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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아버지도 응원하던 그 클럽!

등록 2006-06-22 00:00 수정 2020-05-02 04:24

축구도시를 찾아서 ③ 런던

“마누라는 바꿔도 지지 팀은 절대 못 바꾼다”는 영국 남자들의 문화… 언론재벌 머독의 참여로 프리미어리그 성장했지만 상업화 폐해도 심각

▣ 런던·뉴몰든=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무적 함대’ 첼시의 2005~2006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한 ‘축구 종가’ 영국은 정적에 빠져 있었다. 한 해 축구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을 맞는 여름철은 유럽 프로 구단 직원들이 사실상 휴가에 접어드는 시기다. 지난 시즌 ‘초롱이’ 이영표가 주전으로 활약했던 토트넘 홋스퍼의 홈구장 하트레인 파크를 가려면 ‘언더그라운드’라 이름 붙은 런던 지하철(빅토리아선)을 타고 세븐 시스터스 또는 토트넘 헤일 역에서 내려야 한다.

5월22일 이 찾은 하트레인 파크는 찾는 이 없이 한산했다. 구단의 홍보 담당자 시몬 펠스타인은 “모든 선수와 코칭 스태프가 휴가를 떠나 자리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선수들의 거친 태클을 받아낸 잔디는 재이식을 위해 모두 벗겨져, 그라운드는 철 지난 백사장처럼 썰렁했다.

노동자팀으로 출발한 영국축구의 역사

영국 축구의 상징 도시는 FC 리버풀과 에버튼을 보유한 비틀스의 도시 리버풀과 ‘맨유’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보유한 맨체스터지만, 축구 구단의 수와 질을 따져볼 때 영국을 지배하는 도시는 단연 수도 런던이다. 런던을 연고로 한 팀은 영국 축구협회에 등록된 92개 클럽팀 가운데 무려 12개로, 그 가운데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팀은 첼시·아스널·토트넘·웨스트햄 유나이티드·찰턴 애슬레틱 등 5개나 된다.

축구 시즌이 끝난 런던 시민들의 관심은 2006년 월드컵에 나선 잉글랜드 대표팀의 동향으로 옮겨져 있었다. 영국 시민들이 출퇴근길에 즐겨 보는 무료 신문 는 웨인 루니의 월드컵 출장 여부에 대한 대표팀 선수들의 발언을 매일 큼지막한 활자로 뽑아 보도했고, 영국의 ‘펍’(pub)이라 불리는 선술집들은 “우리 가게에서 축구를 보라”며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예선 경기 일정을 메뉴판에 새겨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영국 축구의 전통은 국가대표 경기가 아닌 자신이 지지하는 지역 연고팀의 깃발 아래서 제대로 발휘된다. 런던 교외의 한인 타운 뉴몰든에서 만난 리처드 래디스는 “한국인들은 영국 사람들의 축구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에서 축구는 삶 그 자체거든요.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사람의 증조할아버지나 할아버지 때부터 지지해온 클럽이 있습니다. 영국 남자들은 마누라는 바꿔도 지지하는 축구팀은 절대 바꾸지 않습니다.” 한국의 프로축구가 전두환 군사정권의 3S정책과 대기업의 홍보 전략이 맞아떨어져 태어난 사생아라면, 영국에서의 축구는 시민들의 삶 속에 녹아든 생활 그 자체다.

북런던을 연고로 2005~2006 시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팀 아스널의 역사를 살펴보면 영국인들의 축구 사랑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영국 축구를 대표하는 최고 명문팀 가운데 하나로 성장한 아스널의 모태는 1886년 월위치에 있는 로열 아스널 병기창의 노동자들이 조직한 축구팀이었다. 아스널과 쌍벽을 이루는 명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랭커셔주와 요크셔주를 가로지르는 철도 노선의 노동자들이 ‘뉴턴 히스’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축구 클럽이 모태가 됐다. 우리로 치면 울산 지역 조선 노동자들의 조기축구단이 성장해 울산 현대로 자라나고, 포항 지역 제철소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동네 축구단이 포항 스틸러스로 성장한 셈이다.

프리미어리그 중계방송, 공중파론 볼 수 없어

축구는 왜 영국의 국기로 자라났을까. 19세기 말 산업화로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이 줄어들자 노동자들은 토요일 오후를 보낼 격한 운동을 원하게 됐다. 여기에 노동자들에게 온정적인 정책을 펴던 고용주들이 나서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축구 클럽에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85년 축구 선수 가운데 실력이 뛰어난 몇몇은 공장 일을 면제받는 대신 전문적으로 축구만 하는 프로선수가 됐고, 1888년 12개 팀이 모여 1년 내내 홈 앤드 어웨이 형식으로 경기를 펼치는 축구연맹이 창설됐다. 아스널은 1891년 런던 시니어컵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지역의 강호로 자리잡았고, 선수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최초의 런던 축구 클럽이 됐다. 초기 런던 축구협회는 “선수들에게 급료를 주는 것은 축구의 아마추어리즘을 해칠 수 있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이제 한때 자기 공장의 동료였던 선수가 그라운드를 누비며 멋진 골을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 이들이 광적인 축구 서포터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영국 시민들의 사랑을 담뿍 받고 성장한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리그로 성장해 존경받고 있다. 지난 6월8일 발간된 를 보면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2003~2004 시즌 동안 20억유로를 벌어들여 11억5300만유로를 벌어들인 이탈리아 세리에A와 독일 분데스리가(10억5800만유로) 등을 크게 따돌렸다.

그러나 런던의 많은 축구 전문가들은 “프리미어리그의 지나친 상업화가 영국 축구 발전에 커다란 짐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1980년대 내내 부진의 늪을 헤매던 영국 축구가 산업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1992년 위성 케이블 채널과 중계권료 계약을 맺으면서부터다.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BSkyB(British Sky Broadcasting) 등은 프리미어 경기의 독점 중계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6억7천만파운드(1조2천여억원)를 축구 산업에 쏟아부었다. 영국 공중파에서는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볼 수 없고, TV 뉴스에서나 잠깐씩 하이라이트 장면을 즐길 수 있을 뿐이었다.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려면 한 달에 최소 30파운드(6만원 정도)가 넘는 요금을 따로 내야 한다. 티켓 값도 천정부지로 올라 가장 비싼 시즌 티켓을 사려면 1천파운드(180만원) 이상의 고액을 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단 사이의 양극화, 축구를 재미없게 한다

숀 해밀 런던대 버벳 칼리지 축구 지배구조 연구센터 교수는 “자본이 축구 산업에 쏟아지면서, 구단 사이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축구 구단은 매출액은 크지만 92개 클럽 가운데 절반인 36개 클럽이 재정난에 빠져 있다. “많은 그룹들이 매출액은 큰데 수익 구조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상장기업인데도 회계장부가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축구협회는 이를 규율하고 있지 못하죠. 소액주주들의 희생 위에서 대주주들이 배를 채우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거든요.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질수록 클럽 사이의 실력 차가 커져 리그는 상위 몇 개팀 사이의 대결이 아니면 볼거리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그건 자멸의 길이죠.” 런던의 축구 전문가들은 동료들을 위해 흥겹게 응원가를 부르던 공장 노동자들의 안온한 축구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는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길을 지나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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