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국기법 발의로 거세진 맹세 존폐 논란에 대한 한 철학자의 단상… 액자에 갇혀 충성을 강요하는 태극기를 우리와 함께 휘날리게 하라</font>
▣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나는 태극기를 좋아한다.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너무나 좋아한다. 눈이 시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금빛 국기봉을 추어올리면서 하얀 바탕에 빨강과 파랑의 태극 문양이 서로 맞물리고
눈썹처럼 새카만 팔괘가 서로 가로지르듯이 펄럭이는 모습을 보면 깃발 자락이 나의 영혼을 가뿐히 잡아 끌어올리는 느낌이다.
월드컵으로 하나 된 태극기와 우리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태극기는 나의 아들이 아직은 작디작은 두 팔로 깃대를 잡고 신나게 흔들며 뛸 때의 그 태극기다. 월드컵 응원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입에 올린 대한민국 구호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깃발과 어울린다. 아들은 태극기만 보면 흔들고 싶어하고 뛰고 싶어한다. 태극기는 그의 숨결이고 그의 활력이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는 우리나라가 세워진 이래 좀처럼 친근해질 수 없었던 우리 국가의 두 가지 상징물과 진정 하나가 되었다.
하나는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국기인 ‘태극기’다. 항상 남의 나라 부르듯이 우리나라를 ‘한국’이나 ‘남한’으로 객체화했고, 성조기나 유니온잭 같은 애칭 없이 그저 ‘국기’라고만 불렀다. 그런데 이제 ‘대~한민국’ 발성은 우리 축구팀이 참가하는 세계 모든 축구 경기에서 만국 공통 구호가 되었고, ‘태극기’는 누구나 알아보는 국가 패션이 되었다. 대한민국과 태극기는 건국 이래 반세기가 지나 비로소 우리 시민들의 숨결이고 함성이고 활력이 되었다.
어느 나라든지 국호와 국기는 국가적 통합과 국민적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가장 중심적인 상징물이다. 국호와 국기는 그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들에게 단순히 수동적 소속감을 확인시켜줄 뿐만 아니라 능동적 정체성을 고무하고 생활의 역동성을 일깨워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국호나 국기가 있음으로써 그 국가 시민들이 기죽거나 갈라지거나 굴종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태극기의 모습과 우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국기의 모습이 판이하다. 우리에게 활력인 태극기는 우리 몸 어딘가에 붙어 함께 움직인다. 월드컵 응원 때 그 넓은 관중석을 찬연히 덮었다가 바로 그 관중에 의해 웅혼하게 걷혀가던 대형 태극기는 물론이고, 청소년들이나 여성들이 몸에 티셔츠나 브래지어 또는 핫팬티처럼 감고 나온 패션 태극기는 움직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역동과 율동을 발산했다. 그런 태극기는 우리 모두를 축제의 마당으로 이끄는 마력을 발휘한다. 그에 반해 행사장에 늘어져 있거나 액자에 박혀 벽에 걸린 부동의 태극기는 우리에게 그 부동성과 엄숙함을 감염시킨다. 그런 태극기와 ‘나’ 사이에 ‘국기에 대한 맹세’라도 장엄하게 울려나오면 나와 태극기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생겨나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국가 종교 강요는 명백한 위헌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마흔일곱 글자의 이 맹세 안에서 ‘태극기’와 그것으로 상징되는 ‘조국과 민족’은 ‘나’와 대등하지도 않을뿐더러 수평적 관계에 놓여 있지도 않다. 태극기는 ‘자랑’스럽고, 조국과 민족은 ‘무궁’하고 ‘영원’함에 반해 그 ‘앞에’ 있는 ‘나’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존재다. 무궁하고 영원한 ‘무한한 것’과 몸과 마음이라는 ‘유한한 것’을 명증하게 대비시키는 가운데 조국과 민족은 나의 삶으로는 도저히 다 살 수 없는 초월적 위상으로 군림한다. 이 맹세에 나오는 태극기는 이 유한한 나에게 그 무한한 것을 합치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앞’에서 그것을 ‘위’로 올린다.
나의 앞에서 내 위로 올라간 것은 명백하게 나의 복종과 숭배를 요구하는 초월적 위치에 있게 된다. 그래야지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국가와 민족의 초월적 신성화, 나아가 종교화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위헌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야 하는데(대한민국 헌법 제20조 ②항) ‘국기에 대한 맹세’는 여러모로 국가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으로 되는 국가 종교를 함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기에 대한 맹세의 더 치명적인 문제는 조국과 민족을 종교화하는 가운데 ‘나’가 나의 조국과 민족과 맺는 관계를 단 한 가지로 획일적으로만 규정한다는 점이다. 왜 나는 나의 조국과 민족에 대해 오직 충성의 관계만 맺어야 하고 또 그러겠다고 다짐까지 해야 하는가? 나는 조국과 민족을 ‘좋아하면’ 안 되는가? 나는 조국과 민족과 ‘함께 놀면’ 안 되는가? 또 나는 조국과 민족에게 ‘응석’ 좀 부리면 안 되는가? 그리고 나의 삶에 조국과 민족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 그 조국과 민족에 대해 ‘분노’하면 안 되는가? 경우에 따라 내 몸과 마음이 고달프면 조국과 민족에 대해 ‘삐치거나’ ‘외면’하면 안 되나? 비록 나는 하루 종일 조국과 민족의 품 안에서 살고 있고 조국과 민족이 없으면 한시라도 살 수 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그것들이 있는 것을 잊고 내 일에 몰두하면 안 되는가?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나에게 왜 그렇게 조국과 민족에 대해 단 하나의 관계만 맺으라고 하고, 안 그러면 내가 이 나라 이 민족이 아닌 것처럼 무서움을 주는가? 왜 나는 나의 조국과 민족에 대해 다양한 관계를 맺고 다양한 삶의 양식으로 살면 안 되는가?
조국과 민족 그리고 나 사이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는 수많은 ‘나’들을 국민과 비국민으로 가르고, 비국민을 이 조국과 민족에서 배제하겠다고 위협한다. 그것이 맹세의 매체임으로 인해 태극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휘날리도록 깃대에 게양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비국민을 판별하는 잣대로 게시된다.
조국가 민족을 활기차게!
나는 나의 조국과 민족을 역동적으로 활기차게 살게 하고 싶다. 나는 나의 조국과 민족이 제단 위에 모셔져 영원히 단 하나의 표정만 지어야 하는 우상으로 취급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나의 대한민국이 그렇게 무표정하고 꼼짝도 못하는 화상으로 모독돼서는 안 된다. 나는 태극기 ‘앞’에서 부동의 자세가 아니라 태극기와 ‘더불어’ 역동의 몸짓을 하고 싶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우리 국기와 국가에 대한 모독이다. 태극기가 휘날리게 하고 휘감기도록 하라.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라면 누구나 절로 영원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외쳐지리라.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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