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에서 비핵화에 다가선 북·미, 미·중·러 영변 방문으로 ‘북핵 문제 해결’ 이루나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북핵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발빠르게 넘어가면서 ‘장밋빛 미래’를 예감하게 하는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폐쇄·봉인 작업으로 북핵 해결을 위한 이른바 ‘초기 단계’는 넘어섰다. 6자회담 참가국 중 핵 보유국인 미국·중국·러시아 핵 전문가들이 9월11~15일 영변 현지를 방문해 다음 단계인 ‘불능화’에 필요한 기술적 협의를 한다. 바야흐로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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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임기 안에 북핵 문제를 끝낼 수 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8월31일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불과 일주일 뒤인 9월7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끝자락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만나 ‘한국전 종료 및 평화협정 체결’ 의지를 재확인했다. 지난해 11월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노 대통령을 만나 ‘한반도 종전 선언’ 추진 의지를 밝힌 뒤 일관된 자세다. 물론 전제는 명확하다. 북핵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폐쇄·봉인한 핵시설, 다음 단계는 불능화
이른바 ‘북핵 문제 해결’은 뭘 의미할까?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은 이를 “북한이 기존의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현재 북한이 보유한 핵시설은 △연료변환 시설 △5MW 실험용 원자로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 시설) △건설 중단된 50·200MW 원자로 △IRT 2000 연구용 원자로 등 크게 5가지다. 하지만 영변 핵시설 외부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미지의 핵시설’도 빼놓을 수 없다. 핵 전문가들은 △핵무기화 설비 △핵무기 부품 생산 및 조립 시설 △핵탄두와 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미사일 등 운반 수단, 그리고 북한은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 등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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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포기’의 첫 단추는 이미 꿰어졌다. 지난 8월1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폐쇄·봉인 작업을 마치고 감시 장비까지 설치해둔 상태다. ‘2·13 베이징 합의’에서 내놓은 초기 단계 이행 조치는 사실상 마감된 셈이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최소한 북한이 국제사회의 눈을 피해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핵물질의 이전’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게다. 이제 비핵화로 가는 다음 단계는 불능화다. 그럼 다음 단계인 불능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핵 전문가들은 “불능화는 한마디로 폐쇄·봉인한 핵시설의 재가동을 이전보다 훨씬 어렵게 만드는 과정”이라며 “이를 위해 기술적으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원자로의 핵심 부품을 제거하는 등의 방식이 활용될 수 있다. 한 핵 전문가는 “불능화는 상대적으로 빨리 할 수 있으며, 기술적으로는 올해 안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불능화에 걸리는 시간은 결국 북한을 뺀 나머지 5자에 달려 있으며, 북한을 설득할 수 있다면 속도는 얼마든지 빨리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6자회담→남북 정상회담 논의 탄력
불능화 과정의 속도와 안정성을 높이고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기술적으로 올바른 순서를 정해 단계별로 이뤄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를테면 연료변환 시설은 불능화하기 가장 쉬운 대상이다. 하지만 방사화학실험실에는 아직도 재처리를 하지 않은 폐 연료봉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재처리해낸 뒤 불능화를 할 것인지, 아니면 고스란히 제3국으로 옮길 것인지 등의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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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북한은 “미국은 리비아와 3년이 넘도록 대화를 해 비핵화를 이끌어냈으면서 왜 우리하고는 대화를 피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6자회담이란 틀’ 안에서 ‘양자회담’은 이미 여러 차례 밀도 있게 진행됐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 개발 이유를 ‘에너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핵 프로그램의 포기 대가로 국제사회는 에너지를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대북 에너지 공급에 의존할 수는 없다. 북이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줘야 한다.
여기서 ‘경수로’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지난해 9·19 공동선언에서도 ‘적절한 시점에 논의한다’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북한은 경수로를 북-미 관계 정상화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대화 의지가 있느냐 여부를 경수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게다. 한 대북 전문가는 “경수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동안엔 제공이 불가능하다”며 “북이 경수로 제공을 원하는 것은 다른 한편 핵무기를 모두 폐기하겠다는 강력한 신호”라고 해석했다.
물론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불능화가 북핵 문제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다시는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돼야 대북 지원과 관계 정상화, 평화체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허상일 수 있다. 한 핵무기 전문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말을 달리 표현하면, 언제든 그 상황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핵개발이 중단된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를테면 원자로의 노심을 제거하거나 원료 장착 장치 같은 것을 제거해놓더라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바로 그 지점에서 핵개발을 재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완벽한 불능화’란 있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6자회담에서 이 난제를 풀고 예상대로 비핵화 로드맵이 마련된다면, 다음달엔 남북 정상회담을 거쳐 6자 외무장관 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 종전 선언과 평화체제 관련 논의는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양자회담-6자회담 방식 매끄럽게 적용
지금으로선 전망이 밝다. 북-미가 양자대화로 협상의 물꼬를 튼 뒤, 6자회담을 열어 다자가 이를 보장·추인하는 방식은 이번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9월 중순으로 다가온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를 앞두고, 지난 9월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북과 미는 비핵화로 성큼 다가설 듯한 발언을 주고받았다.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는 “북핵 불능화 작업을 올 연말까지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김계관 북한 쪽 수석대표는 “모든 핵시설을 불능화할 의지가 있다”고 화답했다.
지난 8월 북한을 방문한 세계적 핵 전문가 지그 헤커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9월6일 연세대에서 열린 동아시아포럼 초청 강연회에서 “원자력기구 요원들이 폐쇄·봉인한 영변 핵시설을 확인했으며, 북한은 모든 핵시설을 제한 없이 투명하게 공개했다”며 “북한이 국제사회의 눈을 피해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하기는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방북 당시 김계관 부상은 ‘북-미 양자대화가 잘되고 있다’며 ‘6자회담 틀 내에서 상황이 잘 풀려가고 있고, 북-미 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의도 매끄럽게 진행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북으로선 ‘준비’를 마친 듯싶다. 결국 불능화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느냐는 문제는 나머지 5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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