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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님 부담스럽습니다요!

등록 2006-07-20 00:00 수정 2020-05-02 04:24

에버랜드 전환사채 2차 수사 관련 ‘소환조사’여부 놓고 고심하는 검찰 …‘감히’ 출국금지 못 시키고 전전긍긍… 신중론과 조기결정론 팽팽히 맞서

▣ 이춘재 기자/ 한겨레 법조팀장 cjlee@hani.co.kr

이건희 삼성 회장이 또다시 검찰을 골치 아프게 하고 있다.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증여 사건 2차 수사를 진행 중인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부장 박성재)는 이 회장의 조사 방법과 시기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법이 1차 수사 때 기소된 허태학, 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에게 유죄를 선고한 직후 재개된 2차 수사의 최종 ‘몸통’이다.

이번 수사의 목적이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이용해 삼성 경영권을 이재용씨에게 불법적으로 넘기는 과정에서 이 회장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굴욕적 서면조사의 기억이여

하지만 검찰에게 이 회장은 단순한 피의자가 아니다. 그가 검찰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제가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 때문이다. 이는 과학적 검증을 거부하는 일종의 ‘주술’이다. 검찰은 지난 4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구속하면서 그의 구속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검 중수부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웬만한 경제연구소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정교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 회장과 관련해서는 이런 검토 작업을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 안기부 도청 테이프(엑스파일) 사건 때 이 회장이 갑작스레 미국으로 출국한 뒤 수사가 끝날 때까지 귀국하지 않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당시 수사팀은 이학수 부회장의 출국금지를 일시 해제해, 그가 미국에 체류 중인 이 회장을 만나 소환 조사가 필요하다는 검찰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조처했으나 이 회장은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팀은 결국 질문지를 작성해 삼성 쪽에 건넨 뒤 답변을 전달받는 방식으로 이 회장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심리적 압박을 가할 수 없는 서면 조사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는 조사에 비해 턱없이 부실하기 마련이다. 결국 수사팀은 수사 의지가 없다는 언론의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검찰은 이런 쓰라린 ‘과거’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 회장에게 출국금지 조처를 못 내리고 있다. 이 회장이 얼마나 검찰에 부담스런 존재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수사팀을 더욱 긴장시키는 것은 당시 이 회장이 도피성 출국을 한 이유가 실제로는 에버랜드 수사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수사팀이 이 회장을 소환할 조짐이 보이면 언제라도 그가 출국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지난달 말께 이 회장이 극비리에 출국할 것이라는 첩보가 나돌아 검찰을 한때 긴장시켰다. 수사팀은 “이 회장의 출국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며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 이 회장을 직접 조사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이인규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지난 4일 정례 브리핑에서 이 회장의 소환 조사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 사건으로 고발된 인사들을 모두 소환 조사할 것”이라며 “사안이 복잡하기 때문에 ‘서면 조사’는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검찰 수뇌부도 비공식적으로 이런 방침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하지만 이 회장을 언제 조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하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 회장 조사에 앞서 홍석현 전 회장에게 이달 안으로 출석하도록 통보했다는 첩보가 나돌고 있지만, 검찰은 이를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다.

‘임기 중 처리’ 망설이는 검찰 수뇌부

이 회장 조사 시기와 관련해 검찰 안에서는 ‘신중론’과 ‘조기 결정론’이 맞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에버랜드 1차 수사 결과에 대한 항소심 선고다. 신중론은 항소심 선고 결과를 보고 난 뒤 이 회장을 조사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는 항소심도 1심과 마찬가지로 에버랜드 경영진이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한 뒤 이재용씨 남매에게 넘긴 행위에 배임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하면, 이 회장의 공모 혐의에 대한 수사가 한층 힘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항소심에서 무죄가 날 경우 이 회장에 대한 수사가 급격히 힘을 잃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에 반해 조기 결정론은 항소심 선고 전에 이 회장에 대한 조사를 마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항소심에서 무죄가 나면 대법원의 최종 판결까지 기다려보자는 주장이 검찰 안에서 힘을 얻게 되고, 여기에 대법원도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선고를 차일피일 미루는 상황이 더해지면 결국 수사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가급적 빨리 이 회장에 대한 조사를 마쳐야 한다는 논리다.

신중론은 주로 검찰 수뇌부에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사정에 정통한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삼성에 대한 수사는 정치·경제적인 파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검찰 수뇌부로서는 자신의 임기 중에 처리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이 때문에 수사팀에 신중한 조사를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삼성 쪽은 검찰의 이런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삼성은 참고인으로 출석할 것을 통보받은 실무자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소환에 응하지 않는 등 검찰 수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수사팀 관계자는 “삼성 관계자들이 소환에 응하지 않다가 체포영장을 청구하겠다고 협박하면 그제야 나온다”고 말했다.

삼성의 이런 태도는 시간을 끌수록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에버랜드 2차 수사를 전담해온 이원석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 검사가 올여름 정기 인사 대상인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2년 이상 서울중앙지검에 근무한 검사들을 지방검찰청으로 전보시킨다는 원칙을 마련했는데, 이 검사가 그 대상에 포함된다. 이 사건의 수사 기록이 검찰 조사 내용만 2만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기 때문에 만약 수사 검사가 바뀔 경우 사건 내용을 숙지하는 데만 3개월 이상이 걸린다. 수사 검사가 바뀌면 수사가 다시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서울지검은 올 2월 3차장과 금융조사부 부장이 교체된 뒤 기록 검토를 이유로 애초 목표보다 3개월 가까이 수사 일정을 늦췄다.

항소심 둘러싼 검찰과 삼성 간의 공방

항소심을 둘러싼 검찰과 삼성 쪽의 공방도 치열하다. 수사팀은 1심이 대법원 판례에 충실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뒤집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실제 대법원은 2001년 9월28일(사건번호 01도3191) 비상장회사가 전환사채를 시세보다 낮게 발행한 것을 업무상 배임죄로 처벌하는 판결을 했다. 수사팀 관계자는 “항소심이 1심을 뒤집으려면 대법원 판례를 깨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면 삼성 쪽을 대리하고 있는 김&장 소속 변호사들은 “전환사채 발행이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실을 끼친 게 아니기 때문에 업무상 배임이 될 수 없다”며 무죄에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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