하면 곡물 자급률이 5%에 불과하다. 그만큼 최근의 국제 곡물가격 급등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곡물가격 급등의 여파로 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메뉴판 교체 중’이다. 슈퍼마켓에 진열된 거의 모든 상품가격이 올랐고, 동네 음식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김치찌개 메뉴판을 바꿔달고 있다.
국제곡물가격지수는 2006년 중반부터 급등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2006년 하반기에 국제 곡물가격은 2005년 5월(저점) 대비 214.8%나 상승했다. 2007년 말에는 2006년 초에 비해 2배 가까이 상승했다. 옥수수·밀·콩에 이어 국제 쌀값도 2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글로벌 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타이의 쌀 가격은 3월1일 1989년 이후 처음으로 t당 500달러대로 올라섰다.
대한민국은 온통 메뉴판 교체 중
곡물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곡물 재고율이 2007년에 16.2%로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상이변으로 유럽·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곡물 작황도 부진하다. 미국 농무부 세계농산물관측(WASDE)에 따르면, 주요국의 곡물 생산량은 2006·2007년에 6천만t이나 감소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밀 생산량은 2005·2006년 2500만t에서 2006·2007년에 900만t으로 급감했다. 세계인의 식생활 패턴이 곡류에서 육류 소비로 전환되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다.
중국·인도 등 신흥경제를 필두로 세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생활수준 상승에 따라 육류 소비가 늘고, 이에 따라 사료곡물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신흥시장 경제가 성장을 멈추지 않는 한 축산물 수요가 계속 증가하면서 곡물값 상승 흐름은 ‘구조적으로’ 지속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특히 신흥경제의 경우 급속한 도시화 진행으로 경작 지역마저 줄어들면서 곡물시장에서 수급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다.
WASDE에 따르면, 2007·2008년에 전세계 곡물 소비량(20억9377만t)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소비량이 생산량을 2134만t 초과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성명환 연구위원은 “국제 곡물값이 2006년부터 2년 연속 뛰고 있다. 과거에는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뛰어도 다시 곡물 생산이 증가하면서 가격이 안정되곤 했는데, 최근 양상은 과거의 행태와 크게 다르다”며 “가격이 앞으로 계속 오르면서 수입 물량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 닥칠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오는 5∼6월에 각국의 밀이 새로 국제시장에 나오더라도 가격 급등세가 멈추기는 어려울 것이란 얘기다.
농업전문가들은 국제곡물 수급구조가 근본적인 전환을 맞고 있다고 말한다. 만성적인 공급 부족 구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병률 연구위원은 “그동안 곡물 수요는 식량과 사료용 둘로 구분됐고, 생산량 등락에 따라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다시 안정을 찾는 패턴이었다”며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갑자기 식량과 사료용 외에 바이오연료가 새로운 수요로 가세한 반면, 공급은 추가로 늘지 않아서 수급에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바이오연료라는 새로운 수요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해 가격이 급등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바이오연료 중 하나인 에탄올 생산을 위한 옥수수 사용 비중은 97·98년 5.5%에서 2007·2008년 26.8%로 대폭 증가했다. 세계 최대 곡물 생산국인 브라질을 비롯해 미국·유럽 등에서 바이오연료용 곡물 사용이 확대되고 있는데, 곡물이 대거 바이오연료용으로 쓰이면서 생산이 소비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양상이다. 유가 급등이 대체에너지인 바이오에탄올 생산을 초래하고, 농지가 이제 연료 생산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격으로, 곡물값 급등 배경에 식량과 에너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옥수수의 39.3%, 미국의 생산집중도 높아
세계 최대의 바이오에탄올 생산국인 브라질은 사탕수수를 주요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데, 미국·브라질이 바이오에탄올 생산설비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게다가 식품기업들까지 바이오연료 사업에 진출하면서 ‘낮은 식품가격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견해가 팽배하고 있다. 스페인의 제당업체인 에브로 풀에바사는 설탕공장을 폐쇄하고 에탄올 바이오연료 산업에 진출한 바 있다. 바이오에탄올을 생산하면 탄소배출량을 60%가량 줄일 수 있다. 물론 2000년 이후 원유가격 상승으로 곡물 생산비용도 눈덩이처럼 증가했다.
곡물값 공포의 밑바탕에는 전세계 곡물 재고량이 2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정도로 바닥을 향해가고 있다는 점이 깔려 있다. 가격 급등도 걱정이지만 곡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문제가 겹치면서 곡물값 급등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상 식량무기화가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빵의 역사에서 빵 부족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런데 곡물가격 급등의 배후에는 구조적으로 또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가속화한 농산물시장 개방이 그것이다. 현재 대규모 곡물 생산은 미국·중국·캐나다·브라질·아르헨티나·오스트레일리아·러시아 등 소수 선진국에 집중돼 있다. 특히 옥수수의 39.3%, 대두 37.7%, 소맥 8.2%가 미국에서 생산될 정도로 미국의 생산집중도가 높다. 또 주요 곡물 메이저들을 보면, 카길·토파·루이 드레퓌스·앙드레 등이 세계 곡물 수출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다. 중앙대 윤석원 교수(산업경제학과)는 “곡물 메이저들이 과점적 구조를 형성하면서 쌀 생산뿐만 아니라 유통·가공 단계까지 모든 과정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 선진국 거대 곡물기업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정적일 때 가격 동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대 김충실 교수(농업경제학)도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곡물 카르텔이 조성되고 있고, 한두 개 메이저들이 시장가격 형성에 개입해 가격을 조작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10여 년간의 농업 개방화 물결 속에서 대다수 개도국들은 농업이 크게 위축됐거나 아예 농업을 포기했다. 곡물 수입 국가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 성명환 연구위원은 “세계무역기구(WTO) 질서에서 농업보조금을 규제한 탓에 각국의 곡물 생산이 크게 줄어든 것도 있기 때문에 최근의 곡물값 폭등 현상을 세계화·개방화의 후폭풍이란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은 그동안 자국 농가소득 중 절반가량을 보조금으로 주는 등 농업을 과보호 또는 육성하면서도 한국 등 개도국에는 무차별적으로 농업보조금 지급 중단과 시장개방을 요구해왔다. 김병률 연구위원은 “미국은 자국 농민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이미 지나칠 정도로 높은 상태에서 농업 보조금 감축을 세계무역기구 협정으로 요구해 관철시켜왔다”며 “그러면서도 자국 곡물가격을 지지하는 농업보호정책을 여전히 지속해왔다”고 말했다.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농업이 위축되고 곡물 수입국으로 처지가 바뀐 개도국들이 곡물가격 급등의 충격을 가장 크게 받고 있는 것이다.
곡물 수입국이 된 개도국이 가장 큰 충격
곡물가격이 폭등하면서 중국·아르헨티나 등 일부 곡물 수출국가들은 수출물량을 제한하고 내수용 곡물 확보에 나서고 있다. 베트남·인도·이집트 등 쌀 수출국들도 최근 쌀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곡물 거래물량이 더욱 줄어들고, 가격은 폭등하고 있다. 김충실 교수는 “취약한 농업국가들마다 세계화 개방 이후 심각한 곡물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며 “농산물 시장 개방의 충격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심각한 양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곡물가격은 원유가격보다 더 쉽게 수요·공급 논리에 따라 빠르게 반응한다. 공산품이 오르면 소비를 좀 줄일 수도 있지만, 식량은 가격이 오른다고 안 먹을 수 없는 노릇”이라며 “농업 개방화의 충격이 농민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물가 급등으로 서민들까지 괴롭히고 있다”고 말했다.
오일쇼크가 터지면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연비 높은 소형차를 타는 노력을 할 수 있지만 식량은 이런 식의 대응이 어렵다. 윤석원 교수는 “밀 대신 쌀국수를 만들어 먹자는 주장이 있지만, 소비자 입맛을 맞출 수 있는지, 또 쌀로 만든 국수의 가격 부담도 있다”며 “현재 라면 한 봉지보다 쌀밥 한 공기가 더 싸다. 밀가루·빵 등을 줄이고 쌀 더 먹기 식생활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국제 기름값이 뛰는데다 세계화에 따른 국제 교역물동량 증가로 해상운임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걸프만 기준 2006년 12월 해상운임은 t당 53달러였으나 2008년 2월에는 92달러 수준으로 뛰었다. 우리나라의 곡물 수입물량 의존도는 2000년에 중국 50.2%(1위), 미국 29.1%였으나 2006년에는 완전히 역전돼 미국이 55%(1위)로 올라서고, 중국은 19.6%로 줄었다. 우리나라가 곡물을 운송해 올 때 중국에서는 하루이틀이면 되지만 미국에서는 15일가량 걸린다. 미국에서 곡물을 대거 수입해야 하는 우리의 경우 해상 수송운임이 더해져 수입 곡물가격이 훨씬 더 비싸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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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세계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 곡물 수요가 다시 줄어들어 가격이 안정을 찾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 경기침체를 저지하기 위해 계속 금리를 내릴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금리 인하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가 가중되면서 곡물가격도 오름세를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금리 인하 - 인플레이션 우려 - 곡물 등 상품가격 급등’의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곡물값 상승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 농업 재검토 계기로
최근의 곡물가격 급등을 ‘인플레이션 우려’라는 시각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한국 농업을 재검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윤석원 교수는 “농사를 포기해 한번 망가진 농지는 회복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고, 사실상 회복이 어렵다. 개방화 이후 지난 10여 년간 비교우위와 경쟁력 잣대로만 한국 농업을 봐왔는데 이제 농업과 농촌 문제를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제 유전 개발하듯 해외 농장 개발에도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곡물 재배 경작지는 180만ha인데, 연간 수입 곡물은 1500만t에 달한다. 경작지 면적이 지금보다 4∼5배는 늘어야 1500만t을 자급할 수 있다. 김병률 연구위원은 “우리가 우크라이나 해외 농업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으나 우크라이나 정부가 나중에 식량안보를 내세워 수출 금지 조처를 취해버릴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며 “곡물값 급등이 장기화할 것이 뻔한데, 대응할 정책 수단이 안 보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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