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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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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에서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

등록 2007-07-13 00:00 수정 2020-05-03 04:25

소유주가 7월 말로 매매 시한 앞당긴 우토로 르포… “일본 정부 움직이도록 한국 정부가 압박해주었으면…”

▣ 우토로=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차라리 ‘민족’을 말하지 말자. 그저 ‘옮고 그름’에 대해서만 따져보자. 거창한 구호나 오랜 울분 따위를 토해낼 게 아니라, 정당한 의무와 권리만 얘기해도 좋겠다. 일본 교토부 우지시 이세다초 우토로 51번지, 재일조선인 마을 우토로에 닥친 위기를 푸는 데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들은 땅을 살 돈을 구걸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단 한 번만이라도 ‘조국’이 자신들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랄 뿐이다. 일제가 패망한 지 62년이 됐음에도 여전히 맞이하지 못한 ‘해방’의 감격을 이제는 그들도 맛보고 싶은 게다.

“매매 의사 밝힌 제3자 있다”

우토로가 다시 벼랑 끝에 섰다. 철석같이 지원을 약속했던 한국 정부가 망설이며 뒷걸음을 치는 사이, 애초 올해 말까지 토지매매 문제를 매듭짓자던 우토로 땅 소유자 서일본식산(대표 오하타 고이치)이 7월 말로 시한을 앞당긴 탓이다. 주민들이 갹출할 수 있는 돈과 우토로국제회의를 중심으로 한 민간 모금액을 합하면 2억5천만엔. 서일본식산이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땅값과의 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주민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땅 값 7억엔에서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서일본식산은 “7월 말까지 토지매매 문제에 가시적 성과가 없는 경우, 제3자에게 우토로 땅을 넘길 수밖에 없다”며 “이미 우토로 땅 매입 의사를 밝힌 ‘제3자’가 있다”고 공언했다. 제3자가 우토로 땅을 산다는 것은 재개발을 위한 강제철거를 뜻한다. 오하타 고이치(41) 서일본식산 대표는 “강제철거를 피하기 위해 우지시와도, 한국 정부와도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여유를 부렸지만, 주민들은 “20년 동안 우토로 지키기 싸움을 해왔지만, 지금처럼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파국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게다.

우토로를 걸었다. 7월2일부터 나흘간 걷고 또 걸었다. 마을 북쪽 경계인 이세다 8호 수로에서 발걸음을 시작했다. 엄명부 주민회 부회장이 운영하는 ‘이세다 건설’에서 출발해 마을의 상징이 돼버린 각종 구호판이 즐비한 빈집까지 98걸음이다. 거기에서 김교일 주민회장 집까지가 128걸음, 마을 북서쪽 끝자락인 ‘복지회관길’까지가 다시 31걸음이다.

마을 남쪽 경계인 서우지 도시 하수로를 향해 몸을 틀면, 108걸음 만에 마을 남서쪽 끝에 설 수 있다. 가로 100m 남짓, 세로 300m 남짓이라는 6400평 우토로 마을을 다 도는 데 채 15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작은 땅 덩어리에 빼곡히 65세대 200여 주민이 세대를 거슬러 살아가고 있었다. 우토로에서 태어난 이들이 손자를 보기까지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마을 남동쪽 끝, 육상자위대 오쿠보 기지와 만나는 철조망에서 마을 쪽으로 80여 걸음을 내려오면 석옥서(77)씨를 만날 수 있다. 오래된 목조주택 앞에는 지난해 12월17일 숨진 석씨의 남편 고 최중규(당시 91살)씨 이름이 문패로 남아 있다. 장마철의 습기가 땡볕을 만나 만들어낸 축축한 열기로 비좁은 방 안은 숨이 막혔다.

“이거, 뭘 대접해야 하노….” 커피를 끓여 내겠다는 걸 말렸더니, 석씨가 금세 큼직한 자몽 두 개를 내온다. 이웃들도 얼음을 가져온다, 냉차를 내놓는다, 분주하다. 석씨는 “아이고 마, 할 말도 ?졍蔑구庸? “시원하이 드소” “와줘서 고맙소”란 말을 반복하며 웃었다. 경북 경산이 고향인 그이는 “규슈와 나고야 등지를 거쳐 우토로에 정착한 지 40년이 넘었다”고 했다. 양철 ‘함바집’에서 살다가 하나둘 집을 짓고 방을 늘린 세월이다.

“남편은 죽기 전에 2주일가량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운명을 미리 알았는지 죽기 사나흘 전에 한국에 가겠다고 막무가내였다. 의사가 의료진을 대동하고 가야 한다기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예 세상을 떴다. 뼛가루만 고향 대구로 보냈다.” 부채질을 하는 석씨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남편 보고 싶으면 사진을 보면 되고, 암만 없이 살아도 이웃이 좋다”며 “혼자 살수록 여기 살아야지, 뚝 떨어져서 나만 살면 아마 벌써 미쳐 나갔을 것”이란다. 애써 웃는 그의 얼굴이 쓸쓸하다.

‘무서운 마을’ 소문이 난 이유

석씨 집에서 2시 방향으로 50걸음 남짓 떨어진 김영태(74)·강종영(70)씨 집으로 들어서자, 벽에 붙어 있던 ‘욘사마’가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부인 강씨가 탤런트 배용준의 ‘광팬’이란다. 때 묻은 철제 선반엔 드라마 비디오테이프가 가득했다. 심심풀이 경륜 방송에 몰입해 있던 김씨는 우토로 대책 얘기를 꺼내자마자 목소리부터 높였다.

“내가 우토로에서 48년째 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꼭 지금 모습으로 살다 가고 싶다는 게다. 우토로 주민회가 대책회의만 20년째 해왔다. 한국 정부가 직접 지원을 해주는 것도 괜찮지만, 먼저 일본 정부가 움직이도록 한국 정부가 강력하게 압박을 해줬으면 더욱 좋겠다. 제발 부탁 좀 하자.”

22살 때 18살인 강씨를 만나 결혼한 뒤 4년여 만에 처갓집이 있던 우토로로 이사를 왔다는 그는 “당시에도 우토로는 무서운 마을이란 소문이 나 있었다”고 말했다. 재일조선인끼리 살면서 일본인들의 차별에 ‘무섭게’ 맞서던 때였다. 그는 “우리 동포들이 차별 없이 살 수 있었기에 우토로는 특별하다”며 “특별한 땅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닌지, 그래서 더 화가 난다”고 말했다.

금속을 깎아 납품용 플라스틱 주물 용기를 제작하는 서광수(59)씨가 작업장 겸 사무실로 사용하는 마을 한가운데의 ‘동아정기’에선 매캐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교토 시내에서 태어나자마자 우토로로 이사를 왔다는 그의 한평생 노동이 예닐곱 평 남짓한 공간에 오롯이 채워져 있다.

“조선 사람이니 당연히 민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학비가 없어 일본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 애들이 ‘마늘 냄새 나는 조센징’이라고 많이 놀렸다. 조금 커서는 놀리는 애들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싸움 참 많이 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론 싸움을 워낙 잘하니까 오히려 우토로 사는 거 알면 일본 아이들이 피해 다녔다.”

변변한 상·하수도도 없이 개발에서 철저히 소외됐지만, 일본인 동네로 이사를 간다는 건 상상도 한 일이 없단다. 토지 소유권 재판에 패소한 뒤 한동안 마음이 복잡했지만, 내가 돈 조금 있다고 혼자만 나가 살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고 나니 홀가분해졌단다. 내 손으로 지은 집 부수고 가긴 어딜 가냐고 생각하니 다시 힘이 난단다. 그는 “강제철거를 당하면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주민 절반 이상이 당장 거리에 나앉을 판”이라며 “60년 가까이 살아온 내 고향이 통째로 사라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동포들한테도 투표권이 주어질 거란 소식을 들었다. 투표권이 생기면 우리한테도 좀더 관심을 가져줄지 모르겠다. 2년 전에 한국 정부는 우토로를 도와줄 것처럼 말했다. 우토로 상황은 그때보다 지금 더욱 나빠졌다. 솔직히 더는 한국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 그는 “한국 정부가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면, 결국 주민들이 어떻게든 강제철거를 막고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며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 마을을 지켜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상추 꽃대에서 내년 뿌릴 씨앗을 털어내다

“60년도 넘게 여기 살았어. 처음 왔을 때는 온통 함바집 뿐이었지 뭐. 진창에서 돼지·소·말 키우고 했으니 그 냄새가 굉장했어.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야 뭐….” 정귀연(85)씨 집에선 주인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어 보이는 개 한 마리가 마른기침을 해가며 손님을 맞았다. 흔들리는 두 다리를 벽에 의지한 채 간신히 방에서 걸어나온 정씨의 이마에선 이내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이 너른 땅 다 살 수도 없고, 땅을 지고 나갈 수도 없고, 외롭지 뭐….” 토지 매입 시한 얘기를 꺼내자 정씨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는다. “어쩌겠어? 그대로 살게 두면 괜찮지만 나가라고 하면 그땐 난리가 나는 거지 뭐. 나 같은 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별거 있겠어?”

“암디도 안 가고 이 방에서 34년을 살았는디, 내가 나갈 턱이 있갔디!” 마을 한쪽에서 만난 김순애(87)씨도 같은 말을 했다. 한국의 경주와 김제, 일본 이시가켄과 교토 등지를 전전한 그는 51살이 돼서야 우토로에 정착했단다. “우토로에 가면 차별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에 앞뒤 잴 것 없이 이삿짐을 꾸렸단다. 말을 나누는 사이에도 그의 손은 상추 꽃대에서 내년에 뿌릴 씨앗을 털어내느라 분주했다. 우토로를 떠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으로 보였다.

김금자(77)씨의 본명은 김남영이다. 부모가 지어준 ‘남영’이란 이름을 스스로 ‘기미코‘로 바꿀 정도로 기막힌 세월을 살아냈다. 30살에 요절한 남편을 통곡으로 떠나보낸 지 1년여 만인 그이 나이 29살 때 지은 집에서 지금껏 살아왔다. 그는 “20년 전 처음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나를 죽이고 집을 밀라고 했는데, 그게 20년이나 갈 줄 몰랐다”며 “20년 동안 싸워오면서 겪은 일을 말로 다할 순 없지만, 그 긴 세월 중에서 지금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집도 낡고, 나도 늙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나? 또다시 강제철거 얘기가 나오면서 솔직히 요즘 마음이 공중에 붕 떠 있다. 단 1년이라도 안심하고 살고 싶다. 한국에서 모금운동을 해줘서 감사한데, 돈도 필요하지만 마음으로 힘을 모아 우리를 뒤에서 받쳐달라. 돌아보면 알겠지만 거의 노인들만 살고 있지 않나. 노인들은 땅 지키는 싸움 그만하고 편하게 사시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싫다. 우토로 땅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 붉어진 그의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우토로 재일조선인 마을의 역사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일본 정부는 교토에 군비행장 건설을 결정했고, 이듬해 군수기업 ‘일본국제항공공업’이 교토부 외곽의 불모지 ‘우토로 51번지’에 비행장 건설에 나서면서 우토로 재일조선인 마을은 시작됐다. 비행장 건설이 한창일 땐 조선인 인부가 1300여 명에 이를 정도였고, 자연스레 노동자 집단합숙소(‘함바’)가 들어서면서 마을의 꼴을 갖춰나갔다.

“해방돼도 먹을 것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람이 잘 통하는 마을 한가운데에서 윗옷을 벗어부친 강경남(83)씨는 서너 개 남은 앞니를 환히 드러내놓고 연방 담배를 피워 물었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9살 때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오사카를 거쳐 해방 직전 우토로에 들어와 62년을 한결같이 살아왔다. “비만 오면 물이 철벅철벅하던 땅이다. 나물이라도 심어 먹으려고 자꾸 마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비행장을 차지하고 있던 미군이 와서 총을 들이대며 나가라고 했다. 총으로 가슴팍을 막 밀면, 여자들이 나서 ‘차라리 죽이라’고 들이댔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항공공업 사장은 A급 전범으로 체포됐다. ‘일국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회사는 1962년 닛산과 합병됐고, 우토로 51번지 토지 소유권은 닛산차체로 넘어갔다. 1987년 닛산차체가 토지를 제3자에게 매각하면서 우토로 땅은 세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 주민들은 20년을 하루같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 그 싸움이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우리 대신 일본 정부 좀 혼내주라고 해”

“나는 노가다 오만 거 다 했다. 공장일 같은 건 아예 안 했다. 남자들하고 똑같은 일을 평생 했다. 그렇게 아들 둘, 딸 넷을 키웠다.” 깡마른 체구의 강씨가 한평생 거친 일로 마디가 굵어진 손을 휘휘 젓는다. “처음에 닛산이 하는 말이 ‘죽도록 여기서 살아라’ 그러더라. 딴 데 가려거든 땅을 팔지 말고 그냥 가면 된다고. 그래 놓곤 땅을 팔아버렸다. 나는 여기서 죽지, 딴 데는 절대 안 간다. 세상에, 60년 넘게 살아온 땅에서 나가라는 게 말이 되느냐.”

새로 담배에 불을 댕긴 강씨가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해방도 해방이 아니었지, 뭐. 돌아가려고 했지만 갈 수가 있었나? 고향에 친척이 있나, 가진 땅덩어리가 있나. 먹을거리도 없어 반강제로 떠나온 땅인데.” 강씨가 쓸쓸히 말했다. “난 잘 모르지만…, 한국 정부에 바라는 건 한 가지뿐이야. 우리 대신 일본 정부 좀 혼내주라고 해. 자기들이 끌고 오다시피 한 사람들 한평생 살아온 땅에서 내쫓는 거 내버려두지 말라고.” 세기가 바뀌고도 해방이 찾아오지 않은 땅, 우토로 재일조선인 마을을 굵은 빗방울이 때려대기 시작한다.



“걱정 말라던 말을 믿었는데…”

우토로 주민회 회장이 노무현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님께


언제나 우토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00년 말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퇴거 판결이 확정된 이후 우토로에선 어떤 희망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됐습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급속히 높아진 한국의 뜨거운 관심과 지원이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부 관계자분들이 하셨던 “이제 걱정 마십시오. 정부도 꼭 지원할 것입니다. 우토로 문제는 반드시 해결될 겁니다”란 말씀에 우토로 주민들은 얼마나 감격하고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난 6월11일 한국 국회에서 송민순 외교부 장관님께서 “재일민단과 사회복지법인들을 연결해 지원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고, 또 최근에 여러 관계자들이 “강제퇴거가 있는 경우, 생활보호세대와 고령자들을 받아들일 복지시설이 확보돼 있다”고 말씀하셔서 저희는 정말 깜짝 놀랐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우토로 주민회는 어떠한 사회복지 법인과도 정식으로 우토로 문제에 대해서 상담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대책’은 ‘강제퇴거’를 전제로 한 것으로서, 우리 우토로 주민들로서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대통령님!
우토로에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피눈물이 스며 있습니다. 토지 문제가 발생한 지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억울하게도 이 동안에 많은 1세분들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토지 소유자는 오는 7월 말까지 최종 교섭을 끝내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대통령님, 우토로를 지켜주십시오. 우리에게는 이제 조국밖에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제발 우토로를 지켜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07년 7월4일 우토로 주민회 회장 김교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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