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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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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크는 왜 오지 않았나

등록 2006-05-19 00:00 수정 2020-05-03 04:24

사상 최고치 고유가에도 국내 물가가 안정세를 보이는 이상한 수수께끼… 석유의존도 약화와 원-달러 환율하락 등 요인으론 딱부러지게 풀리지 않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국제 유가의 고공행진은 최근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현상이 아니다. ‘유가 쇼크’는 이미 지난 2004년 5월부터 나타났다. 두바이유가 배럴당 38달러를 넘어선 그때 “지금의 국제유가는 미친(mad) 수준”(당시 석유수출국기구 의장 유스기안토로)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배럴당 50달러를 넘으면 3차 오일쇼크에 빠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국내 물가 수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견고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경제성장률 역시 고유가의 직격탄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착시 현상? 세계화 흐름?

실제로 2004년의 경우 국제유가 상승률(두바이유 기준)은 33.64%(연평균)였는데, 경제성장률(국내총생산 증가율)은 4.7%, 물가상승률은 3.6%에 그쳤다. 2005년에도 국제유가는 49.37%(연평균)나 올랐지만 경제성장률은 4.0%, 물가는 2.7% 증가에 머물렀다. 올 1분기에도 유가는 58%나 올랐는데 경제성장률은 6.2%, 소비자물가는 2.3% 상승에 그쳤다.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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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럴당 70달러에 육박하는데도 왜 아직도 고유가가 경제 지표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일까? 최근 전문가들은 이를 한국 경제의 ‘고유가 수수께끼’ 또는 ‘물가 수수께끼’ 현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이 이 퍼즐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속시원한 분석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국제유가가 2003년 이후 4년 연속 두 자릿수 이상의 증가율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고치를 깨고 있음에도 소비자 물가는 2∼3%대의 안정세를 유지하는 건 단순한 ‘착시 현상’이라는 말도 나온다. 즉, 체감 물가는 높은데도 정부가 발표하는 지표 물가는 낮은 착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통계치를 의도적으로 마사지한 것이 아닌 한 착시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각에서는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세계화 흐름’에 있다는 말도 한다. 전세계 경제의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착시 현상이나 세계화 주장은 별다른 근거 없이 제기되는 설명일 뿐이다.

아무튼 기름값이 너무 비싸 자동차를 못 타고 다니겠다고 운전자들이 아우성을 치거나 대형 승용차 대신 연비가 높은 소형차를 구입하려고 줄 서는 풍경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04년 당시에도 유가가 40달러까지 오르면 국내 경제성장률이 1.2%포인트 이상 감소하고 물가는 1.2%포인트 정도 오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뜻밖으로 물가는 안정세를 유지하고, 수출 역시 지난해 연간 12% 성장하고 올 1분기에 10.7% 성장하는 등 호조세가 지속되고 있다. 고유가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당장 본격화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우선 ‘실질유가’를 따져봐야 한다. 명목유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러나 물가 변화를 감안한 실질유가 개념으로 살펴본 국제 유가는 과거 1, 2차 오일쇼크 때만큼 높은 수준은 아니다. 현재의 실질유가는 과거 최고치였던 2차 석유파동 당시의 절반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두바이유의 명목가격 배럴당 60달러는 실질가격으로 5만5400원으로, 2차 석유파동 당시의 실질가격 최고치인 8만8600원(1980년 1월)의 62.5%에 해당한다. 이처럼 실질가격으로 볼 때 최근의 고유가는 오일쇼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높은 수준은 아니다. 이를 감안하면 유가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물가나 국내총생산에 위험 수준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현재 유가는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사실 1990년대의 저유가 지속은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석유 덜 사용하는 IT산업의 급부상

우리 경제의 ‘석유 의존도 약화’ 역시 고유가 충격을 줄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유가 수준을 물가 수준과 석유소비 의존도를 함께 반영한 ‘실질실효가격’으로 따져보면 올 1분기 두바이유 평균가격은 1차 오일쇼크 때의 82.5%, 2차 오일쇼크 때의 48.8%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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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구조 변화와 석유 소비 효율화에 따라 고유가가 경제에 미치는 쇼크가 줄어든 것이다. 한국 경제에서 수입에너지 중 석유 수입 비중은 1994년 65%에서 2004년 45%로 줄었다. 실질 국내총생산에서 원유수입규모(배럴)가 차지하는 비중도 1998년 1.68에서 2005년 1.17로 줄었다. 한국 경제가 유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내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석유영향력 계수’(실질유가 및 경제의 석유의존도를 이용한 지표)를 통해 각 시점의 명목유가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해볼 수도 있다. 유가가 최고점을 기록했던 1980년 1월의 석유영향력 계수를 100으로 잡았을 때, 현재 두바이유 명목유가 60달러는 석유영향력 계수 53.7에 해당한다. 즉, 현재의 유가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제2차 석유파동 당시의 절반이 약간 넘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LG경제연구원 배민근 연구원은 “경제 성장에 따라 우리나라 1인당 석유소비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80년대 중화학·철강·조선 등 석유의존도가 높은 경제에서 200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석유를 덜 사용하는 전자·전기·정보기술(IT) 산업이 새롭게 급부상하면서 고유가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약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총생산 대비 석유투입량을 보면, 2차 오일쇼크 때인 1980년에 100만원어치 생산하는 데 1.3배럴 정도 썼는데 80년대 중반 저유가 호황 때 0.8배럴로 떨어졌다가 지금은 1배럴 정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석유수입량은 예전과 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에너지 측면에서 산업구조가 효율화된 반면, 자동차가 대폭 증가해 석유수입량은 과거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 중소기업은 아직 석유 소비가 효율화된 것이 아닌 만큼 우리 경제가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에서 IT 경제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LG경제연구원 배민근 연구원은 “미국을 제외한 여러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에서는 1인당 석유소비량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높은 소득 증가세와 더불어 1인당 석유 소비도 계속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고유가 충격을 완화하는 또 다른 요인은 ‘원-달러 환율 하락’이다. 원-달러 환율은 최근 달러당 930원마저 붕괴돼 1997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환율 하락은 수입물가(원자재 가격)를 떨어뜨려 소비자물가 하락 효과를 낳게 된다. 고유가와 원화 가치 절상(환율 하락)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유가 상승분을 환율이 일부 흡수하고 있는 셈이다. 2005년의 경우 환율 하락에 따른 물가 하락 효과는 2.1%포인트인 반면, 유가에 의한 물가 상승 효과는 0.9%포인트로 나타났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쪽은 “환율이 이미 적정 수준을 넘어 고평가(원화 가치 절상)된 상황에서 유가의 추가 상승은 경기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추가적인 원-달러 환율 하락이 기업 채산성을 악화시키고 수출 부진을 초래해, 고유가와 겹쳐 더욱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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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원-달러 환율 하락이 고유가 충격을 일부 흡수하기도 했지만, 이제부터는 ‘악영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 원-달러 환율 하락은 유가 충격 흡수, 물가 안정 등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수출 감소 등 부정적인 영향을 낳게 된다. 결국 환율이 고유가 충격을 흡수하는 것도 제한적일 뿐이다.

어딘가 부러진 고리가 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유가 상승 기간’을 들 수 있다. 최근의 고유가 현상은 1, 2차 오일쇼크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제유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하고 있지만 1, 2차 오일쇼크 때처럼 중동지역 컨트리 리스크(지정학적 위험)에 의해 ‘공급 충격’으로 갑자기 폭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인도·브라질 등 신흥시장에서 ‘수요 증가’에 따라 점차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유가가 ‘지속적으로 그러나 천천히’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유가가 갑자기 당장 배럴당 100달러로 오르면 충격이 엄청 크겠지만, 시간을 두고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에 충격이 덜한 편이다. 또 국내총생산은 계속 상승하고 있으므로 유가가 올라도 그만큼 부담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원유 도입 시차’를 고려해볼 수도 있다. 대체로 원유 선물거래 등을 감안할 때 국제유가 수준이 국내 경제성장률에 본격적으로 반영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게 잡아도 대략 3∼4분기 뒤다. 그러나 이미 2004년부터 유가가 오르기 시작했으므로 국내 경제에 주는 충격은 이미 도달했어야 한다. 결국 시차로는 이상한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삼성경제연구소 곽수종 수석연구원은 “고유가가 우리 경제에 아직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수께끼 현상을 따져보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뾰족한 해명을 할 수 없었다. 우리 경제 전반에 걸쳐 어떤 시스템이 파괴됐거나 어딘가 부러진 고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며 “혹시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이런 현상의 배경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고유가가 부동산 가격 낮출까

금리 인상 거쳐 효과 나타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영향 적을 듯

고유가 현상은 국내 경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그중 하나로 ‘부동산 가격’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따져볼 수 있다. 우선 고유가가 미국의 부동산 가격에 미치는 영향부터 살펴보자.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부동산 거품의 원인으로는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 현상이 꼽힌다. 물론 부동산 가격 상승은 부의 효과(Wealth Effect)를 통해 소비를 증가시켰고, 경기 활성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국제유가 급등에 의한 인플레이션 압력은 이런 호순환을 무너뜨리는 방아쇠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원자재 가격(유가)이 올라감에 따라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고, 통화당국은 물가상승 압력을 줄이기 위해 금리를 올릴 공산이 크다. 물론 금리 상승은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국제유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미국 금리가 큰 폭으로 오르고 있는 건 아니다. 그 이유는 정보기술(IT) 호황이 끝난 뒤 경제의 침체를 막으려고 미 연방준비제도위원회가 적극적으로 금리를 올리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유가 급등이 금리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이 계속 무시될 수 없는 상황이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유가 급등에 따른 금리 인상 압력을 받고 있다.
특히 유가 상승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상수지 악화를 초래한다. 이는 미국으로 유입되는 아시아 자금을 감소시킨다. 그러면 이 역시 실질금리를 상승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금리가 올라갈 경우 소비자는 더 많은 이자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결국 신규 주택 수요가 줄어들고 기존 주택 소유자들이 더 이상 부동산을 보유하기 어려워지면서 부동산 가격은 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LG경제연구원 이서원 책임연구원은 “한국은 미국과 달리 고유가 방아쇠가 금리 인상이라는 고리를 거쳐 부동산 거품을 꺼지게 하는 데 큰 변수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은 최근의 원-달러 환율 하락 추세가 고유가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흡수하고 있다. 그리고 자동차의 경우 미국은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대형차 위주라서 고유가가 즉각 물가 상승 압력으로 나타나지만 중·소형차가 많은 한국은 미국에 비해 충격이 덜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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