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공 재무장관 지낸 경제학자, 인수위 국가경쟁력강화특위원장 사공일을 통해 본 새 정부 비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12월26일 공식 출범한 이명박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위원장 이경숙)에서 누구 못지않게 관심을 끈 이는 국가경쟁력강화특위 위원장으로 발탁된 사공일(68)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다.
국가경쟁력강화특위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과 정부 혁신, 규제 개혁, 투자 유치 같은 이명박 당선자의 대표 정책을 다듬는 구실을 맡고 있다. 통상적인 현안을 관장하는 7개 분과와 달리 중장기 어젠다와 임기 내내 지속될 과제들을 다룬다. ‘이명박 정부의 색깔’을 결정짓는 곳이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에 영입돼 화제를 뿌린 데이비드 엘든 두바이국제금융센터기구(DIFCA) 회장이 특위 공동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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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국가경쟁력강화특위 위원장으로 영입된 사공일(가운데) 전 재무부 장관이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8년 1월29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대기업 회장 및 사장들을 상대로 오찬 강연을 하면서 민간 여신의 축소 공급 방침을 밝히고 있다. 오른쪽은 구자경 당시 전경련 회장. (사진/연합)
불법 정치자금 모금 ‘전력’
특위에 배치된 인원은 27명으로 182명 규모의 인수위에서 가장 큰 조직이다. 비교적 큰 규모의 경제2분과와 사회·교육 분과도 20명 수준이다. 인수위 전체 부위원장인 김형오 의원이 특위 부위원장을 겸하고 있다는 사실은 특위의 높은 비중을 짐작게 한다.
특위의 위상은 이렇게 높은 데 견줘 사공 위원장과 이명박 당선자의 인연은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다. 사공 위원장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자문교수단장과 경제살리기특위 고문으로 참여한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더욱이 그는 전두환·노태우 군부 정권 아래서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불법 정치자금을 모금한 ‘전력’이 있다. 당선자 처지에선 새 정부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중책을 선뜻 맡기기엔 부담을 느꼈을 법한 이력이다.
인수위 안팎에선 특위 위원장에 사공 이사장을 임명한 데서 이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고 평가한다. 과거의 이력보다는 그 사람의 ‘기능’과 ‘역량’을 중심에 둔다는 것이다. 인수위 출범에 하루 앞서 5공화국 시절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 입법의원 경력의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을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할 때 그런 기류는 이미 확인됐다.
과거 흠결에 구애되지 않는 인사 스타일은 인재풀의 부족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는 분석이다. 인수위 핵심 관계자는 “정·관계를 두루 꿰뚫고 정치 감각도 있어야 하는데, 야당 10년 하고 나니까 마땅한 인물군이 없더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능력을 중시해도 ‘우리 편’인지 아닌지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사공 위원장은 김영삼 정부에서 국제통화기금(IMF) 특별고문을,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9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외교통상부 대외경제통상 대사를 지냈다. 이전과는 뚜렷하게 다른 성격의 정권에서도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름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1982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사공 위원장을 부원장으로 발탁했던 김기환 골드만삭스 고문은 “적극적인 개방과 국제화, 세계화를 주창하는 시장주의자로 발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평했다. KDI 후배인 송대희 감사원 평가연구원 원장은 “이론만 아는 학자들과는 다르다”며 “균형감각을 갖고 있어 정책을 조율하는 데 강점이 있다”고 했다.
경제 교육 프로그램으로 ‘대박’
경북 군위 출신의 사공 위원장이 경북고·서울대 상대를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대학원(UCLA)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건 1969년, 그가 29살 때였다. 화려한 경력의 시작인 동시에 시장중심주의자로 자리매김되는 학문적 배경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사공 박사는 미국 뉴욕대 경제학 교수, 영국 셰필드대 초청 경제학 교수를 거쳐 1973년 KDI 연구원으로 영입된다. 그를 뽑은 것은 김만제 KDI 초대 원장이었다.
김기환 원장 시절 부원장으로 발탁된 사공 박사는 한국방송과 더불어 진행한 ‘경제 교육 프로그램’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김기환 고문은 “당시 청와대와 교감을 이뤄 만든 그 프로그램은 경제 개혁을 위해 국민들을 상대로 한 경제 교육과 홍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며 “방송사 팀과 함께 미국, 중남미 등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여러 경제학자와 경제정책 입안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으로, 요샛말로 하면 ‘대박’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이는 사공 박사가 KDI 부원장에서 산업연구원(KIET) 원장으로 승진한 뒤 나중에 공직으로 진출하게 되는 한 실마리였다.
사공 박사가 5공화국의 청와대와 인연을 맺은 직접적인 계기는 1983년, 버마(현 미얀마) 독립 영웅인 아웅산의 묘소에서 벌어진 테러였다. 북한 쪽의 소행으로 드러난 이 사건에서 순직한 17명 가운데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끼어 있었고, 사공 박사는 그 빈자리를 채우는 후속 인사에서 경제수석 바통을 이어받게 된다. 사공 박사는 1987년까지 4년 가까이 경제수석으로 재임한다. 청와대 수석이 경제 부처 장관을 압도하는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전두환 정권 후반기의 경제정책을 쥐락펴락했던 셈이다. 그는 청와대 경제수석에 이어 전두환 정권 말기와 노태우 정부 초기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두 정권 경제정책의 가교 노릇을 했다.
사공 박사는 문민정부 출범 즈음인 1993년 2월 세계경제연구원을 설립해 지금까지 15년 가까이 이사장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세계경제연구원은 국내외 석학, 재계 지도자와 주요국 및 국제기구 고위 정책 담당자들을 초청해 특별 강연회를 열고 주요 현안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있는 민간 연구기관이다. 연구원 이사장으로 1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해온 것은 시장주의자라는 그의 면모를 더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학자, 정책 담당자들과 폭넓은 교분을 나누고 있다는 ‘국제통’의 이미지도 얻게 했다. 이는 여러 정권에 걸쳐 일정한 역할을 맡은 데 이어 이명박 당선자의 인수위에 영입된 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공 위원장은 김기환 고문과 흔히 비교된다. KDI에서 원장·부원장으로 호흡을 맞췄을 뿐 아니라 철저한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라는 점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외국 학자나 정책 담당자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으로 꼽힌다.
일간지 기고글 “기업 하기 좋게”
차이도 있다.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김 고문이 대외개방 쪽에 더 관심을 두고 ‘금융 허브’ 구상에 몰두하고 있는 데 견줘 사공 위원장은 싱가포르를 발전 모델로 삼는 산업정책에 상대적으로 더 높은 관심을 표명해왔다는 평이다. 5공화국 시절 경제수석으로 일할 당시 전임자인 김재익 수석과 비교되는 게 같은 맥락에서다. 김재익 수석이 개방과 시장자율로 개발독재의 폐해를 극복하자는 자기 철학을 분명하게 드러낸 반면, 사공 수석의 색깔은 상대적으로 흐릿했다.
따라서 적어도 전두환 정권 때의 업무 스타일로만 평가해볼 때 사공 위원장은 개발독재와 시장주의가 혼재된 노선을 지녔다는 평이다. 공직을 떠나 민간 경제연구소를 꾸리고 세계적인 학자들과 교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경제 철학은 얼마나 변했을까? 사공 위원장은 인수위 출범 직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새 정부의 국정 초점으로 성장 잠재력 확충을 위한 ‘기업 하기 좋은 여건’을 들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흔히 들어볼 수 있었던 구호임에도 똑같은 어감으로 들리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