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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두산 판결’의 비밀은

등록 2006-03-01 00:00 수정 2020-05-03 04:24

10배 적은 횡령사건엔 실형 선고해놓고 박용성·박용오 일가엔 집행유예
피고인 쪽 변호인단에 담당 재판장 고교 동문들이 상당수 포진했다는데…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결함을 내포한 판결이었기에 사법부의 수장이 그런 정도의 수위로 비판했을까?

이용훈 대법원장이 지난 2월9일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판결”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 사실이 2월17일치 <동아일보> 보도로 뒤늦게 알려지면서 파문을 일으킨 빌미는 ‘두산그룹 비자금 사건’ 1심 판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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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한 장물을 되돌려놓았다?

서울중앙지법 합의21부(부장판사 강형주)는 대법원장의 발언이 나온 전날, 286억원을 횡령하고 2797억원에 이르는 분식회계를 일삼은 박용오·박용성 전 회장 등 두산그룹 총수 일가에게 집행유예(징역 3년) 판결을 내려 빈축을 샀다. 이 재판부는 지난 1월27일에는 두산 사건과는 아주 상반되는 판결을 내놓은 바 있다. 이아무개씨의 돈 23억3천만원(14억3천만원 회수)을 횡령한 정희종 (주)씨팍스 대표에게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 것이다. 두산 사건 판결이 내려진 날 서울동부지법은 최아무개, 김아무개씨 등 5명한테서 모두 6550만원을 편취 및 횡령한 부동산 컨설팅업체 김아무개씨에게 사기 및 횡령죄로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범죄 액수로 보아 10배, 400배씩 많은 쪽에 더 가벼운 벌을 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대법원장이 고등법원 부장으로 승진한 지방법원 부장판사 19명을 서울 한남동 대법원장 공관으로 초청해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한 것으로 알려진 발언에는 이런 대목도 들어 있었다. “남의 집에 들어가 1억원어치 물건을 절도한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하지 않는 판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놓고 200억, 300억원씩 횡령한 피고인들에 대해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하면 국민이 어떻게 수긍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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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재판부는 이런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판결문의 ‘양형 이유’에서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판결문은 ‘피고인 박용성’에 대한 양형 이유에서 “죄질이 매우 무거워 엄중한 처벌이 요구된다”면서도 “피고인을 비롯한 대주주들이 횡령금 전액(286억원)을 각 회사로 반환한 점을 참작해 형 집행을 유예한다”고 밝혔다. 도둑질한 돈을 제자리에 갖다놓았으므로 처벌 수위를 낮췄다는 것이다.

몇몇 변호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횡령한 돈을 사후에라도 갚았을 경우 정상참작한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었다. 따라서 횡령한 돈을 변제하지 않은 경우와 두산그룹 사건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가능할 듯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선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변제의 시기다. 사건이 바깥으로 불거지기 전에 도둑질한 돈을 일찌감치 되돌려놓은 경우와 그렇지 않고 문제가 터진 뒤에야 마지못해 슬그머니 갖다놓는 것은 법원 판결 때 천양지차로 여긴다는 게 법조계에선 상식으로 통한다. 두산그룹의 사례는 어떨까?

박용오 전 회장이 동생인 박용성 전 회장의 비자금 혐의 사실을 검찰에 알려 두산그룹 사태를 촉발한 게 지난해 7월21일이었고, 두산그룹 쪽에 확인한바 총수 일가의 횡령액 변제는 그해 8~11월에 이뤄졌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횡령액을 미리 갚은 게 아니라, 도둑질이 들통날 것 같으니 뒤늦게 돈을 도로 갖다놓은 것이다. 더욱이 두산 총수 일가가 도둑질한 돈을 100% 온전하게 되돌려놓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법조계의 상식에 비춰본다면 정상을 참작해 처벌 수위를 턱없이 낮춰주기엔 죄질이 나쁘다. 그런데도 판사 경력 20년을 훨씬 웃도는 담당 판사는 어떤 생각으로 집행유예를 내려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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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회계 뒤늦게 고백했다고 정상참작

횡령액 변제와 함께 분식회계 사실을 자진 고백한 것도 두산 총수 일가에 집행유예를 내려준 정상참작의 사유로 꼽혔는데, 이 또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두산 쪽이 무려 2797억원에 이르는 분식회계 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지난해 8월8일로 역시 박용오 전 회장 쪽이 내부 비리를 터뜨린 지 한참 뒤였다. 누가 보더라도 비리 폭로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자 마지못해 고해성사를 한 게 명백하다. 더욱이 2005년 3월 금융감독위원회의 ‘외부감사의 회계 및 감리에 관한 규정’ 개정으로 과거 분식 사실을 자진 고백한 기업은 감리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아주 희한한 장치로 금융당국의 제재도 피할 수 있는 처지였다. 사정이 이런데도 대기업 총수 일가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비판하면 재계는 ‘반기업 정서를 부추긴다’고 핏대를 세운다.

두산 사건의 판결문에는 주식회사 원리를 무시한 대목도 포함돼 있다. 박용성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내리는 양형 이유에서 재판부는 “(비자금 조성에 연루된) 동현과 세계물류는 비상장회사로서 전적으로 대주주 일가가 출자하여 설립한 회사”라는 점을 들었다. 동현과 세계물류는 두산 총수 일가가 비자금을 조성해 두산건설 유상증자 대금 등으로 써먹은 통로였는데, 100% 총수 일가의 자금으로 설립한 회사였으니 정상참작의 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회사는 주주 것이니 주주 맘대로 해도 된다는 식인데, 이는 주식회사의 한 측면만 보는 편협한 사고다. 비자금 조성으로 회사가 망하면 손해는 주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은행을 비롯한 채권단도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고, 종업원들은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린다. 두산 판결문은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만이 아니라, 채권단·종업원의 것이기도 하다는 주식회사의 기본 정신에서 벗어난다.

박갑주 변호사는 “일반인이 1억원 이상 횡령하면 무조건 실형이고, 10억원을 넘어가면 5년씩 실형을 선고받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일반인들에게는 실형을 내리면서 죄가 훨씬 무거운 대기업 총수 일가에겐 집행유예를 내리면 법 잣대에 대한 형평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꼭 두산을 옹호하는 처지가 아니더라도 기업인 범죄에는 감옥행보다 벌금을 무겁게 내리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렇지만 비자금 조성을 통해 회삿돈을 빼돌리는 행태가 만연한 국내 실정에선 벌금형이 총수 일가의 범죄를 예방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김영희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실행위원)는 “돈 많은 재벌에게 돈(벌금)을 더 내라고 하는 건 범죄의 재발 방지라는 형벌적 의미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반인의 정서를 떠나 법리적으로 보더라도 ‘유전무죄’ 시비를 불러일으킬 충분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 판결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법원의 충원구조 깨지는 게 근본과제”

이 대법원장은 “이 판결(두산 사건) 때문에 전관예우 논란까지 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는 두산 사건의 피고인 쪽 변호인단에 대법관 출신, 담당 재판장이었던 강 부장(현 광주지법 수석부장판사)의 고등학교 동문·사법연수원 동기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는 점과 맞물려 두산 판결에 대한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

‘돈 있고 힘 있는’ 이들에 대해 엉터리 판결이 이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전관예우 이상으로 법관의 충원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사법고시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이들로만 채워지며 ‘기득권 동맹’을 만들어내는 법관 구성의 편협성 탓에 다양한 의견과 상식을 반영하는 판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갑주 변호사는 “대법원장의 발언은 이런 관행에 충격을 준 것으로 본다”며 “점수와 서열 중심으로 이뤄지는 법관의 충원 구조가 깨지는 게 근본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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