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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성적표만 살아남을까

등록 2006-12-14 00:00 수정 2020-05-03 04:24

637호 표지이야기 ‘사이비리그-외국어고 유학반의 내신 부풀리기’ 보도 뒤…“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 미 고교 유학생은 번역해 미국 대학에 보내기도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박주희 기자/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hope@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2월1일 취재진에게 경기 성남의 권아무개(19)군의 간곡한 부탁이 담긴 이메일이 도착했다. “저는 일반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인데요. 미국 대학 학부 유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서 유학원이나 유학 컨설팅 업체에 맡길 형편이 안 돼서 제가 혼자 준비하고 있는데, 제가 재학 중인 고등학교에서는 아직 학부 유학생이 없어서 선생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잘 모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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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5곳 원서를 써주는 데 3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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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탁인즉슨 영문 성적표 양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그것을 기자가 구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기자는 권군과 통화를 했다. 그리고 권군에게 교육청 홈페이지 자료실에 가면 교육부가 규정한 영문 성적표 양식이 비치돼 있다고 알려주었다.

권군은 좀더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 미국 대학을 선택했고,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시작한 평범한 고교생이었다. 그는 유학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서 서울 강남에 자리잡은 유학 학원에 찾아갔지만, 턱없이 비싼 값을 부르는 바람에 포기했다고 한다. 업체에서 부른 가격은 대학 5곳에 원서를 써주는 데 300만원. 1곳이 추가될 때마다 50만원을 더 내야 하고, 아이비리그 대학을 포함한 ‘아이비리그 패키지’는 100만~200만원이 추가됐다. 부모님은 “돈 걱정 말라”며 유학 학원에 맡기자고 했지만, 권군은 “쓸데없는 데 돈을 쓸 필요 없다”며 혼자 서류를 준비하기로 했다고 한다.

권군이 사는 세계와 이 취재한 외국어고 유학반의 세계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일부 외국어고 유학반은 교육부에서 규정한 영문 성적표를 무시하고, 자체적으로 영문 성적표를 제작해 미국 대학에 발송했다. 그들 사이에서 80점 이상을 A로 주고 전체 석차를 기입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고, 심지어 한영외고 유학반은 70점 이상을 A를 주었던 것이다. 한국 생활기록부에는 ‘미’로 기록된 성적이 미국 대학 제출용 성적에는 버젓이 ‘A’로 표기돼 발송됐다. 이 두 달 동안 입수한 여러 장의 유학반 성적표는 대부분 A로 도배돼 있었다. 전체 석차 또한 고의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적으로 봐선 의심할 나위 없이 한국 정규수업 과정에도 아주 뛰어난 학생의 성적표였다. 이는 국문 성적표를 그대로 영역해 보내야 하는 교육부 방침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위였다. 이런 내용을 담은 637호의 ‘사이비리그-외국어고 유학반 내신 부풀리기 실태’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 고등학교 유학생협회 회장단 회의에서도 한국 외국어고의 내신 부풀리기가 화두로 떠올랐다. 보스턴 등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100~150명이 활동하고 있는 유학생협회 장승한 부회장의 말이다. “회장단 회의에서 한국 외국어고와 미국 대학에 내신 부풀리기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서명운동을 논의했어요. 일부 학생들이 관련 기사를 영문으로 번역해 미국 대학에 보내고 있어서 일단 지켜보기로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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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미 대학 입학생 생활기록부 공개하라”

미국 고등학교 유학생으로선 한국의 외국어고 유학반이 경쟁자이다. 미국 대학은 보통 인종·민족별 입학 쿼터를 두기 때문에 입학생 수는 한정돼 있다.

따라서 한인 고교 유학생으로선 한국 외국어고의 부풀려진 내신성적이 불리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장 부회장은 “좋은 대학에 가려면 내신 총 평점(GPA) 3.8 이상은 돼야 하는데, 그 정도를 받으려면 퀴즈나 숙제를 따로 해야 해서 미국대학입학자격시험(SAT) 공부를 따로 할 시간이 없다”며 “서울처럼 SAT 학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불리하다”고 말했다.

해커스토플 학부게시판(http://gohackers.com), 디시인사이드(http://dcinside.com) 외국대학 갤러리 등 유학 지망생들이 모이는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수백 개의 글이 오르며 논쟁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유학 지망생들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 기회에 철저한 조사를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내신 부풀리기에 가담하지 않은 외국어고와 다른 일반계 고교가 피해를 받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에선 외국어고의 실명이 거론되며 80점 이상에 A를 줘왔던 관행이 폭로되기도 했다. 한 누리꾼은 “1990년대 후반부터 유학반을 통해 미국 대학에 들어간 모든 학생의 생활기록부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 기사가 나가고 나흘 뒤,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은 12월1일 서울 지역 외국어고 유학반에 대한 ‘특별 불시 점검’을 시행했다. 하지만 ‘불시 점검’ 날짜는 사전에 유출됐다. 한영외고의 한 학부모는 ‘불시 점검’ 하루 전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오늘 학부모와 교사가 모인 유학반 운영 소위원회에서 내일 감사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며 “내일 감사를 앞두고 학교 쪽이 준비를 하느라 부산하다”고 전했다.

교육 당국의 유학반 점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서울 지역 외고 유학반에 대한 특별 장학지도를 벌였다. 올해 10월에도 서울시교육청은 다시 장학지도를 벌였고, 이 유학반 문제를 처음으로 보도(631호 ‘사교육의 반란, 한영외고에서 생긴 일’)한 직후에도 한영외고의 특별감사를 시행했다. 하지만 변한 건 많지 않았고, 의 두 번째 보도 직후의 특별 점검은 아예 날짜가 유출되기까지 했다. 과연 교육 당국이 의지가 있는 걸까. 아니면 외국어고가 교육 당국을 우습게 보는 걸까. 이은숙 서울시교육청 중등교육정책과 장학관은 특별점검 날짜 유출에 대해 12월5일 “굉장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대신 그는 “교육부의 일제 점검 계획은 언론 보도를 통해 미리 알려졌기 때문에 외국어고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전날 알려진 ‘불시 점검’

한국 최고의 엘리트가 모인다는 일부 외국어고의 편법적인 내신 부풀리기 파장은 이제 시작인 듯 보인다. 일반계 고교에 다니는 권군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는 주제로 미국 대학에 보낼 에세이를 쓰려고 한다. 그는 이번 파문이 가져다준 허탈감이 그 시기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취재진이 두 달 동안 입수한 학교의 성적표 중에는 교육부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Wu(우)와 Mi(미)가 드문드문 박힌 ‘진실한’ 성적표 또한 적지 않았다. 진실한 성적표는 내신 부풀리기의 피해자다. 늦게나마 내신 부풀리기가 공개되지 않았더라면, 권군은 또 한 명의 피해자가 됐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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