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노 대통령의 의지에 못 미치는 한나라당의 당론, 과연 누가 먼저 핸들을 꺾을 것인가</font>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다시 또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치킨게임이란 한밤중에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그래서 패자가 ‘치킨’(겁쟁이를 뜻하는 속어)이 되는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경기였는데 이제는 정치학 용어로 굳어졌다. 국민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정치에 대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관전자처럼 게임에 빗대는 게 부적절할지 모르지만, 개헌을 놓고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 좀더 구체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충돌하는 양상을 이보다 잘 드러내 보여주는 표현은 없다.
정치권 누구도 관심 없던 개헌
지난 1월9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4년 대통령 연임제’ 개헌을 제안한 이후 열린우리당을 제외한 정치권은 노 대통령의 제안을 사실상 무시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와 학계, 언론도 개헌 제안의 시점과 정치적 의도, 실현 가능성 등을 이유로 임기 내 개헌에 부정적이었다. 개헌안 준비와 개헌 홍보에 몸이 달았던 정부를 제외하곤 개헌은 관심권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러던 개헌 논란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이후 개헌 발의 시점이 구체화되면서부터였다. 4월17일 국무회의 상정, 18일 발의 일정이 잡히자 ‘불덩이’를 떠안게 될 국회가 선수를 쳤다. 김형오(한나라당)·장영달(열린우리당)·김효석(민주당)·권영길(민주노동당) 의원 등 국회 내 6개 정파의 원내대표가 11일 모여 ‘개헌 문제는 18대 국회 초반에 처리하기로 한다’고 합의하면서 청와대에 개헌 발의 유보를 요청했다. 이에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각 당이 당론으로 결정하고 국민에게 책임 있게 약속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대통령은 정당 대표들과 개헌 내용과 추진 일정 등에 대해 대화하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화답했다.
이때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문 실장의 ‘조건부 수용’이 ‘명분 있는 퇴각 수순’으로 해석되자 다음날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노 대통령은 12일 오전 청와대 정무관계회의를 직접 주재한 자리에서 각 정파가 개헌을 당론으로 약속하지 않으면 17일 개헌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하고 18일 정식 발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윤승용 청와대 대변인은 “문 실장의 제안은 (협상을 위한) 조건에 방점이 있었지 (개헌 발의) 유보는 아니었다. 언론이 청와대 흐름을 잘못 해석했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각 당’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키는 한나라당이 쥐고 있다. 한나라당은 13일 정책 의원총회를 열어 18대 국회에서 포괄적인 개헌 논의에 착수해 차기 대통령 임기 중 헌법을 개정하고, 이를 오는 12월 대선의 대통령 후보가 공약으로 제시한다는 기존 당론을 확인하는 수준으로 청와대의 ‘당론화 약속’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쯤 되면 청와대가 조건으로 내건 당론 채택과 대국민 약속이 지켜졌으니 노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접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좀더 복잡하다. 노 대통령의 개헌에 대한 의지, 혹은 집착이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가능성은 절반이지만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럼에도 민주당 깃발로 부산에 출마해 수차례 쓴잔을 마셨던 노 대통령의 정치 역정과 개헌 제안의 배경 등을 놓고 보면 발의 시점을 조절할지는 몰라도 개헌안을 접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개헌안의 통과 가능성, 정치적 이해득실 등을 넣어 계산을 하면 답이 안 나오지만, 여러 점들을 선으로 이어가는 방식으로 노 대통령의 다음 행보를 유추해보면 그럴 것이라는 얘기다.
“좀더 높은 수준의 약속이 필요하다”
근거는 이렇다. 노 대통령은 실제 개헌을 하고 싶어한다. 개헌으로 대선 판도를 흔들려 했다면 좀더 파장이 크거나 시민사회나 진보진영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낼 만한 포괄적인 개헌을 제안하지 않았겠느냐는 청와대 쪽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4년 연임제 개헌안은 노 대통령의 개헌 발의 이전으로 시점을 돌려보면 가장 합의 가능성이 높은 방안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임기 내에 꼭 해야 하거나 하지는 못하더라도 분명한 방향을 설정해놓아야 할 의제들을 정리하면서 개헌을 제안하게 됐다는 배경 설명을 적용하면, 제안 당시에는 개헌의 실현 가능성을 높게 봤던 것이고 이제는 그 가능성이 낮아졌더라도 개헌을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노 대통령은 4년 연임제 개헌을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치인이면서도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요구받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정치개혁이자, 한-미 FTA만큼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연임제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선거운동이 가능해 책임정치가 강화되고 정치문화가 크게 바뀔 것이라는 게 청와대 쪽의 주장이다. 2004년 3월의 탄핵 국면은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에서 비롯됐다.
‘돌이킬 수 없는 흐름’ 정도가 되려면 조건은 좀더 까다로워진다. 노 대통령의 측근으로 지난해까지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천호선 전 국정상황실장은 개인 자격임을 전제로 이렇게 설명했다. “18대 국회에서 개헌을 논의하고 처리한다고 하지만 막상 광범위한 개헌 논의가 벌어지면서 흐지부지될 수 있다. 개헌 당론과 공약화는 당연한 것이고 4년 연임제 개헌을 비롯해 최소한 합의 수준이 높은 내용은 반드시 개헌한다, 그리고 개헌안에 따른 대통령의 임기 단축을 감수한다는 정도가 포함돼야 한다고 본다.”
이런 구체적인 수준은 한나라당 처지에서는 “핸들을 먼저 꺾으라”는 굴욕에 가깝다. 그렇다면 4월13일 의원총회 결론대로 ‘차분한 부결’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이 국회의 부결을 감수하면서 개헌안을 발의하고, 한나라당은 부결을 택하는 ‘치킨게임’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치킨게임에서 양쪽 다 패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 있긴 하다. 사망하거나 최소한 중상을 입는 경우다. ‘개헌 치킨게임’의 경우엔 당장 한나라당이 잃을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인 기록이 남는다. 국회법에는 ‘헌법개정안은 기명투표로 표결한다’(112조 4항)고 규정돼 있다.
정치적 사망보다 두려운 역사적 평가
노 대통령이 스스로 개헌안을 접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년 만의 국회 표결과 기록이 정치권의 책임 있는 개헌 논의를 강제하는 측면도 있지만 ‘역시 개헌은 어려운 것’이라는 인식을 강화해 개헌의 장벽을 더 높일 수도 있다. 개헌이 곧 개혁이며 낮은 단계의 개헌 뒤에 높은 단계의 개헌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노 대통령에게 ‘개헌 장벽을 높인 대통령’이라는 역사적 평가는, 정치적 사망이나 중상보다 더 두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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