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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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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와 삼성의 끈적끈적한 5년

등록 2007-11-30 00:00 수정 2020-05-03 04:25

노 대통령과 이학수 실장 고교 선후배, 참모진 일부 삼성과 긴밀한 관계, 주요 정책은 삼성의 입맛대로 요리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참여정부 초창기 청와대 주변에서는 ‘강원도 3인방’ 얘기가 심심찮게 나돌았다. 강원도 태생으로 나란히 비서관에 오른 관료 출신 ㄱ씨, 386 운동권 ㅇ씨, 언론인·당료 출신 ㅈ씨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 ‘강원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구설이었다.

이들 셋을 한 덩어리로 묶는 고리는 출신지와 함께 ‘삼성그룹’이었다. 삼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삼성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의혹에 싸인 이들 셋을 통해 삼성의 이데올로기가 청와대로 침투해 참여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된다는 것이었다.

금산법·공정거래법의 후퇴

참여정부가 다른 재벌들보다 유독 삼성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의혹의 실마리는 이 밖에도 많다. 출범 첫해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을 정보통신부 장관에 임명하고 홍석현 회장을 주미대사로 발탁한 건 소소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2005년에는 이언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를 국가정보원 최고정보책임자로 영입해 눈길을 끌었다. 민간 부문의 ‘유연한 머리’를 빌려오기 위한 것이라고만 보기엔 너무 중대한 자리로 여겨져 상당한 의구심을 남긴 대목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삼성의 공식적인 접점은 1999년께부터 발견된다. 노 대통령은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동남지역발전특위 위원장으로 ‘삼성자동차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인권변호사로 주로 활동했던 노 대통령이 재계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단초였다. 노 대통령과 삼성을 연결하는 인적 고리로는 삼성의 2인자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이 주로 꼽힌다.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1년 선배인 이 실장은 1999년 당시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으로 삼성차 매각 처리를 도맡고 있었다. 노 대통령과 이 실장 사이에 고등학교 선후배 이상의 인연이 싹튼 것이 이때라고 한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전인 2003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삼성경제연구소의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400여 쪽 분량의 방대한 보고서가 제출돼 참여정부의 국정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웬만큼 알려져 있다. 삼성과 참여정부가 밀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 ‘삼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국정이 굴러간다’는 분석을 낳은 한 실마리였다. 노 대통령이 취임 6개월 만인 2003년 8·15 광복 경축사에서 제기한 ‘2만달러론’이나 참여정부 산업정책의 주요 줄기로 제시된 산업 클러스터(집적단지) 조성 방안 역시 삼성그룹에서 선도적으로 제기한 구호였다. 특히 2만달러론의 경우 참여정부의 애초 국정 철학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여겨져 나중에까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삼성연구소의 보고서나 2만달러론, 산업 클러스터 추진 사례에서 이미 그 싹을 드러낸 것처럼,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금산법)이나 공정거래법 개정 같은 굵직굵직한 삼성 관련 쟁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삼성의 입맛대로 요리되는 양상이었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재벌 계열 금융사의 계열사 주식에 대해 특수관계인 지분을 포함해 30%까지 의결권을 인정해주도록 바뀐 적이 있다. 1986년부터 유지돼온 금융과 산업의 분리 원칙에 파열구를 만들어놓은 개악 조처였다. 참여정부는 애초 이를 교정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삼성 쪽의 압박에 밀려 흐지부지됐다. 삼성 총수 일가에게 이는 적은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할 수 있는 지렛대를 계속 쥐어준 것이다. 금산법(24조) 개정 또한 재벌 계열 금융사의 동일 계열사 지분 소유를 5% 이내로 제한하려던 애초 개혁안에서 후퇴해 ‘5% 초과 지분의 의결권만 제한하고 보유는 허용’하도록 했다. 더욱이 삼성에서 압박을 받은 흔적을 남긴 재정경제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부칙’ 조항에선 개정안 시행 전에 취득한 5% 초과 지분은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삼성 계열 금융사의 지분 초과 보유는 기왕에 이뤄진 것이니 법 위반을 눈감아준다는 엉터리 개정이었다.

‘삼성 독재’의 지경까지 와 있다

송태수 한국노동교육원 교수는 11월23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가 주최한 삼성 관련 토론회에서 주제 발표를 통해 “다른 기업들이 룰(법과 제도, 규칙) 수용자인 반면, 삼성은 스스로 ‘룰 메이커’가 되려 한다”고 분석했다. “기업이 경제적 이익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삼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존 룰을 어기고도 제재를 회피하며 한발 더 나아가 기존 룰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려고 한다.” 송 교수는 “삼성의 이런 행태는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정면으로 깨는 체제 위협 요인”이라고 덧붙인다.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잇단 양심 고백에서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났듯 삼성이 룰 메이커로 자리매김되는 메커니즘은 불법 로비로 관료 집단과 검찰을 비롯한 국가 기구를 부패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을 지낸 이용철 변호사가 11월19일 ‘삼성 이건희 불법규명 국민운동’을 통해 폭로한 내용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을 그대로 뒷받침해 충격을 더했다. 2004년 1월 설 무렵 삼성 쪽에서 500만원을 받고 돌려준 적이 있다는 이 변호사의 증언은, ‘삼성그룹이 명절 때 정·관계 및 검찰 간부 등에게 500만~2천만원을 건넸다’는 김 변호사의 고백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김 변호사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찰, 재경부, 국세청, 금융감독원을 넘어 청와대까지 삼성의 관리 대상에 포함돼 있는 현실을 새삼 실감케 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삼성의 뇌물 제공 행태가 통상적인 비즈니스 과정에서 벌어지는 것과는 뚜렷이 구별된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사업하다 보면 다 그렇게 뇌물 주고 하는 거 아니냐’라고 하지만, 삼성의 로비는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 인·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뒷구멍’으로 뇌물을 주고 하는 건 어느 사회에나 다 있다. 그런데 지금 제기된 문제의 로비는 삼성전자가 인·허가를 따기 위해 사업상 ‘필요악’으로 한 게 아니다. 이건 완전히 지배주주(이건희 회장 일가)의 사적 이익(불법 경영권 승계 관철)을 위해 회사가 ‘법률적 위험’을 감수하며 벌인 짓이다.” 전 교수는 “로비의 대상이 경제관료만이 아니라 청와대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기업이 먹고살기 위해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기업 스스로 경제권력을 넘어 정치권력의 양상을 띠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는 ‘삼성 독재’의 지경에 와 있다는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에 이은 이용철 변호사의 폭로 뒤 공적 기구들이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우리 사회가 이제 ‘삼성공화국’을 넘어 ‘삼성제국’에 의한 ‘삼성독재’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진단을 흘려들을 수 없게 했다. 검찰은 계좌번호까지 덧붙여 제시된 삼성의 비자금 조성·관리 의혹에 꿈쩍 않다가 시민단체의 고발과 일부 뇌물 검사들의 명단 공개 뒤에야 마지못해 수사에 나섰다. 비자금을 은닉한 차명계좌 개설처인 우리은행에 대해 금감원이 금융실명제 위반 혐의를 조사하겠다고 나선 시점은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 뒤 무려 3주일이 지나서였다. 청와대의 움직임 또한 무성한 의혹을 낳았다. 삼성 비자금 등에 대한 국회 쪽의 특검 추진에 청와대는 ‘공직자부패수사처 설치법’과 연계해 통과시키지 않을 경우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구체적인 물증까지 덧붙인 이용철 변호사의 폭로 내용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벌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실상 또한 공적 기구들의 무력함과 다를 바 없는 삼성 독재 시대의 부패 불감증을 반영한다.

왜 X파일 사건을 묻어버렸나

우리 사회의 경제권력인 재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으로 비쳐졌던 참여정부 들어서 오히려 더 심한 유착 양상 내지는 경제권력의 정치권력화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논란을 촉발시킨 지난해 4월의 인터넷 매체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측근 ㅇ의원을 고리로 한 참여정부와 삼성의 밀착 관계를 거론하면서 참모진의 역량 부족을 원인으로 꼽은 바 있다. “(ㅇ의원 같은) ‘386’들이 운동을 했고 정의감은 있지만, 아는 게 없고 전문성이 없다. 국회에 진출하지 않으면 딱히 갈 데도 없다.” 청와대 참모진은 재경부를 중심으로 한 관료 조직과 밀착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관료 조직은 다시 로비를 끈으로 삼성에 장악돼 있다는 전언이었다. “삼성이 재경부의 정책 방안을 만들어주는 경우까지 있다. 이미 드러났듯 금산법 개정안은 ‘김&장 법률사무소’와 삼성 쪽에서 만들어준 거다.”

비슷한 분석이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주간 (11월7일)에 실린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김 소장은 재벌 문제를 비롯한 경제 분야의 실패는 노 대통령의 ‘패배주의’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한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의 문제를 잘 모르다 보니 두려움에 빠졌고, 개혁 대신 타협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X파일 사건’ 때 이건희 회장을 소환조차 하지 않은 채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며 묻어버린 노 대통령의 언급은 ‘재벌과의 대연정’이 완성됐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노 대통령은 패배주의에 따른 내부 개혁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려고 대외 개방이라는 충격 요법으로 돌파하는 ‘모험주의’ 선택을 하게 됐고, 그 전형적인 사례가 한-미 FTA 추진이었다고 김 소장은 덧붙였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노 대통령이 의 힘을 과소평가한 반면, 까지 아우르는 삼성그룹의 힘은 과대평가해 당선자 시절부터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한다. 대선 과정에서 돈을 받은 원죄로 발목이 잡혀 재벌 개혁에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것을 넘어, ‘삼성을 건드리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삼성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삼성 내부적으로는 총수의 독재체제가 자리잡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삼성이 국민경제, 나아가 나라 전체를 독재적으로 지배하는 ‘이중 독재체제’”로 우리 사회를 규정하고, “비자금 파문 뒤 해명하는 양상을 보면, 삼성 구성원 전체 또는 간부들이 권력의 맛에 중독된 모습까지 엿보인다”고 말했다.

검찰과 특검이 끝낼 수 있을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0월29일 첫 기자회견 때 이미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짚고 있었다. 사제단은 당시 성명서에서 “옛날 군부독재 정권의 독선과 오만을 오늘날에는 어이없게도 자본과 기업이 자행하고 있다”며 “제2의 민주주의 운동, 곧 경제정의 민주주의 운동을 펼쳐야 할 때”라고 밝혔다. 새로운 독재권력 시대라는 분석까지 낳을 정도로 심각해진 ‘삼성 스캔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검찰이나 특검의 수사로 걷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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