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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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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차명계좌 미스터리

등록 2007-11-09 00:00 수정 2020-05-03 04:25

삼성은 왜 굳이 퇴직 변호사의 명의를 도용했을까, 우리은행이 비자금 관리에 개입했을까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 비자금 관련 문건 중에서 ‘이자소득명세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삼성 비자금의 윤곽을 추정해볼 만한 몇 가지 단서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김 변호사가 증거로 제시한 이자소득명세서는 2004·2005·2006년 3년치 자료인데, 이자 및 배당 소득을 합친 부부합산 금융소득이 연간 4천만원 이상일 때 국세청에 신고해야 하는 ‘금융소득종합과세’ 자료이다. 본인이 직접 작성해 신고해야 한다. 문제의 이자소득명세서 세 장은 금융소득종합과세 확정신고 기간인 매년 5월 말께 김 변호사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세무사와 삼성 쪽이 함께 작성해 국세청에 제출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각 금융기관은 본인의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제출하면 제3자에게도 이자소득액 현황을 제공하고 있다.

해마다 계좌가 사라지고 등장하고

2004년 이자소득명세서부터 보자. 2004년 명세서에는 김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 계좌라고 지목한 문제의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 계좌가 등장하는데, 이 계좌에서 연간 822만원의 이자소득이 발생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명세서에는 또 다른 삼성 비자금 계좌로 의심을 받아온 ‘굿모닝신한증권 도곡지점’ 주식계좌(삼성전자 6071주 보유)도 명시돼 있는데, 이 계좌에서 연간 이자소득 600만원이 발생(주식계좌 현금예수금의 경우 연 1% 정도 이자가 붙음·혹은 보유한 채권 이자일 가능성도 있음)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밖에 국민은행 계좌 4개가 등장하는데 둘은 김 변호사의 자택이 있던 서울 송파구 지점 계좌이고, 나머지 둘은 국민은행 태평로2가점과 국민은행 서소문지점이다. 삼성본관 바로 근처에 있는 지점들이다. 연간 발생한 이자소득액은 태평로2가점 계좌는 202만원, 서소문지점 계좌는 40만원이었다. 2004년 명세서에는 하나은행삼성(본관)센터 계좌도 들어 있다.

2004·2005년 이자소득명세서는 연간 이자소득액이 단돈 99원에 불과한 예금계좌까지 빠짐없이 신고하고 있다. 누락신고하면 나중에 가산세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5년 이자소득명세서에는 국민은행 태평로2가점과 서소문지점 계좌가 빠져 있다. 굿모닝신한증권 계좌도 사라지고 없다. 흥미로운 건 2005년 명세서에 삼성증권 지점이 새로 들어가 있는데, 이 삼성증권 점포는 삼성증권 본점이 있는 종로타워 2층의 본점 영업부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 변호사 이름의 삼성증권 계좌가 삼성증권 지점이 아니라 본점 영업부에 개설돼 있었던 것이다. 이 주식계좌도 삼성 비자금과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삼성증권 계좌에서는 이자소득이 87만원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문제의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 계좌에서 2005년에 발생한 이자소득액만 무려 9천만원이다.

2006년 명세서에는 국민·하나은행, 삼성증권 등의 계좌가 모두 빠지고 우리은행 점포 계좌 세 곳만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연간 이자만 1억8천만원이 발생한 문제의 계좌인데, 이 계좌는 2004년부터 이자소득명세서에 계속 등장하는 동일 계좌다. 총 이자소득액을 보면 2004년에는 2310만원이었다. 금융소득이 4천만원 이상이어야 국세청에 금융소득종합과세 신고를 하는 것이므로 이해에 이자소득 외에 주식배당소득이 2천만원 이상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04년 당시 굿모닝신한증권 계좌의 삼성전자 보유 주식에서 상당한 금액의 배당소득이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계좌의 ‘돈 주인’에 대한 삼성 쪽의 해명을 들어보자. 삼성 쪽은 “차명계좌는 맞지만, 그룹 재무팀 임원이 제3자의 돈을 굴린 재테크 목적의 주식투자다”라고 말한다. 또 “우리은행 계좌와 굿모닝증권 계좌는 한 덩어리로 엮여 있던 계좌”라며 삼성그룹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자소득명세서를 보면 해마다 기존 은행 예금 계좌와 증권 계좌들이 사라지고 또 새로운 계좌가 등장하는 등 ‘은닉’ 흔적이 되풀이되고 있다. 단순히 개인 재테크 목적의 거래라면 왜 이런 일이 반복된 것일까?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문제의 우리은행 계좌 이외에 국민은행 태평로2가점이나 하나은행 삼성센터지점, 삼성증권 본점 영업점 계좌 등도 비자금 조성 목적의 차명계좌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의혹의 계좌들이 삼성 비자금으로 확인될 경우 이 비자금의 출처도 관심사다. 만약 삼성 계열사의 (세후) 순이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매출액과 비용 조작 등 분식회계를 통해 조성한 것이라면 탈세가 된다. 이럴 경우 국세청이 당장 조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주식 6071주의 용도는?

의혹이 쏠린 삼성전자 주식 6071주의 성격과 관련해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선웅 변호사는 “삼성전자의 경영권 방어 지분 차원에서 삼성이 임직원들 명의로 삼성전자 주식을 수십억원어치씩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 한 부분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주식시장에서 공개 매입하는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기 때문에 임직원의 차명계좌를 동원해 삼성 계열사에서 조성한 비자금을 삼성전자 주식으로 넣어놓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삼성그룹의 상무(보)급 이상 현직 임원만 해도 수천 명에 이르는데 왜 삼성 쪽은 굳이 퇴직한 김 변호사의 명의를 도용까지 해가면서 비자금을 은닉한 것일까? 게다가 소득이 많기로 소문난 변호사 직업은 세무조사 대상 1순위 아닌가? 이에 대해 참여연대 김경률 회계사는 “김 변호사는 개업 독립 변호사가 아닌 법무법인 소속이라서 개인예금 통장은 세무조사 대상에서 빠질 가능성도 있다”며 “또 변호사 소득은 원천징수가 아니라 사후 징수라서 자신이 낸 세금이 얼마인지조차 잘 모르는 변호사도 많아 이 점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차명계좌 미스터리와 관련해 삼성이 한수 위의 고공플레이를 펼쳤을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아무리 ‘시크릿뱅킹 계좌’(반드시 본인이 계좌를 개설한 해당 점포에 직접 찾아가야 등록·조회·해지·출금할 수 있는 보안계좌)라 해도 수십억원이 들어있는 계좌는 국세청에 잡히게 마련이다. 실제로 이자만 무려 1억8천만원이 발생한 계좌가 이자소득명세서에 그대로 기록돼 국세청에 제출됐는데, 삼성이 비밀자금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자금인 것처럼 꾸며 아무도 의심하지 않게 만든 것일까?

이번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지난 10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폭로했던 두산그룹의 비자금 사건을 살펴보자. 두산 총수 일가는 지난 30여 년간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임직원 이름의 차명계좌에 계열사 주식으로 넣어둔 뒤, 증권사 직원한테 맡겨 관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노회찬 의원 쪽은 “두산 비자금의 경우 퇴직한 임직원이 나중에 자기 돈이라고 우기는 일도 생기는 등 차명계좌 비자금 관리는 머리 터지는 일이다. 조성한 비자금을 언제든 마음대로 넣고 빼 사용하려고 할 경우 차라리 남몰래 도용한 계좌를 쓰는 것이 관리 측면에서 더 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오래전부터 삼성의 주거래은행

이번 양심 고백과 관련해 검찰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관심은 우리은행 쪽에 집중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 최한수 연구팀장은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 조성은 흔히 있는 일이고 검찰이 쉽게 나서기 어렵다면, 우리은행 계좌 쪽부터 금융실명제법 위반 등을 걸어 삼성과의 공모 여부를 파고들면서 진실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 명의의 시크릿뱅킹 계좌가 개설되는 건 규정상 불가능하다. 또 명의가 도용됐다면 우리은행 쪽과 어떤 결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은 삼성과 우리은행의 ‘긴밀한 관계’다. 우리은행은 오래전부터 삼성의 주거래은행이다. 특히 2004년 3월 삼성그룹 전 비서실 재무팀 이사이자 삼성증권 사장 출신인 황영기씨가 우리은행장을 맡은 데 이어 올 3월에는 박해춘 전 삼성화재해상보험 전무가 우리은행장을 이어받았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지만, 김 변호사가 폭로한 우리은행 계좌에 들어 있는 돈 거래는 모두 황 전 행장과 박 행장 재임 기간에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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