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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의 방북, 잃어버린 시간 찾기

등록 2007-06-29 00:00 수정 2020-05-03 04:25

평양 땅 밟은 크리스토퍼 힐, 비핵화 프로세스·6자회담 가속화되나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그는 언젠가 한국 기자들과 만나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중국 베이징 공항에 앉아 있다 보면, 세계 각국으로 가는 항공기의 목적지와 출발 시각이 적힌 전광판을 유심히 보게 된다고. 그중에는 평양으로 가는 고려항공도 끼어 있다고.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언젠가 베이징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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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항공 대신 군용기를 탔고, 출발지도 베이징이 아닌 서울이었지만, 6자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6월21일 오랜 꿈을 이뤘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 가 이날 오후 전세계로 긴급 타전한 사진을 보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북쪽의 영접을 받는 그의 얼굴은 붉그스레 상기된 채였다. 힐 차관보는 지난 2002년 10월 제2차 북핵 위기를 촉발시킨 자신의 전임자 제임스 켈리의 방북 이후 4년8개월 만에 북한 땅을 밟은 미 행정부 최고위급 인사다.

힐 차관보의 방북은 형식적으로만 보자면 지난 3월 뉴욕에서 열린 북-미 관계 정상화 실무그룹에 참석했던 김계관 부상의 초청에 대한 답방 성격이다. 하지만 ‘타이밍’ 속에 숨은 뜻은 생각보다 많다. 힐 차관보의 평양행은 북핵 폐기 문제를 ‘말’의 단계에서 ‘행동’의 단계로 끌어올린 2·13 베이징 합의 이행을 넉 달여째 가로막은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풀린 직후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지난 1월 베를린 북-미 접촉이 2·13 합의로 이어졌던 경험에 비춰, 이번 그의 방북에선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이후의 핵 ‘불능화’ 과정에서 불거질 핵심 쟁점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을 것이란 점은 미뤄 추측이 가능하다.

방북 ‘타이밍’속에 숨은 뜻

“조지 부시 행정부 들어 북-미 직접대화를 거부해온 미국이 지난 1월 베를린회담 때부터 양자대화 의지를 보였다. 힐 차관보의 방북은 양자대화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의지를 집약적으로 표현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의 평가다. 김 연구교수는 “미국으로선 고위급 인사의 방북을 통해 정치적 신뢰를 높여놓는 게 향후 비핵화 프로세스 가속화에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란 판단을 했을 것”이라며 “북한으로서도 북-미 관계 개선에 대한 일관된 의지가 있는 것이고, 힐의 방북이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방북 초청자 격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첫날 밤 힐 차관보와 회담·만찬을 한 뒤, 그를 백화원 초대소로 안내했단다. 백화원 초대소는 지난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그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투숙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까지 한 북한의 대표적 영빈관이다. 일부에서 기대했던 김 위원장과의 ‘깜짝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북이 힐 차관보를 각별히 배려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보혁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은 “그동안은 미국이 핵폐기 이행을 조기에 이루려는 적극적 입장이었던 반면, 북한은 2·13 합의 내용을 가능한 한 잘게 쪼개 각 단계를 이행해나가면서 얻을 것은 얻는다는 신중한 태도였다”고 지적한다. 힐 차관보의 방북은 이런 접근법상의 차이를 좁히고, 핵폐기 과정의 속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을 것이란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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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도 꼬리를 물고 이어질 전망

“이제는 비핵화라는 본질로 들어갈 때가 된 것 같다.” 1박2일 은 평양 방문을 마치고 6월22일 오후 서울에 도착한 힐 차관보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이날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6자회담 우리 쪽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나란히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은 영변 원자로를 즉각 폐쇄할 의사가 있고, 불능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며 “우리(북-미)는 2·13 합의를 완전히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지지부진했던 6자회담 프로세스에 가속이 붙을 것임을 예고한 셈이다.

이와 관련해 북한의 입장을 외부 세계로 전달하는 충실한 통로 구실을 해온 의 이날치 기사를 눈여겨볼 만하다. 이 신문은 “어제와 오늘이 다른 급속한 사태 변화에 6자회담 합의 이행의 물꼬를 트겠다는 조-미 두 나라의 강한 의욕이 엿보인다”며 “올해 1월의 베를린 조-미회담의 전례가 보여주듯이 조선과 미국의 직접 대화는 6자회담을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점을 마련해왔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또 “조선은 현상유지를 바라지 않으며, 목표달성을 위한 합의 이행을 일부러 미루고 시간을 끌어야 할 이유가 없다”며 “현재처럼 부시 정권이 상대방의 ‘핵무장 해제’를 선차적 목표로 내걸지 않고, 두 나라의 관계 개선에 의한 ‘포괄적인 문제해결’을 지향한다면 조선도 보조를 재빨리 맞춰나가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영변 핵시설 폐쇄 조처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만남’도 꼬리를 물 전망이다. 우선 다음달 초엔 베이징에서 6자회담 수석대표 회의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어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검증단의 방북과 핵시설 봉인 △중유 5만t 대북 지원 등 2·13 합의 초기 단계 이행 조처가 발빠르게 마무리된다면, 7월 안에라도 6자회담 참가국 외교장관 회담 개최도 가능하다. 천영우 본부장은 이날 회견에서 “북쪽도 7월 초순께 6자 수석대표 회담을 하고, 그 이후 적절한 시기에 6자 외교장관 회담을 하는 구상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다만 외교장관 회담의 구체적인 날짜나 장소는 의장국인 중국이 다른 참가국들과 협의해서 결정할 사항이라고 본다”고 전했다.

시야에 들어온 라이스 장관 방북

그동안 상당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6자 외무장관 회담을 전후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이 추진될 것이라고 점쳐왔다. ‘후’보다는 ‘전’에 방점을 찍는 이들이 많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은 “중국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개최 시점과 맞물려 8월 초로 6자 외교장관 회담을 제안했으나, 이는 (현 상황에 비춰) 다소 시점이 늦는다는 느낌”이라며 “북한이 초기 단계 조처 이행을 2~3주 안에 끝낸다면, 이르면 7월 중순 라이스 장관 방북과 7월 말 6자 외교장관 회담 개최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라이스 장관의 방북은 △연락사무소 개설 △테러지원국 해제 등 북-미 관계 개선에 대한 고위급 결정이 내려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힐 차관보는 평양 도착 일성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2·13 베이징 합의 이후 BDA 문제로 허비한 지난 4개월여를 지칭한 것일 게다. 하지만 지난 2000년 10월 조명록-올브라이트 교차 방문과 그해 12월 초로 예정됐던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방북 계획을 떠올린다면, 북-미가 ‘잃어버린 시간’은 6년여를 헤아린다. 이를 메우기 위한 노력을 아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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