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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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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판결을 재판하자

등록 2007-11-02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판결로 반성한다’는 소극적 태도 넘어 ‘재심사건 특별재판부’ 구성 등 적극적 해법 내놔야</font>

▣ 송호창 민변 사무차장·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과거 중앙정보부·안기부 시절의 위법하고 부당한 공작 내용을 국정원 과거사위가 조사한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하지만 이번 발표 내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1982년의 ‘송씨 일가 사건’을 둘러싼 안기부와 사법부의 합동공작에 대해서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조차 없을 정도다. 단일 사건에서 대법원 판결 3번을 포함해 총 7심에 이르는 재판을 한 이 사건 재판 과정에서 당시 대법원장이 안기부에 보낸 대책이 국정원 내부 존안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다음에는 유죄를 선고할 예정이니…”

대법원이 첫 번째(3심) 무죄 파기환송한 이유는 피고인들의 자백이 불법 감금 등으로 인한 것이어서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5심) 대법원이 무죄 파기환송을 하면서 붙인 이유에서 음흉한 공작이 드러난다. “불법 감금 등이 인정되더라도 이로 인해 자백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검찰의 입증이 없어서 무죄”라는 것이다. 안기부와 검찰은 6심에서 이 점을 보완해 유죄판결을 하도록 했고, 결국 대법원은 7심에서 유죄를 확정했다. 여기까지는 일반에 공개된 판결문의 내용이다.

그런데 당시 대법원장은 첫 번째(3심) 대법원 무죄판결 이후에 ‘본건 대책으로 담당 수사관, 검사 등을 증인으로 신청, 이를 담당 재판부가 받아들이게 해 재상고하면 사건을 특별배당 기각판결토록 함’이라는 대책을 안기부에 전했다. 두 번째(5심)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선고할 때는 ‘(첫 번째 대법원 무죄판결을 한) 이일규 대법관의 체면 유지 등 대내 사정에 의하여 대법원장의 사전 양해하에 정책적으로 파기한 것이므로, 다음 상고심에서는 유죄를 선고할 예정이니 관계기관의 큰 오해 없기를 바람’이라는 대책을 다시 안기부로 보냈다. 그리고 실제 판결은 이 대책대로 유죄로 결론이 내려졌다.

대법원장이 안기부에 보낸 대책 내용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법원의 행태는 법치주의, 재판상의 모든 원칙, 피고인의 권리 등 법학 교과서의 대원칙을 공염불로 만드는 것이었다. 명백한 범죄행위다. 얼굴이 화끈대다 못해 따끔거린다. 소름이 피부 위뿐만 아니라 핏줄 속까지 돋아나는 듯 쓰라리고 시리다. 의식하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피해자들은 법원과 안기부의 음흉한 거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 그래도 법원만은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짐승보다 못한 가혹한 고문을 당해서 허위 자백을 했다고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얘기만 나오면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는, 이제는 할머니·할아버지가 된 그 사람들의 흐트러지는 어깨의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온다. 안기부와 법원 판사들의 비열한 뒷거래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당시에도 횡행했고, 숱한 의혹도 커져갔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 있던 ‘최후의 보루인 법원인데 설마…’ 하는 실오라기 같은 기대와 ‘제발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하는 털끝만큼의 바람이 무참히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화기를 들고 피해자의 한 사람인 송기복 선생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쾌활하게 응대를 하고 있었다. 법조계의 일원이란 이유만으로 죄의식에 휩싸였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입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가 발표됐고, 이제부터 재심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밝히게 될 것이란 사무적인 말만 나왔다.

무죄판결 법관의 부인까지 미행

물론 사법부도 안기부 앞에서는 피해자다. 이 사건 재판만 봐도 첫 번째 대법원 무죄판결을 선고한 이일규 대법관은 안기부의 압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본인은 물론 부인과 가족까지 미행을 당하고, 비리나 부정을 밝혀 꼬투리를 잡을 목적으로 일가친척의 행적까지 낱낱이 파헤쳐졌다. 심지어는 집안까지 다 뒤졌다고 한다. 안기부는 이 사건을 유죄로 만들기 위해 담당 재판부를 찾아가 사건 내용을 설명하고, 판사 집에까지 가서 유죄판결을 하지 않으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안기부는 또 공판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하면서 법원과 재판 과정을 ‘조정’했다. 무죄판결이 나오면 담당 판사에게 그 경위를 소명하라고 요구했다. 안기부는 신원조회를 통해 모든 법관의 인사파일을 갖고 있고, 이를 토대로 법관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제나 의심 가득한 싸늘한 눈을 흘기며, 보이는 곳이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압력을 행사하는 안기부 수사관들 앞에서 심약한 판사들이 굴복하게 되는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헌법과 법률에 따라 양심껏 판결을 해야 하는 게 법관의 헌법상 의무다. 조작된 판결로 인해 직접 피해를 받게 되는 당사자의 처지만 생각하더라도, 판사의 굴복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부당한 권력 앞에서 소신을 지킬 수 없다면 남을 판단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다.

다른 한편 이 사건의 판결에선 안기부의 영향력이 전혀 없는데도 위법한 판결을 한 것이 나타난다. 1, 2심 판결문은 공소장의 오자까지도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위법한 수사를 증명하는 고문과 불법 감금 사실은 명백한 반면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할 뚜렷한 증거는 자백 이외엔 없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한 법원의 일반적인 경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건과 피고인의 신분에 상관없이 법의 평등한 적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법원은 국가보안법 사건만은 헌법과 법률의 기본원칙을 외면했다.

안기부가 위력적인 전횡으로 사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안기부를 통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한 법원의 ‘특별취급’ 문제는 법원 내부의 의식 전환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법관들도 ‘레드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까. 그러나 콤플렉스보단 당연히 법과 양심이 우선하고, 법관들은 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법관은 부당한 권력뿐 아니라 평등한 법 적용을 가로막는 레드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 법원은 다른 시각을 가진 듯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하면서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고 이를 청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또 이를 재심 재판의 판결문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되는 당해 사건 재판에 대한 재심 재판을 통한 대책일 뿐이다. 법적 절차와는 전혀 상관없이 안기부와의 뒷거래를 통해 재판에 영향을 미친 행위는 재판 행위가 아니다. 이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재심 재판만으로 충족될 수 없다. 아무리 과거 법원 구성원의 과오라지만 법원이 공식적으로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놓아야 한다.

안기부에 재판대책을 내놓았듯이

그런 차원에서 재심 재판을 일반적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당사자의 의지와 능력에 내맡겨선 안 된다. ‘재심 신청을 하면 판결로 반성한다’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서야 한다. ‘재심사건 특별재판부’를 구성하는 등 일괄적이고 적극적인 해법을 내놔야 한다. 법원의 소극적 태도는 과거의 잘못된 유죄판결로 이미 불구의 몸이 된 사람더러 높은 계단을 열심히 뛰어 올라오면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몰염치한 처신이다. 법원은 조직과 역할의 특성상 재판 기능 이외의 적극적인 방안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과거 법원의 부끄러운 행태를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좀더 전향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안기부에 재판 대책을 그토록 자상하게 내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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