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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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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하다, 한센인 특별법

등록 2007-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사죄하지 않고 보상도 없는 철학 없는 입법, 그나마도 발의된 뒤 2년간 방치

한국과 대만 한센인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식민지배 기간에 이뤄진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를 제기한 것은 2003년 12월25일이다. 2년 만인 지난 2005년 10월, 일본 법원은 대만 한센인들에게는 ‘승소’의 기쁨을, 한국 한센인들에게는 ‘패소’의 아픔을 안겨줬다. 똑같은 문제에 대한 엇갈리는 판결에 당황한 일본 사회는 두 나라 한센인들이 똑같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관련 법을 개정했고, 그에 따른 보상금을 지급했다. 2년 전에 일본 정부의 책임을 준엄히 꾸짖었던 한국과 대만 사회는 자국 한센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이 두 나라의 대표적인 한센인 요양소인 한국 소록도와 대만 ‘러성위안’(樂生園)을 찾아가봤다. 편집자

▣ 소록도=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장기진(87) 할아버지는 어정쩡한 걸음으로 소록도 자치회 사무실로 들어섰다.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한 것은 1년 반 만이다. 그는 일제시대 소록도에 강제수용돼 강제노역, 신사참배, 단종수술 등 고통을 받아냈던 한국 한센인들의 대표로 일본 도쿄지방재판소 103호 법정에 앉아 있었다. 그날 일본 법원은 소록도 한센인들이 제기한 보상 청구를 기각했고, 노인은 북받치는 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차가운 일본 법정의 한구석에서 휠체어에 기댄 노인의 초라한 뒷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은 무참했다. “2005년 10월25일이었지, 아마.” 그날의 일들을 좀처럼 기억에서 떨쳐내기 힘들었던지, 노인은 기자도 잊고 있던 그날의 정확한 날짜와 동행한 사람들, 그날의 분위기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패소했으나 일본의 입법 조치로 보상받아

다행스럽게도, 지난 1년 반 동안 ‘한센인 보상’을 둘러싼 일본 정부와의 갈등은 노인의 기대대로 순탄하게 풀려나갔다. 일본 국회는 한국 정부의 압박과 일본 인권단체들의 집요한 외침을 받아들여 2006년 2월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이하 한센인 보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재판에서는 졌지만, 일본 정부·국회의 성의 있는 입법 조처로 노인은 법이 정한 피해 보상자로 지정될 수 있었다.

노인이 일본 정부가 지급한 800만엔(변호사 수수료 등 기타 비용을 뺀 실제 수령액은 5400만원)을 손에 쥐게 된 것은 그해 9월이었다. 치열한 투쟁을 이어나가면서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설픈 도덕론자거나, 어설픈 도덕론자를 등쳐먹으려는 사기꾼 가운데 하나다. 노인은 그 돈으로 위암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조카며느리에게 수술비를 대줬고, 교회에 헌금을 냈으며, 생활하는 데 여러 수발을 들어주는 도우미들에게 작은 성의 표시를 했다. “아무래도 위안이 되지 않겠어? 일본에 대한 미움도 많이 풀린 것 같고, 그동안 억울했던 마음도 뻥 뚫리고.” 노인은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소록도 개원 91돌을 맞는 5월17일의 소록도는 유력 대선 후보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맞는 함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부돌(92) 노인은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장 노인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소송을 냈지만, 돈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제시대 소록도갱생원(지금의 국립소록도 병원)에서 작성된 한센인 명부와 진료 기록 등이 전쟁 등 난리를 겪는 과정에서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장 노인은 1960년대에 작성된 병원 서류 등을 통해 그가 일제시대에 이곳에 들어왔음을 입증할 수 있었지만, 젊은 시절 육지와 섬을 들락날락한 이 노인은 그런 서류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못 받는 건 괜찮아. 그런데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으니까 노인네들이 받는 마음의 상처가 보통이 아니거든.” 옆에서 노인의 사정을 듣고 있던 김명호 소록도자치회장이 말했다. 일본 정부에 보상금 지급을 요구한 441명의 한센인 가운데 돈을 받은 사람은 전체의 40%에도 못 미치는 170명뿐이다. 이에 견줘 대만의 한센인 요양시설 ‘러성위안’(樂生園) 한센인 25명은 관련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어 모두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일제시대 때 병원 서류가 사라진 게 한국 정부의 부주의 때문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노인은 이미 아흔두 살이다. 서류가 나오지 않으면 노인이 평생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고통을 위로받을 길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불행한 과거를 나열할 뿐인 법안

그의 억울함을 풀어줄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센인들의 자치단체인 한빛복지협회의 임두성 회장은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센인 문제는 일본을 상대로 늘 ‘과거 청산’을 외쳐왔던 한국 사회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데 얼마나 무심한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로 꼽힐 것 같다. 김춘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등 의원 62명은 2005년 9월16일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하 한센인 특별법)을 공동 발의했지만, 정치인들의 외면 속에서 2년 가까이 방치돼 있다.

문제는 단순한 시간 지연이 아니다. 일본의 한센인 보상법과 한국의 한센인 특별법을 비교해보면, 한센인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성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한센인 보상법은 법 전문에 “(한센인에 대한 잘못된 정책이라는) 이러한 비참한 사실을 회개와 반성의 뜻을 담아 사죄함과 동시에…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이유 없는 편견을 근절하는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고 법의 제정 목적을 분명히 적고 있다. 법의 취지는 분명하고 단순하다. 국가가 잘못된 한센인 정책으로 그동안 한센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것을 사죄하고, 그 사죄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한센인에게 적게는 800만엔(6200만원), 많게는 1400만엔(1억1천만원)까지 보상해주겠다는 것이다.

이에 견줘 한국 한센인 특별법의 위상은 모호하다. 일본법의 전문에 해당하는 제안 이유에서 한센인 특별법은 “과거 한센인은 한센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아왔으며… 수용 과정에서 감금, 폭행, 단종 등의 인권유린을 당했다”고 적고 있다. 또 “그동안 정부 차원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이나 피해자 등에 대한 조처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선선히 인정한다. 그러나 결론은 다르다. 법안은 그저 그런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열할 뿐이다. 한센인 특별법은 ‘사죄’ ‘회개’ 또는 ‘반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센인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받아온 차별과 편견에 대해 국가는 별 책임이 없다는 투인데,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의 느슨함이 거슬렸다. 사죄가 없는데 (당연히) ‘보상’이 있을 리 없다. 법안은 대신 “피해자에 대한 생활 및 의료 지원”을 해 “인권 신장 및 생활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이도저도 아닌 결론을 맺고 만다.

공개 보고서도 읽지 않은 듯한 검토 의견

법의 불성실한 성격은 내용에까지 이어진다. 법안은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한센인 피해자’ 지정 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한정하고 있다. 한센인 피해자가 되는 길은 세 개뿐이다. 먼저, 1945년 8월16일부터 1963년 2월8일(한센인의 강제격리 정책이 폐지된 날)까지 한센인 요양시설에 있었던 사람 가운데 상해·폭행·부당한 감금·동의 없는 단종수술 등의 피해를 당해야 한다. 둘째, 한센인을 둘러싼 대표적인 학살 사건인 △소록도 84인 학살 사건(1945) △비토리섬 살인 사건(1957)의 피해자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이청준의 소설 의 배경이 되는 오마도 간척사업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렸어야 한다. 즉, 학살당하거나, 학살을 겨우 피해 살아남거나, 국가의 폭력으로 크게 다치거나, 단종수술과 같은 인간적 모멸을 느끼지 않으면 생활 및 의료 지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센인 특별법은 한센인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음에도 이 병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제주 4·3 항쟁처럼 주목받지도 못했고, 광주처럼 정치세력화되지도 못했으며, 변변한 ‘학출’(대학생 출신) 운동가 하나 갖지 못한 마이너리티(소수자)의 마이너리티인 한센인들의 정치력 한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식 보고서 내용도 제대로 담지 못한 법안과 검토 의견은 실망스럽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은 2005년 10월 한센인 특별법에 대한 ‘검토보고서’에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진행 중인 ‘한센인 인권상황 실태조사’의 결과를 지켜보자”는 의견을 냈지만, 그는 아무래도 이후 공개된 보고서를 읽어보지 않은 듯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5년 12월 내놓은 공식 조사보고서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는 소록도 84인 학살 사건과 비토리섬 살인 사건 말고도 △무안 연동 △함안 물문 △구례·옥과 △나주 냇골 △장흥 △고창 등 10여 건의 한센인 학살 사건을 기술하고 있으며, (1963년 이후 강제격리 제도는 폐지됐지만) 1980년대까지 거리를 떠도는 한센인들을 잡아들이는 ‘강송’ 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병원에서 단종수술이 계속된 것도 그 무렵까지다.

철학이 없는 입법은 공허하다. 권오봉 기획예산처 사회재정기획단장은 4월1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법이 만들어져도) 재정 소요는 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법 제정이 없더라도 이분들에 대한 보호는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별 도움도 안 되는 법을 만들기 위해 한센인들은 왜 2년 동안이나 이곳저곳으로 불러다녀야 했을까. 한센인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사회가 보여준 총체적인 역량의 차이는 양쪽 간의 어쩔 수 없는 경제력 차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견디기 힘든 열패감을 느끼게 한다.



‘옥상옥’법, 꼭 필요한가

보상금 아닌 의료지원금·생활지원금 지급, 비토리섬 학살 사건은 제외돼

‘한센인 특별법’의 핵심은 한센인 피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국무총리실 산하에 그 법에 따른 피해자를 결정하기 위한 진상규명위원회를 두자는 것이다. 이때 ‘한센인 피해 사건’은 △한센인 격리 사건 △84인 학살 사건 △비토리섬 사건 △오마도 간척사업 사건 등으로 한정됐고, 또 피해자로 인정된 한센인에겐 ‘보상금’이 아닌 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된 입법 과정을 살펴보면 이 법이 한센인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먼저, 진상 규명의 대상이 되는 사건의 폭이 너무 좁고, 그나마 입법 과정을 통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논란이 된 사건은 1957년 8월28일 경남 사천군 서포면 비토리섬을 개간하러 들어갔던 한센인들이 섬 사람들에게 학살당한 비토리섬 사건이다. 권오봉 기획예산처 사회재정기획단장은 4월1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비토리섬 사건은 국가가 개입된 사건이 아니다”고 말했고, 변재진 보건복지부 차관도 “법적으로 보면 비토리섬 사건에 연루되어서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다 지원하는 것은 법적으로 안 맞는 것 같다”고 거들었다. 국가가 직접 사람을 죽인 게 아니기 때문에 지원에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가가 비토리섬 사건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전북 장수의 3대 민의원(무소속)이었던 정준모 전 보건사회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57년 10월26일 작성한 보고서 ‘나환자와 사천군 비토리 주민과의 충돌 사건에 관한 조사보고’를 통해 확인된다. 조사단은 보고서에서 “현지 행정당국자인 서포면장과 당시 서포경찰서 주임 및 차석 등이 주민들의 폭거에 대해 약간 방관적 태도를 취한 듯한 점이 없지 않다”고 국가의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법안은 또 피해자로 인정된 한센인들에게 보상금이 아닌 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했지만, 한센인들의 평균 나이는 72살로 대부분 지금 시행되는 사회 안전망의 혜택을 보고 있다. 법안은 어떤 의미에서는 옥상옥인 셈이다. 그 때문에 권 단장은 “법이 만들어져도 재정 소요는 아마 크지 않을 것”이라며 “법이 꼭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장철우 변호사는 “법안이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 법의 큰 흠”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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