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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하이스코 분쟁 제2라운드

등록 2005-11-09 00:00 수정 2020-05-02 04:24

이유없이 해고되고 교섭 거부당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크레인 농성 전말
극적인 타결 이뤄냈지만 사쪽이 마음만 먹으면 확약서는 휴짓조각 될 판

▣ 표주연/ <민중의 소리> 기자

11월3일 새벽 극적인 타결로 이어질 때까지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킨 현대하이스코(옛 현대강관)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61명의 크레인 농성 싸움은 지난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달 13일, 현대하이스코의 10개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 124명은 ‘전국금속노조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당시 비정규직 노조가 내건 요구는 노조 인정과 노동 3권 보장, 노동조건 개선이었다.

120명에게 온 죽음의 문자 메시지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7년 동안 3조 3교대로 일하면서 한 주에 60~70시간을 일하면서 기본급으로 75만원을 받았다. 각종 복지 조건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언제 해고될지 몰라 전전긍긍한 삶. 이것이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정직과 대기발령, 협박이었다. 비정규직 노조 박정훈 지회장은 “노조에 가입한 사람을 멀리 근무지를 이동시키거나 탈퇴를 종용하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며 “이 과정에서 조합원의 부모님이 쓰러지고 아내가 유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노조 결성을 앞뒤로 한 6~7월, 현대하이스코와 각 하청업체 사장단들은 단 한 번도 비정규직 노조가 요구하는 교섭에 응하지 않은 채 태광계전, 금산, 우성산업, 한일기업 등 4개 하청기업을 차례로 폐업시켰다. 조합원 수가 많은 순서대로였다.

회사 쪽은 이를 ‘경영상의 이유’라고 설명했다. 폐업 소식은 각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폐업했으니 출근할 필요 없다”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통해 전해졌다. ‘죽음의 문자 메시지’는 모두 120명에게 전달됐다. 그 뒤 현대하이스코는 “하청 노동자들의 교섭에 원청이 응할 이유는 없다”는 논리로 대화의 창을 닫았다. 순천시의회가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순천시장이 중재에 나섰지만 현대하이스코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 모두가 ‘합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속연맹 법률원의 박훈 변호사는 “현대하이스코가 교섭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이 해고된 상황 등이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이게 비정규직의 설움”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조충훈 순천시장이 “하이스코 쪽에 법적인 문제보다 사회적·도덕적 책임을 주지시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황은 130일 가까이 계속됐으며, 결국 120명의 해고자 중 61명이 10월24일 새벽 1시 공장 크레인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튿날 순천지역 노동자 5천여 명이 공장 앞에 모여 전경버스 3대를 전소시키고 공장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를 두고 순천에서 만난 노동조합 관계자들은 ‘필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농성 중인 공장의 전원을 차단하고 음식물과 식수 반입을 가로막는 현대하이스코의 조처가 노동자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이다. 순천에서 만난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은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우리 요구 중에 양보할 것이 있으면 양보하면 되는데, 단 한 번도 교섭조차 못하고 이 상황까지 왔다는 게 억울할 뿐”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순천은 하이스코 공화국”

결국 이 시위는 다음날 조간신문을 크게 장식하면서 현대하이스코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전국화하는 데 일조했다.

농성 뒤 각계 인사들이 공장으로 달려와 중재를 자청했으나 대부분 헛물을 마셔야 했다. 회사 쪽이 공장 진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현대하이스코 공장 앞에서 발길을 돌린 인사들만 순천시의회, 순천시장, 국가인권위,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 단병호·심상정·이영순 의원, 열린우리당 서갑원 의원 등 20명에 이른다. 급기야 청와대에서 중재에 나섰지만 묵살됐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10월26일 순천에서는 관리직으로 구성된 구사대가 진압을 준비하고 이를 경찰이 가로막는 ‘해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현대하이스코가 공장 진입을 ‘허락’한 인사는 허준영 경찰청장뿐이었는데,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순천은 하이스코 공화국”이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왔다.

음식물과 식수 반입을 차단한 채 “교섭은 없다”는 완강한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현대하이스코와 시너 20여 병을 비축하고 “결사항전”을 되뇌었던 농성자들의 태도는 11일 동안 평행선을 달렸다. 이같은 상황이 극적으로 타결된 것이 11월3일 새벽 2시. 현대하이스코와 비정규직 노조가 ‘사내 하청업체는 폐업 등으로 인한 실직자들이 우선 취업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합의하고 4조3교대제 도입, 노조활동 보장 등을 골자로 하는 확약서에 조인한 것이다. 이 확약서는 해고자 재고용과 노동조합 보장을 이행하는 당사자로 사내 하청업체를 명시했지만 현대하이스코에 대해서도 “이행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한다”와 “이번 사태로 인한 민·형사상의 문제가 최소화되도록 건의”라는 약속을 명기하는 ‘진전’을 보였다. 또 이 확약서에서 비정규직 노조는 ‘점거 등의 사태에 유감을 표명하고 이번과 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한다’고 약속했다.

이 협약서에 대해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조 안영오 총무부장은 “확약서를 보면 복직에 대한 날짜 기한도 없다. 게다가 ‘구속자를 최소화하도록 건의한다’가 아니라 구속자가 나오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조합원들이 많이 아쉬워한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안 부장은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며 “이제 입장을 정리하고 사쪽이 협약을 이행하도록 강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도 ‘아쉬운 합의’라는 데 비슷한 의견을 보였다.

지난 27일 순천으로 급파돼서 사쪽과의 교섭을 주도해온 민주노총 양태조 정책국장은 “협약서 내용을 보면 기한도 명시돼 있지 않고 애매한 표현으로 채워진 것을 볼 수 있다”며 “중요한 것은 이 협약서를 강제할 법적 수단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양 국장은 그러면서도 “원청 사용자가 직접 교섭에 나와 서명한 것은 성과”라며 “이행만 제대로 된다면 우리로서는 바람직한 협상안”이라고 밝혔다.

다자간 협상이 비정규 교섭의 모델?

양 국장은 “이같은 합의는 앞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처리하는 하나의 모델이 될 것이다. 자본은 이후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다자간 협상 구도로 끌고 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현대하이스코와 노조가 작성한 협약서는 비정규직 문제에서 시작해 노조 인정, 노동조건 개선 등의 요구로 노조와 사쪽이 장기간 싸운 울산플랜트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협약서가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내용, 형식도 울산플랜트의 그것과 흡사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울산플랜트가 체결한 확약서에는 원청 사용자 대신 울산 상공회의소 회장이 대신 서명했다는 것뿐이다.

이처럼 울산과 순천에서 벌어진 교섭이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사쪽에서 ‘다자간 협상’을 비정규직 교섭의 모델로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하이스코는 노조원들과 교섭을 시작하자마자 “다자간 협상으로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사쪽이 이렇게 노조, 지역사회, 정부 등이 참여하는 형태의 다자간 협상을 선호하는 이유는 여기서 합의한 조항들은 ‘약속’일 뿐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현대하이스코와 비정규직 노조가 체결한 협약서에도 해당된다. 사쪽이 마음만 먹으면 확약서는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민주노총 양태조 국장은 “이제 1라운드가 끝난 것에 불과하다”는 말로 이같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쪽이 이 협약서를 이행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놓고 다시 한 번 노사 간 힘겨루기가 예고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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