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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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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노조를 용서할 수 없다”

등록 2006-03-01 00:00 수정 2020-05-03 04:24

양승민씨를 설득해 “비리 가담” 고백 받아낸 이갑용 울산 동구청장
“현대중공업 해고자로서 복직투쟁 벌인 뒤 노조 바로세우기에 나설 것”

▣ 울산=글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이갑용 울산 동구청장은 현대중공업 해고 노동자다. 1990년 4월 그는 경찰의 강경 진압을 피해 현대중공업 노조비상대책위원장(현 울산동구청장)의 신분으로 노조원 100여 명을 이끌고 82m 높이의 크레인에 올라가 13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그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로 3번의 구속과 4번의 해직을 겪었으며,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을 거쳐 권영길 민주노동당 전 대표 이후 민주노총을 이끌기도 했다. 양승민씨를 설득해 “현대중공업 노조 입찰 비리에 가담했다”는 고백을 받아낸 그는 “회사가 선전하는 무파업 노조 12년 신화의 뒷모습에서 병들어 썩은 오늘의 현대중공업 노조를 본다”며 “이번에 불거진 노조 비리 파문을 계기로 현대중공업 노조가 환부를 도려내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노민투를 중심으로 한 이권 나누기

현대중공업 노조 20년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을 텐데, 안타깝게 다시 비리 추문이 터져나왔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현대중공업 노조는 사실상 운동의 활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회사는 노조와 조합원들을 잇는 대의원들을 하나둘 장악해나갔다. 회사는 협조적인 어용 대의원들을 다양한 혜택을 내걸고 길들여나갔다. 노동자도 사람인 이상 그런 유혹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비리 파문은 “노조가 썩었다”는 차원에서 다뤄지기보다는, 회사의 집요한 노동자 길들이기 전략의 폐해로 이해해야 한다.

회사의 노조 장악 과정은 어떠했나.

=현대중공업 노조가 태어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다. 처음에는 회사 입장에서도 노조 관리의 노하우가 없었고, 젊은 노동자들에게도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었다. 이후 회사 쪽에서 조합원 전체를 관리하는 것보다 몇몇 대의원들을 관리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대의원들을 하나하나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게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은 두세 명의 대의원을 빼고는 모두 회사 쪽에 달라붙은 어용 대의원이 됐다.

이제 선거에 출마해도 민주 활동가들의 당선이 불가능해졌다. 현장 활동가들은 지쳐 있는 상태다. 지금 비리 파문에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들 모두와 20대 때부터 생활을 같이해왔다. 그 사람들의 순수했던 젊은 시절 모습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버린 사람들이다.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이 끼친 해악이 너무 크다.

파악한 비리는 무엇인가.

=회사가 노조에 직접 돈을 줄 수는 없다. 결국 간접적인 지원인데, 회사 쪽에 협조하는 노조를 위해 자기들끼리 먹고살 수 있도록 충분한 이권을 주는 것이다. 회사 쪽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노동자 민주혁신 투쟁위원회’(노민투)가 만들어진 게 2001년 11월부터다. 비리의 핵심은 노민투다. 애초 노조에 활력이 있을 때는 노민투 같은 어용조직은 만들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민투가 대의원의 절대 다수를 장악하게 됐다. 대의원들은 모두 노민투 회원이라고 보면 된다. 노조가 쥔 이권은 후생관, 오토바이 수리점, 자판기 등이다. 노민투를 중심으로 한 노조 운영위원들이 입찰을 희망하는 업자들에게 금품을 받고 입찰 서류 조작 등 부정을 일삼았다. 후생관은 누구 몫, 오토바이 수리점은 누구 몫, 자판기는 누구 몫 등 이권이 다 정해져 있다.

박일수 분신 때 그들은 무얼 보여줬나

2002년 비리는 민주노조 쪽에서 터져나왔다.

=물론 그렇다. 그 부분에서는 민주노조 쪽에서도 할 말이 없고, 그에 따라 지난 2002년 노조 집행부가 총사퇴를 했다. 당시 사건은 회사 쪽에서 민주노조를 와해하기 위한 공작에 당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는 중이다. 지금 불거진 노조 입찰 비리는 과거와 달리 매우 조직적이고 만성화됐다는 특징이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자본의 유혹 없이 노동자가 비리에 연루되는 일은 없다고 본다.

어용노조의 가장 큰 폐해는 무엇인가.

=어용노조가 들어서면서 일터에서 사람 냄새가 사라졌다. 비리주범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순수했던 사람들이 도박과 여자와 술에 빠져 폐인이 됐다. 돈 밖에 모르는 인간, 시키는대로 일만 하는 기계, 회사의 감시를 내면화하는 비인간적인 풍경이 현대중공업의 현실이다. 매년 현대중공업에서 20명이 넘는 사람이 산업재해로 죽어나간다. 옆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어제 죽었는데도, 이제는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번 흘리고 깨끗이 잊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메말랐다. 사람이 죽으면 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 배상과 노동환경 개선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망한 노동자 가족에게 지급하는 보상비가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비용보다 커져야 회사 쪽에서도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을 것이 아닌가. 지금의 노조 집행부는 회사 앞에서 가족들 억누르고 회사 편을 든다. 사망 사고가 터지면 오히려 노조에서 쉬쉬하는 모습이다. 싸울 의사가 전혀 옆다. 산재가 많이 터지고 근골격계 질환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노조가 제구실을 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얘기할 데가 없다.

2004년 하청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려며 분신한 노동자 박일수씨 사건 때 현대중공업 노조가 보여준 모습들이 두고두고 회자된다.

=박씨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 아픈 일이다. 노조에서는 그 죽음에 대해 “무슨 열사냐. 인정 못한다”는 태도를 보인 데 이어, 추모식장에 들이닥쳐 행사를 방해하며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해고 노동자 신분을 유지한 채 복직되지 않은 동료들을 보상금을 주고 회사에서 잘라내는 데 앞장섰다. 이런 일들로 현대중공업 노조는 민주노총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했다.

이후 회사는 박 열사의 가족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한 약속을 대부분 지키지 않았다. 지난 2월14일 박 열사의 사망 2주년이라고 추모식을 열었는데, 회사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밖에서 추모식을 마쳤다. 정규직 노조가 투쟁을 함께했으면, 그 죽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예전보다 훨씬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 집행부가 내세우는 ‘노사 상생경영’이라는 주장이 호응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회사는 사상 최대의 매출과 흑자를 내지만, 노동자는 산재로 죽고 비정규직은 분신으로 죽고 출근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근골격계 질환은 늘어만 간다. 상생에서 노동자들의 ‘생’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 노조창립일에 몇십억을 들여 연예인을 부르고 사장과 노조위원장이 러브샷을 연출하면 보수언론들은 그걸 일제히 띄운다. 일본의 예가 자꾸 거론되지만, 일본의 노조들은 회사쪽이 제공하는 떡고물에 길들여져 더 이상 투쟁이 활력이 없다. 이따금 터져나오는 노조의 비리 추문을 보면, 우리도 점점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사쪽의 횡포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건전한 노조가 필요하다.

울산 동구는 현대와 정몽준의 공화국

현대중공업의 노무 관리는 ‘정치인 정몽준’과 겹쳐 더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 같다.

=그렇다. 보통 회사에서 노동자는 그저 회사의 직원일 뿐이다. 그렇지만 현대중공업 관리자에게 노동자는 정몽준 의원에게 한 표를 던지는 유권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회사의 테두리를 넘어서까지 노동자 관리가 진행된다. 구청장을 해보니까, 모든 조직에서 회장이나 총무들은 모두 현대중공업 직원이다. 회사 밖에서 작동하는 정몽준 사무국이 학교운영위원회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울산 동구가 현대와 정몽준의 공화국으로 변해 있다.

이후 계획은.

=노동자로서 노조 바로세우기에 전력투구할 예정이다. 일단 복직 투쟁을 벌여 조합원 자격을 다시 얻겠다. 회사에 길들여진 노조를 뒤엎고, 패배주의에 길들여진 활동가들을 다시 깨워 새로운 민주노조를 재건해야 한다. 해방정국에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활동을 하셨던 여든이 넘은 이수갑 선생님께서 노동운동의 본능은 자본가와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어려울 때일수록 노동자로서 본능에 충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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