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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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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일상을 탐닉하라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애타게 몰입할 취미활동을 찾아나선 사람들, 당신의 취미는 몇 개입니까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 사진·정수산 기자 jss49@hani.co.kr

당신의 취미는 무엇입니까?

“없는데요”라고 말한 기리야마(오다기리 조)는 상사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일본 드라마 ). “취미 하나 없으면 결혼도 못해. 취미도 없는 남자는 도량이 없어.” 시효과의 과장은 “(수사과에서 무시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일은 화내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뒤로는 취미생활을 하는 게 멋진 생활이야”라고 말한다. 기리야마군, 1천 개의 학을 접으며 “멋진 취미를 가지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빈다. 그리하여 갖게 되는 취미가 ‘시효가 된 사건 수사하기’다(드라마의 제목이 되는). 과장의 일갈. “어부의 취미가 낚시라는 거구나.”

어부의 낚시와 사냥, 모두 취미

어부의 취미는 낚시도, 사냥도 될 수 있다. 취미니까. 취미의 사전적 의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사냥’을 택한다. 김수진 광지원초등학교 교사는 테디베어를 만든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업무를 하고 나서 퇴근하고 얘네(테디베어)들을 만드는데, 일을 한번 끊어줘서 좋다”고 말한다. 그는 2003년에 초급을 마치고 지난해 여름방학부터 중급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테디클럽에 일주일에 두 번 온다는 원칙을 정하고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가 있는 경기도 광주에서 홍익대 테디클럽까지 차로 꼬박 1시간 반이 걸린다. “테디베어 전문가 과정까지 들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일로 돈을 벌거나 할 생각은 없어요. 저는 제 직업이 너무 좋거든요.” 그는 가르치는 학생들이 테디베어를 좋아해서 좋다. 여기서 선생님의 취미는 ‘낚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여름방학에 만든 큰 곰을 교실에 갖다놓았는데 아이들이 정말 좋아해요.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고민을 곰한테 털어놓는 아이도 있어요. 동시 암송대회의 상품으로 작은 테디베어를 걸었더니 아이들이 보통 때보다 더 열심이더라고요.” “텔레비전을 안 본 지 오래된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다른 여가 시간은 못 내지만 열심히 만들다 보면 하루가 ‘충실’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일은 언제 해?”라는 오해와 달리 ‘사냥꾼’들은 훌륭한 ‘낚시꾼’들이다. 벤처기업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박상윤씨는 뮤지컬을 한다. 올 4월 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습하고 있다. 2월까지는 주말에만 연습이 있지만 3, 4월이 되면 주중에도 시간을 내야 한다. 그가 소속된 ‘극단’은 ‘액션가면’이라는 직장인 뮤지컬 동호회다. 지난해 라는 공연을 근로자연극제에 올렸는데 박씨는 여기서 최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상을 받고 나서 직업적으로 할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는데,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 즐길 수 있을 때 하는 거지요.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뮤지컬을 잠시 쉬어야겠지요.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요.” 그는 앙상블(군무)을 위해 재즈댄스도 배우고 있다. 직업의 특성상 야근도 많다. 그래도 “저녁에 연습이 잡혀 있으면 집중해서 잘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날은 d일이 빨리 끝나요.”

“취미가 무엇입니까.” 미팅의 단골 메뉴인 질문의 답은 열이면 아홉 독서였다. 이에 “독서가 어떻게 취미냐”고 열을 내기도 했다. ‘독서’는 ‘의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되새기면 취미랄 게 없던 시절이었음이 더 눈에 띈다. 독서, 요리, 운동, 음악감상 등 구태의연한 취미들이 다양해졌다.

김경훈 트렌드연구소 소장은 “취미생활의 다양화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새로운 취미 트렌드로 ‘혼자 놀기’를 든다. “취미라는 것이 물론 유행을 타기도 하지만 저마다 자기만의 차별성을 취미활동을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에 ‘세상의 변화보다는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일상을 중시하는 나 중심의 태도’로의 변화가 혼자 놀기, 나만의 독특한 취미, 수집에 대한 관심 증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쓸데없어서 사랑스러운 것들

(마크 펜·키니 잴리슨 지음, 해냄 펴냄)는 ‘작은 흐름’이 세상을 주도한다고 말한다. 1%의 트렌드세터의 선택이 점차 공감대를 얻고 세력을 형성해나간다는 것이다. 책에서 분석한 75가지 트렌드 중에는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10대들과 ‘집중력 과다족’ 등이 있다. 바로 ‘취미활동족’이 시장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이다(상자기사 참조).

‘일상’도 훌륭한 취미의 대상이 된다. 지난해 (갤리온 펴냄)라는 책을 낸 문태곤씨는 대우건설의 토목기사다. 그는 일상의 소소한 일을 포스트잇에 그리고 글을 쓴다. 2003년 타이를 여행할 때 인상적인 건물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수중에 포스트잇밖에 없었기에 ‘이 거대한 취미’가 시작됐다. 그전에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지만 삐뚤빼뚤 그림을 친구들은 재미있어했다. 재미가 붙어 하루에 한 장씩은 그리자는 나름의 원칙도 정했다. 양이 많아져 정리하는 셈으로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게 출판사에 알려져 책까지 펴내게 되었다. “재미도 있지만 자꾸 그리니까 그림도 많이 늘더라고요. 사람이 하루에 조금씩 뭔가에 투자를 하는 게 몰아서 하는 것보다 좋은 효과가 나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 조금씩 생각했던 대로 그림이 나오는 것을 즐기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요.” 그는 여행잡지에도 같은 형식으로 기고를 한다. 나름 ‘전문가’가 된 셈이다. 하지만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그림 그리는 분들이 배우면 더 나을 것 같다고 얘기해주시는데, 업이 아니잖아요. 철저히 아마추어리즘을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그는 “여가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점심을 빨리 먹고 남산에 가기도 하고, 벚꽃 핀 계절에는 도시락 싸가서 꽃놀이를 하고. 주위에 살펴보면 놀 게 너무 많아요.”

‘작은 탐닉’ 사이트(www.smalljoy.co.kr)에는 ‘잘 노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이트 오른쪽 끝에 있는 ‘카테고리 & 키워드’에는 블로그의 글들이 ‘탐닉원정대’의 이름으로 모인다. 이 사이트는 ‘작은 탐닉’ 시리즈가 세상을 향해 뻗친 촉수다. 시리즈를 제작하는 외주기획사 ‘pippul’의 박선영 편집장은 “이제 사람들의 취미가 경지를 넘어 탐닉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시리즈로 나온 책에는 돈을 벌어 와인에 다 써버리는 약사도 있고(약사 벌이도 만만찮을 텐데 그걸 다), 전셋집에 살면서 장난감을 모으는 방송작가도 있다.

사람들이 “도대체 왜”라고 어리둥절해할 만한 ‘설정’이다. 취미는 그리고 탐닉은 가장 쓸모없을 때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한국방송 는 2005년 11월 첫 회 첫 코너로 ‘백해무익한 취미의 세계’를 방송했다. 내레이션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가장 백해무익한 취미를 찾아나가는데, 그들이 내건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시간 소모가 많다 ② 금전 지출이 많다 ③ 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 ④ 부정적 사회인식(나쁘거나 적어도 좋지 않아야) ⑤ 혼자 즐기면서 주위로부터 고립된다 ⑥ 아무리 잘해도 취직, 밥벌이 등에 도움은 전혀 안 된다 ⑦ 중독성이 높다 ⑧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이다. 탐색 결과 1위는 프라모델, 2위는 퍼즐이었다. 많은 취미들은 정도가 다르더라도 “쓸데없다.” 프로그램의 결론은 이랬다. “세상의 편견을 향해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이 취미는 이익도 명성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을 그것을 느끼게 해준다.”

싫으면 묏자리나 보러 다니든가

취미활동은 ‘몰입’이다. (해냄 펴냄)에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순간이 일에서 여가로 옮겨가는 현상을 주목한다. “여가는 생산활동이 구태의연하고 무의미해진 시대일수록 득세한다. 앞으로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여가에 쏟을 것이고 더 정교하고 인위적인 자극에 의존할 것이다.” 칙센트미하이는 묻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 몸을 담그고서도 이러한 특성을 결합하여 삶의 방식을 새롭게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 해답은 몰입이다. 몰입의 경험은 전염성이 있다. 다시 한 번 훌륭한 ‘사냥꾼’은 ‘낚시꾼’인 것이다. 그리고 몰입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몰입을 찾아 이동한다. ‘1인1취미’는 ‘1인다취미’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것이다. 이제 미팅에서는 “당신의 취미는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어떤 종류의 취미를 갖고 있나요” “당신의 취미는 몇 개인가요”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몰입은, 탐닉은, 취미는 삶 그 자체를 만들어낸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인용문으로 을 연다. 영국 시인 W. H. 오든의 말이다. “참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은 주저 말고 나서라. 싫으면 그뿐이지만, 그럼 묏자리나 보러 다니든가.”



뜨개질하는 10대, 집중력 과다족

가 분석하는 트렌드를 끌고 갈 ‘취미생활’



“정보화 시대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더 이상 ‘메가트렌드’나 ‘전세계적인 경험’만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의 분파적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움직이려면 서로 엇갈린 방향으로 빠르고 격렬하게 나아가며 성장하고 있는 열정적인 주체성 집단을 이해해야 한다.” 1월2일 발간된 (해냄 펴냄)에서 마크 펜과 킨니 잴리슨은 이렇게 말한다. 이 책에서 뽑은 트렌드 75개 중 ‘취미생활’과 관련된 항목도 많다. 취미생활이 트렌드를 이끌고 나가는 것이다.

젊은 뜨개질족 할머니가 안경을 코에 걸치고 안락의자에 앉아서 하는 뜨개질은 잊어라. 10대들 사이에서 뜨개질이 유행하고 있다. 성인들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뜨개질을 하듯이 10대들도 일주일 내내 붙어다니는 친구들에게서, 대학 진학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 첨단기술의 움직임이 있으면 1차원적인 기술을 손에 익히는 사람들이 대거 생겨난다. 10대들의 유행은 한 분야에 머물지 않으므로, 자신이 직접 만드는 상품이 많아질 것이다.
주의력 과다족(LAS·Long Attention Span) 집중력 지속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연구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주파수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 베스트셀러 책들은 10년 전보다 평균 100페이지가 길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3분이었지만 1995년 클린턴 대통령은 76분 동안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결정적으로 증가하는 퍼즐족이 이를 증명한다. 십자말풀이, 스도쿠에 그들은 열광한다.
사회적 별종들 기술이 내성적인 사람을 외향적인 사람으로 바꾸었다. 기술적으로 능숙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멸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그런 이미지를 차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성격유형검사를 해보니 결과는 그 반대였다. 열성적인 기술광들은 거의 외향적이었다. 이들은 가족과 숙제, 학교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가장 능동적이고 바쁜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오늘날 사교성을 높이려면 ‘별종’이 되어야 한다. 웹사이트,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종 러다이트(기계파괴) 대부분의 사람들이 TV 앞에 몰려들 때 TV 보기를 거부한 사람들처럼, 많은 이들은 인터넷 시대에 인터넷 하기를 거부한다. 인터넷 비사용자들은 노인이거나 오지에 사는 사람이지만, 인터넷 사용 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은 젊고 도시에 살며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기를 희망한다.
양궁맘 스포츠의 틈새화가 일어난다. 미국은 1979년에 스포츠 채널이 딱 하나였지만 지금은 24개로 늘어났다. 미식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 이른바 ‘빅4’라고 일컫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늘어난 스포츠 인구는 무얼 하는가. 카약, 래프팅, 스노보드, 마운트바이킹, 양궁, 라크로스, 펜싱, 댄스 등을 즐기고 있다. ‘여가와 오락’ 카테고리에는 이외에도 포르노맨, 성인비디오게임족, 네오클래식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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