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안기부가 나를 재판했다”

등록 2007-11-02 00:00 수정 2020-05-03 04:25

‘송씨일가 간첩단’ 송기준씨가 고발하는 사법부의 굴욕… 구금·고문으로 사건 만든 뒤 판사 바꿔가며 유죄판결 끌어내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4495명.’1951년부터 1996년 사이에 검거·사살·자수 등의 형태로 당국이 파악한 북쪽 공작원 수다. 생환했거나, 당국이 파악하지 못한 공작원은 이보다 많을 것이다. 같은 기간 남쪽에서 북으로 침투시킨 북파 요원은 정보사 요원만 하더라도 생환자를 포함해 1만1273명에 이른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과거사위·위원장 안병욱)가 10월24일 내놓은 여섯 권 분량의 최종보고서는 “대한민국에서 간첩을 막아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절명의 과제였고, 국민 모두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국가 대사였다”고 썼다. 극한 대결의 시대, 폭력과 광기는 우리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안기부 청주분실, 사건이 시작되다

1982년 3월7일 새벽 5시께 서울 서초구 신동아아파트 한 동에서 적막을 깨고 초인종이 울렸다. 반바지 차림으로 문을 연 송기준(당시 54살)씨 집 안으로 괴청년 3명이 들이닥쳤다. 무작정 자신을 끌고 나가는 청년들에게 송씨는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물었다. 누군가 “안기부에서 왔다”고 말했다. 송씨는 다시 물었다. “안기부가 뭐하는 곳이오?” “옛날 중앙정보부”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검은색 승용차가 대기 중이었다. 앞에 두 사람이 앉고, 뒷좌석에 두 사람이 송씨를 가운데에 앉히고 양옆에서 붙잡았다. 이어 수갑을 채우고 눈을 헝겊으로 가렸다. “고개 숙여, 이 새끼야!” 쇳소리와 함께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2시간여를 달렸다. 차가 멈췄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건물 2층으로 끌려갔다. 눈을 가린 헝겊을 풀었다. 지옥이 눈앞에 있었다.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다. 단 1초의 틈도 없었다. 푸른 군복으로 갈아입기 무섭게 매질이 시작됐다. “내리 사흘간 잠 한숨 재우지 않고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아무 데나 때렸다. 의자에 양손을 묶어놓고, 발로 정강이를 찼다. 엎어놓고 때리고, 발을 짓이겼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데 한마디도 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그저 그렇게 매타작을 당했다. 그러다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송씨는 며칠 뒤에야 고문하는 자들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끌려온 곳이 어딘지 알게 됐다고 했다. 안기부 청주분실이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난 그때 생각만 하면 이렇게….” 경기 광주시 도척면 방도리 방등골의 허름한 집에서 마주한 송씨는 눈물부터 보였다. 일흔아홉 노인은 1시간 반 남짓 인터뷰 내내 그렇게 소리 없이 흐느꼈다. 흐느낌이 잠시 멈출 때면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딸이 담배 끊으라고…. 없는 돈에 과일을 끊기지 않게 사오고 있지만…, 그때 생각만 하면 담배를 안 피울 수가 없어.” 송씨의 눈가에 다시 물기가 번졌다.

정신을 수습한 송씨가 물었다. “도대체 나한테 뭘 말하라는 거냐”고. 붙들려가 매질을 당한 지 사나흘 만에야 ‘송창섭’이란 이름이 나왔다. 송씨의 재당숙뻘인 송창섭씨는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인물로, 1960년 4·19 직후 잠시 남으로 내려와 민주당 정권 아래서 재무장관을 지낸 김영선과 자신의 가족·친척을 만나고 북으로 돌아갔다.

△‘간첩으로 만들어진 사람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은 암흑의 독재시절 사법부의 굴욕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 왼쪽부터 사건 발표 당시 송기준, 송기섭, 송기홍, 송기수, 한영희, 송기성씨와 송씨 일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송창섭씨의 젊은 시절 모습.

이렇게 쓰랬다가, 내일은 다르게 쓰라고…

“송창섭이를 언제 몇 번 만났느냐. 이북에 몇 번 갔다 왔느냐. 이북 갔을 때 무슨 짓을 했느냐.” 질문이 쏟아졌다. “10살 무렵 할아버지 따라 청주에서 결혼식을 하던 날 잠깐 본 이후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기다렸다는 듯 주먹이 날아들었다. “사실대로 말하라”며 쉼 없이 뭇매가 퍼부어졌다. “전기고문, 거꾸로 매달고 물 먹이기, 손톱 사이 찌르기, 의자에 앉힌 뒤 양손을 의자에 매고 양 정강이와 모를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기, 눕혀놓고 여럿이 무자비하게 밟고 때리기…. 말로는 표현이 다 안 된다.” 송씨가 치를 떨었다.

“의자에 양손과 상체를 동아줄로 꽁꽁 묶어놓고 아침 9시부터 저녁까지 앞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고 사이다병으로 때렸다. 그 매타작을 몸으로 다 받아내야 하니 의자에 않은 채 까무러친 게 부지기수다. 그렇게 다리를 죽도록 맞고 보니, 바지를 벗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부어올라 걸음은 물론이고 거동을 못해 화장실에도 부축을 받고서 가야 했다.”

차라리 꿈이길 바랐다. 정좌로 앉힌 다음 정강이에 굵은 몽둥이를 넣고, 무릎 밑에도 몽둥이를 깔고 수사관 2명이 양쪽에서 사정없이 내려밟기도 했다. 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것 같고, 머릿속이 허옇게 변하기도 했다. 그들은 때리기 위해 존재하는 기계였고, 송씨 자신은 역시 맞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해 4월15일 서울 남산 안기부로 옮겨진 뒤에도 참극은 그치지 않았고, 간혹 옆방에서 아는 목소리가 고통 속에 절규하는 게 들려왔다. 송씨의 뒤를 이어 끌려온 가족과 친지였다.

그가 안기부에 불법 구금된 기간은 모두 116일이다. 군사독재의 무법천지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송씨는 “가족들은 내게 ‘살아남은 게 용하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 매를 맞으며 버텨 살아나온 내가 용하다”고 말했다.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우선 살아야 했다. 살아서 이 지옥을 벗어나기만 하면 진실은 가려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악귀’들이 시키는 대로, 부르면 부르는 대로 받아썼다. 오늘은 이렇게 쓰라고 했다가, 내일은 또 다르게 쓰라고 했다. 아침에 썼던 내용이 맘에 안 든다며 저녁에 고쳐 쓰게도 했다. 그렇게 되풀이해 진술서를 쓰는 사이, 그의 오른손 중지 끝이 곪아터져 피가 나올 정도였다. “저 죽을 구덩이인 줄 알면서도, 매와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해야 했던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나. 그저 안기부만 벗어나면 된다고, 재판정에서 진실은 분명 밝혀질 거라고 믿었다.” 송씨가 헛헛하게 웃었다.

그해 7월 초 송씨는 서울구치소로 이송됐다. 마침내 안기부를 벗어났다는 게 꿈만 같았다. 악몽에 시달리던 며칠 뒤 검사와 마주 앉았다. “고문에 못 이겨 살아남기 위해 허위 자백을 했다. 진술 내용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구세주를 만난 듯 억울함을 호소하던 송씨는 이어진 검사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 사람 안 되겠네. 이만큼 쓰고 왜 이러나, 왜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검사가 다시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안기부원 입회 아래 검사 신문

“교도관이 검사 신문이 있다고 구치소 2층으로 데리고 갔다. 검사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안기부에서 나를 고문하던 수사관 3명이 와 있었다. 아찔했다. 땅이 푹 꺼져서 숨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안기부에 가서 다시 맛을 더 봐야겠느냐”고 으름장을 놨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다시 데리고 갈 것만 같았다. 이제 가면 그예 죽겠구나, 공포가 밀려왔다. “예, 예, 알겠습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윽고 검사가 나타났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검사 앞에서 다시 허위 자백이라고 말했다. 검사가 ‘이 사람 정말 안 되겠구만, 다시 보내야겠어’ 하더니, 이내 안기부원들이 몰려왔다. 안기부원이 입회한 상태에서 검사 신문이 이어졌다. 그들은 한 몸이었던 게다.” 송씨는 “그래도 입북만큼은 하지 않았노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며 “법정에 가야만 내가 살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고 말했다.

“6·25 때 충북도 인민위원회 상공부장으로 활동하다 월북한 뒤 남파된 송창섭에게 포섭돼, 서울·충북을 거점으로 25년간 간첩 활동을 해온 그의 처와 아들을 포함한 28명의 간첩단을 적발했다.” 1982년 9월10일 여름의 끝자락에서 안기부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송씨에겐 간첩방조·탈출·잠입·회합통신·기밀탐지·수집 간첩죄 등이 들씌워졌다. 이윽고 9월 말 재판이 시작됐다.

“무조건 거짓말이라고 했다. 기소 내용 모두 모진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했다. 검사 손까지 떠났으니 맘먹은 대로,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검찰 신문 과정에 안기부원이 입회까지 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귀를 막았다. 공소장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인용했다. 그해 12월24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사형 2명, 무기징역 1명, 징역 15년 1명, 징역 5년6월 2명, 집행유예 1~5년 5명 등의 무거운 형량이 내려졌다. 송씨는 사형이 선고된 2명 중 1명이었다. 송씨는 그제야 가족면회를 할 수 있었다.

“사형수가 되고서도 담담했다. 설마 밝혀지겠지…. 뭐 무감각이었다. 내가 죄가 없는데 법원에서 어떻게든 가려주겠지, 믿음이 있었다.” 지루한 법정 공방이 재개됐다. 이듬해 4월 항소심에서도 약간의 감형(송씨는 징역 25년)만 있었을 뿐 원심을 대부분 인용했다.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안기부원은 질문을 하는 변호인에게 “나를 어떻게 보고 신문하려 드느냐”고 윽박을 지르기도 했지만, 재판부는 제지하지 않았다. 송씨는 “말이 재판이지, 그게 재판이었겠느냐”고 말했다.

유례없는 세 번째 상고심을 뒤집은 것

마지막 기회인 상고심, 대법원에선 상황이 달라졌다. 1983년 8월23일 열린 상고심 결심에서 재판부는 “자백이 유일한 증거인데, 장기 불법 구금이 인정되고 기록상 검사 취조 전 안기부 수사관들이 피고인들을 수시로 면접한 사실이 확인돼, 검찰 조서의 임의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 취지로 사건을 다시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법원조직법 제8조는 ‘상급심은 하급심을 기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희망을 품어도 좋은 걸까?

아니었다. 법원은 쉽게도 자기 존재 근거를 저버렸다. 무죄 취지 파기 환송심이었음에도 고법 재판부는 ‘일반 이적죄’ 부분을 뺀 공소 사실 모두를 유죄로 인정했다. 송씨는 징역 15년형에 처해졌다. 다시 상고했다. 1984년 4월24일 재상고심에서 다시 무죄 취지로 재항소심을 파기 환송했다. 그러나 고법은 또다시 법을 어겼다. 그해 8월21일 형량을 6년으로 줄인 채 다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사법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세 번째 상고심,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일곱 번째 재판이 열리게 된 게다.

고법 재재항소심이 한창이던 1984년 6월 말 김중서 판사가 정년 퇴임하면서 대법원에 공석이 생겼다. 두 차례 상고심에서 쓴잔을 마신 안기부가 공공연히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간첩 수사가 불가능하다”고 떠들어대던 때였다. 두 차례 대법 판례를 뒤집고 ‘과감히’ 유죄판결을 내려줄 대법원 판사가 절실했을 것이다. 안기부는 법원 안팎의 신망이 두터운 법원행정처 차장 박동우 판사 등에 대한 인신공격성 보고서를 올리는 한편,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대법 인사에 적극 개입했다. 그 결과 신임 대법원 판사로 지명된 것은 서울형사지법원장 김형기 판사였다.

안기부의 ‘공작’은 성공했을까?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 결과, 김 판사는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 직후인 그해 8월3일, 고법 재파기 환송심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안기부 간부에게서 송씨 일가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해 11월27일 김 판사가 주심을 맡아 진행된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재재상고심 결심공판은 이전 두 차례 대법 판례를 뒤집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법원 스스로 자기를 부정한 굴욕적인 날이다.

6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옥문을 나선 송씨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당장 거처도 없었다. 일곱 차례 재판을 하는 사이 적지 않던 재산은 모두 사라졌고, 부인과 슬하의 네 남매는 뿔뿔이 흩어진 채였다. 친구의 소개로 사건 전에 운영하던 경기 광주공장 근처 축사를 개조해 들어앉은 그는 숨죽인 채 흐느끼며 지난 세월을 버텨왔다. 송씨 사건을 조사한 국정원 과거사위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은 사건 관련자들 및 참고인들에 대한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한 허위 진술 강요와 증거 조작, 그리고 재판부에 대한 안기부의 유죄판결 유도 공작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들어진 반인권적 ‘간첩 조작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법원의 뻔뻔한 침묵

송씨는 다시 눈물을 훔쳤다. “재판정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안기부 조서, 검찰 조서만 가지고 말했다. 그렇게 애달프게 얘기했지만 사형이었다, 사형. 재판정에도 안기부 직원이 항상 와 앉아 있었으니, 그 사람들 전부 안기부 눈치만 봤던 게다.” 그는 “사법부가 판결로 내가 무고하다는 걸 보여줘야 가슴에 진 응어리가 풀릴 것”이라며, 다시 힘없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국정원 과거사위가 숱한 조작간첩의 억울한 사연을 담은 보고서 전문을 인터넷에 공개한 것은 10월24일 오전 10시다. 10월26일 오후 3시 현재까지 법원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침묵은 때로 뻔뻔하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