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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초강수, 우라늄 탈출구인가

등록 2005-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플루토늄 문제 부각시킨 ‘핵무기 보유 선언’… 리비아식 해법 따른 핵사찰 피하려 북-미 직접 대화 시도

▣ 이유/ <연합뉴스> 통일외교부 기자

6자회담 참가 무기한 중단과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성명’을 담은 <조선중앙통신> 보도가 입전된 것은 2월10일 오후 3시3분이었다. 그 시점은 절묘했다. 이날은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이어서 정부 당국자들은 대부분 긴장을 푼 채 마음을 놓고 있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6자회담 참가국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형국이다.

반기문 장관의 방미, 절묘한 타이밍

그 시점은 2월2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새해 국정연설을 계기로 6자회담이 조기에 재기될 것으로 조심스럽게 기대되던 와중이기도 했다. 또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부시 2기 정부의 외교안보팀 핵심인사들과 북핵 해법을 조율하고자 서울을 떠난 지 5시간이 좀 지났을 때였고,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평양 방문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평양 당국은 하필이면 6자회담 조기 재개가 점쳐지던 시점에서 강수를 두고 나선 것일까? 더욱이 부시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이란과 시리아에 단호한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북한에는 자극적 발언을 최대한 자제한 상황이어서 궁금증은 더하다.

북한은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대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6자회담 참가국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을 두고보라는 듯이 그 의미를 평가절하했다. 북한 외무성은 “우리는 2기 부시 정권의 정책정립 과정을 인내성을 가지고 예리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2기 부시 행정부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끝내 외면하고 대통령 취임연설과 연두교서(국정연설), 국무장관의 국회 인준 청문회 발언 등을 통해 우리와는 절대 공존하지 않겠다는 것을 정책화하였다”고 주장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부시 정부는 ‘6자회담을 통한 외교적 해결’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북한은 미국이 바뀐 게 없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이 반 장관의 방미 출국 직후에 맞춰 ‘폭탄선언’을 한 것은 한-미 양국이 문제의 심각성을 바로 보고 그에 걸맞은 방안을 마련할 것을 압박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관측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6자회담이 지난해 6월 3차 본회담 이후 8개월 가까이 열리지 못한 데 이어, 또다시 장기간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진 데는 북-미 양국간의 상호 불신과 함께, 북핵 해법을 둘러싼 양국의 날카로운 전략전술 대립이 저변에 자리잡고 있다.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사견을 전제로 “북한은 회담 분위기가 성숙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 같다. 한번 더 미국의 의도를 타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6자회담시 원하는 결론을 얻고자 협상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평양 정부가 ‘6자회담 구도의 와해’라는, 리스크가 대단히 큰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부시 2기 행정부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은 고농축우라늄에만 집착마라?

그것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북한이 극구 부인하고 있는 고농축우라늄(HEU)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북-미간 직접 대화와 협상이다. 하나는 본질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나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음은 물론이다.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문제에 대한 부시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지난 2002년 10월 제2차 북핵 위기가 거기에서 촉발됐으니 6자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정일 정권은 북한에 고농축우라늄은 없는 만큼 앞으로 6자회담에서는 플루토늄 문제만 다뤄야 한다는 자세를 보여왔다.

이런 맥락에서 외무성 성명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플루토늄 문제가 이 정도로 심각한 단계에 있으니 미국은 고농축우라늄에만 집착하지 말고 플루토늄 문제를 놓고 협상에 진지하게 나서라는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플루토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훗날의 문제’로 돌리도록 부시 정부를 압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북 외무성 성명의 의도와 관련해 “플루토늄보다는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게, 또 핵무기를 많이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 미국이 빨리 협상을 타결해야겠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평양 당국은 그동안 고농축우라늄 문제, 특히 부시 정부의 ‘리비아식 해법’에 알레르기를 보여왔다. 리비아식 해법은 고농축우라늄을 포함해 모든 핵 시설, 물질, 프로그램을 자진신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추가의정서에 가입해, ‘언제 어디든 의심나는’ 시설을 사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나, 이 방식을 북한은 군사공격에 대비해 북한 내 군사시설을 합법적으로 정탐하려는 술책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시 정부의 입장은 다르다. 미국은 ‘잘못된 행위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원칙 아래 플루토늄 부분은 북한이 원상회복시킬 일이지, 미국이 협상해서 보상할 부분은 아니라는 태도가 확고하다.

또 하나는 북한이 미국과 직접 대화를 요구하는 부분이다. 한성렬 주유엔 북한대표부 차석대사가 10일 <한겨레>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미국이 우리와 직접 대화를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변화 신호로 볼 수 있다”고 말한 데서도 평양 당국의 요구가 드러나고 있다.

북한이 북-미 직접 대화에 집착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현 국면에서는 두 가지 노림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미국이 직접 당사자가 돼야 대북 체제 보장을 믿을 수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북-미 직접 담판을 통해서만이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고농축우라늄 문제의 타결이 가능하다는 계산인 듯하다.

지난해 6월 3차 회담에서 제기된 6자회담 참가국의 대북 에너지 지원과 관련해 북한이 초기 단계부터 미국의 참여를 강력히 요구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또 북한이 ‘자백’하지 않는 이상 찾아내기 힘든 고농축우라늄 문제의 성격상 그 핵심은 ‘사찰을 통한 검증’이 될 수밖에 없는 만큼, ‘언제 어디든 의심나는 시설’을 국제원자력기구가 사찰하도록 하는 리비아식 해법은 북한의 처지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사찰을 수용하더라도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때 북한으로서는 사찰만 당하고 그 대가는 얻지 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을 우려하는 듯하다.

이와 관련해 셀리그 해리슨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과 도널드 그레그,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 대사 등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26명으로 구성된 ‘한반도 정책 태스크포스’는 지난해 12월10일 정책제안서를 내고 “명백히 현존하는 플루토늄 문제를 우선 북한과 협상하고, 단계별 상호 양보를 통해 신뢰가 쌓인 뒤인 맨 마지막 단계에서 우라늄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협상이냐, 충돌이냐… 부시 행정부의 선택

하지만 현 단계에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플루토늄 부분’만을 놓고 그것도 북한과 ‘직접’ 협상한다는 것은 파탄이 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는데다, 부시 행정부가 고농축우라늄 문제로 인한 2차 북핵 위기를 다루는 데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점에서다.

다만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난해 9∼10월 상황과 달리, 부시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함으로써 국내 정치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어진 점이 부시 2기 정부가 좀더 전향적 입장을 선택할 여지를 남겨놓고 있을 뿐이다.

공은 이제 부시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의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어느 선까지 상황 진전을 ‘묵인’할 것인지, 또 대북 협상이냐 충돌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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