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에버랜드 증언 조작 의혹]그룹 차원에서 위증의 시나리오를 짰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과 정황증거들, 이건희 회장은 무관한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몸통’은 어디 가고 ‘깃털’만 나부끼는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 2심 판결 다음날인 지난 5월30일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법학)는 과 한 인터뷰에서 “‘주범’이 빠진 채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큰 정의’는 없는 게 아닌가 싶다”며 “이대로 끝나면 위선이고 코미디일 뿐”이라고 한탄했다.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인 허태학·박노빈씨가 1심에 이어 2심에서는 더 높은 형량을 선고받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불법·변칙 세습의 ‘몸통’인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소환조사 한 번 이뤄지지 않았다고 꼬집은 것이었다.
죄는 ‘엉뚱한 실무자들’이 뒤집어 써
10월2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의 기자회견 형식으로 불거진 ‘삼성 비자금’ 파문에 이어, ‘에버랜드 사건’ 재판 때 그룹 차원에서 저질러진 증언 조작 등 불법·변칙 행위의 꼬리가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삼성의 조직적인 비자금 조성 및 관리 사실을 공개한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이하 구조본) 법무팀장 재직 당시 에버랜드 사건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증언을 조작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고 사제단에 이미 고백했으며, 곧 기자회견 형식으로 이와 관련된 정황증거를 자세히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초긴장 상태에 빠져 있다.
에버랜드 사건의 증언 조작이 명백하게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이건희 회장에서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로 이어지는 삼성그룹의 경영권 세습 시도가 불법과 거짓 위에 서 있는 ‘모래성’임이 드러나는 것이서 커다란 사회적 파문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은 김 변호사의 고백 내용을 일부 확보했으며, 김 변호사 쪽의 요청에 따라 상세한 배경 설명과 정황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보도를 미뤄놓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몇몇 언론매체가 “(증인들의) 증언이 조작됐다”고 보도하고 사제단 주변에서 관련 증언이 조금씩 흘러나옴에 따라 확보한 내용 중 일부를 추려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으로만 보더라도 2심까지 이뤄진 에버랜드 사건의 판결은 ‘본질’을 전혀 건드리지 못했으며, 거짓 증언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앞으로 검찰과 법원이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볼 일이다.
삼성그룹의 경영권 불법·변칙 세습 논란과 직결돼 있는 에버랜드 사건에 관한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에서 눈길을 집중시킨 대목은 그룹 차원에서 ‘위증’의 시나리오를 짜고 이를 실행했다는 부분이다. “에버랜드 고소·고발이란 게 결국 이재용(삼성전자 전무)의 재산을 만드는 과정에 관련된 일이다. 시나리오를 짜서 증거를 조작하고 위조했다. 김인주 사장(2003년 당시 구조본 재무팀장 , 현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장)이 그걸 기획하고 이학수 부회장(2003년 당시 구조본 본부장, 현 전략기획실장)이 승인했다. 김인주 사장의 작품이다. 그 공으로 김 사장이 저렇게 (초고속 승진)된 것이다.”
김 변호사는 “증거를 조작하라고 시나리오를 짜온 대로 (자신이 팀장을 맡고 있던) 법무팀에서 (실행)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증언도 사제단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제단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증언의 일부다. “안한 일을 진술하게 해야 하니까, 교육을 시켜야 하잖나. 끊임없이…. 그 작업을 똑똑한 판·검사 출신들이 하는 거고, 그 총대장이 나지. 범죄가 될 수 있는 거다. 그건 내가 자수하고 처벌을 받아야 될 일이다. 내 지휘 하에 조직된 진술 많이 들어가 있다. 내가 관여한 건 맞고, 실무는 내 밑에 사람들이 하고, 시나리오는 저쪽(윗선)에서 왔고….”
결국 에버랜드 재판은 구조본의 각본에 따라 ‘엉뚱한 실무자들’이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는 얘기다. ‘조폭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충격적인 증언이다. 그의 증언대로라면 에버랜드 사건의 재판 1·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허태학·박노빈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은 그 ‘엉뚱한 실무자들’인 셈이다.
삼성그룹은 이에 대해 “그 당시(2003년) 김 변호사는 구조본 법무팀장으로서 본인 스스로 ‘에버랜드 사건은 무죄’라고 자신 있게 말한 바 있다”며 “(김 변호사의 증언 조작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와 에버랜드의 지배권 맞교환
김 변호사의 증언은 충격적이긴 해도 사실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은 이미 숱하게 제시돼 있었다. 이재용 전무가 삼성그룹 경영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되는 일과 직결돼 있는 에버랜드 CB(전환사채) 발행 과정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았다. 우선, 1996년 이재용씨 남매가 에버랜드 CB를 인수할 당시 에버랜드 CB의 주당 전환가격은 7700원이었다. 당시 세법상 평가액이 12만775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10만원을 훨씬 웃도는 회사 재산을 1만원도 안 되는 값에 그룹 총수 자녀들에게 넘긴 셈이다. 이는 삼성그룹의 경영권 세습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대목이며, 허태학·박노빈씨가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빌미가 되기도 했다.
에버랜드 CB 발행을 결정한 이사회를 둘러싼 의혹도 무성했다. 기록상 1996년 10월30일 연 것으로 돼 있는 에버랜드 이사회 회의는 정족수 미달이었다. 당시 이사회에는 17명의 이사 가운데 (과반에 못 미치는) 8명만 참석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에버랜드 사건 2심 재판부 또한 이를 근거로 당시 이사회는 무효라고 확인했다. 곽노현 교수는 지난 5월 과의 인터뷰에서 “따라서 여기에 입각해 이뤄진 모든 후속 조처(이건희 →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승계)도 무효라는 뜻이 된다”고 분석했다. 더욱이 당시 에버랜드 이사회는 열렸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아왔으며, 김용철 변호사는 실제로 “이사회는 열리지 않았다”고 사제단에 증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쪽에서 가장 긴장하고 있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이 최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그룹 차원의 공모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력한 정황증거는 의 지배권 변경과 연결돼 있다. 에버랜드의 최대주주인 가 에버랜드 CB 인수를 포기하기 나흘 전인 1996년 10월26일 의 최대주주인 이건희 회장은 CB 인수를 포기한다. 그 결과 지배권은 ‘이건희’에서 ‘홍석현’ 회장(이 회장 처남)으로 바뀌고, 에버랜드 지배권은 에서 이재용으로 이전됐다. 곽노현 교수는 계간지 35호(12월1일 발간 예정)에 실을 논문에서 “에버랜드는 자식에게 물려주고, 는 처남에게 물려주고 싶은 이건희 회장의 의중이 그대로 반영된 ‘지배권 맞교환’이라고 할 수 있다”며 “이러한 나흘 간격의 ‘쌍둥이 행동’은 이건희 회장의 승인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분석했다. 곽 교수는 또 논문에서 “이 회장을 위시해 에버랜드 이사 전원과 법인 주주의 대표이사 전원을 소환해 본격적으로 그룹 차원의 공모 여부를 조사해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1996년 10월 당시 에버랜드의 CB 발행이 사전 계획 없이 갑작스레 쫓기듯 추진됐다는 점도 유력한 공모 정황으로 거론돼왔다.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을 보면, 에버랜드는 월 단위, 분기 단위, 연 단위 자금조달 계획을 수립했는데, 문제의 CB 발행은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특히 ‘96.9.25.자 96년 10월 자금계획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10월 중순께 박노빈 당시 전무가 내린 “100억원의 자금을 긴급 조달하라”는 지시와 10월30일의 이사회는 느닷없는 것이었다. 당시 에버랜드의 신용등급은 최상급(A3)이었기 때문에 금융기관 차입이 아닌 CB 방식으로 긴급자금을 조달할 이유가 없었다는 게 2심 법원의 판단이었다. 회사 차원을 넘는 ‘윗선’의 개입과 지시가 있었다는 유력한 정황증거다.

에버랜드 CB에 얽혀 있는 ‘기묘한’ 정황들은 우연이었을까? 흥미롭게도 에버랜드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1996년 10월 초 CB 방식의 ‘실질적인’ 증여에도 세금을 매기는 내용의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이 입법 예고된 바 있다. 증여세를 내지 않고 지배지분을 넘겨주려면 서둘러 막차를 타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에버랜드 주식은 상속·증여세법상 평가액이 23만원을 웃돌아 적법하게 세금을 내고서는 지배지분 획득을 꿈꾸기 어려웠다. 삼성이 이재용씨 남매에게 CB를 헐값에 넘겨준 행위가 세법 개정을 앞두고 서둘러 이뤄졌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재용씨가 수조원의 가치로 추정되는 지금의 그룹 지배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납부한 세금이 16억원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삼성이라는 기업과 구분되는, ‘소수의 지배자들’이 불법·탈법·편법으로 기업의 이익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낳는 대목이다.
1996년 에버랜드 사건이 불거져 올해 5월 2심 판결까지 이어지는 11년 동안 사법 당국의 행태 또한 무성한 의혹을 낳았다. 에버랜드 CB를 둘러싼 의문이 일고 이에 대한 언론 보도가 있었음에도 검찰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2000년 6월 곽노현 교수를 비롯한 전국 법학교수 43명이 이건희 회장 등 에버랜드 경영진 33명을 형사고발한 뒤에도 검찰은 요지부동이었다. 검찰의 기소는 2003년 12월 들어서야 겨우 이뤄지고 그로부터 2년 뒤에 1심 유죄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그룹 차원의 공모와는 무관한 전문경영인 둘만 단죄 대상이었을 뿐 이 회장에 대해서는 소환조사 한 번 이뤄지지 않았다. 2심 판결 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김용철 변호사가 털어놓은 대로 삼성이 검찰, 나아가 법원까지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일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10월29일 기자회견 때 밝힌 성명서에서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씨로 이어지는) 부의 세습이 불법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고, 재판 과정에 제출된 진술들은 대부분 조작되었음에도 검찰과 재판부는 관계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있다”며 “검찰과 법원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히 처리할 것”을 촉구했다. 사제단은 또 “계열사 회계분식, 명의신탁을 이용한 계열 분리, 이 회장 가족들의 회사 자금 유용 등 삼성이 저지른 불법 행위는 헤아릴 수 없다”고 밝혀 추가적인 폭로를 예고하고 있다. ‘삼성 비자금 사태’는 불법·변칙적인 경영권 세습 문제로 이어면서 점점 폭발력을 키워가고 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최상목, 2억 상당 ‘미 국채’ 매수…야당 “환율방어 사령관이 제정신이냐”
“일 못하는 헌법재판관들”…윤석열 파면 촉구 시민들 배신감 토로
산 정상에 기름을 통째로…경찰, 화성 태행산 용의자 추적
[단독] ‘내란’ 김용현, 군인연금 월 540만원 받고 있다
한국도 못 만든 첫 조기경보기 공개한 북한…제 구실은 할까
냉장고-벽 사이에 82세 어르신 주검…“얼마나 뜨거우셨으면”
‘성폭행 피소’ 장제원 전 의원, 고소장 접수 두 달 만에 경찰 출석
[단독] 우원식 “한덕수 ‘마은혁 미임명’은 위헌”…헌재에 권한쟁의 청구
경북 산불 다 껐다…7일 만에 서울 75% 면적 초토화
[속보] 미얀마 7.7 강진에 타이 30층 건물 붕괴…비상사태 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