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이 실패하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는 두려움이 합의를 이끌어
공동성명문을 추상적이고 모호한 언어로 작성해 근본적인 인식차 숨겨
▣ 전재성/ 서울대 교수·외교학과
경수로 제공 시점 등을 둘러싼 ‘행동 대 행동’의 첫 단계에서 불거진 북-미 사이의 갈등은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국제정치에서 모든 국가는 자국의 안보를 스스로 전담해야 하는 무정부 상태에 처해 있고, 특히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과 마주하고 있을 때는 더 조심할 수밖에 없다.
공동성명을 북-미 성명과 함께 살펴야
미국은 북핵 프로그램을 테러집단을 매개로 미국 본토와 국민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안보불안 요인으로 여기고 있다. 북한 역시 핵무기라는 최후의 안보보장 수단 없이 자신을 적대시한다고 판단하는 국가와 협력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느 쪽이 악의를 갖고 있지 않아도, 국제정치의 원리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해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는 것이다.
9·19 공동성명은 북-미 사이에 최종 목표의 합의 외에 다른 많은 논점들에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북-미가 합의한 핵 위기 해결의 종착점의 모습이 같다고 해서, 위기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실행 방법, 상호 조건 등이 같다고 보면 큰 오산이다. 그래도 4차 6자회담에서 원칙과 공약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것은, 첫째 이번 회담의 실패가 곧 걷잡을 수 없는 긴장과 대립의 악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모든 참가국이 잘 알고 있었고, 둘째 미국과 북한, 한국 모두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합의를 간절히 필요로 했으며, 셋째 6자회담의 실패는 동북아 세력 균형에서 각자의 이익에 득이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6자회담의 틀을 파괴함으로써 입는 손실을 줄여야 한다는 두려움이 최소한의 합의를 이끌어내게 한 것이다.
9·19 공동성명은 이후 북한과 미국이 발표한 성명과 한 묶음으로 보아야 그 내용이 명확해진다. 미국의 6자회담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발언들을 보면 좁히기 쉽지 않은 견해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사찰이나 경수로 제공 시기, 북-미 관계 정상화 조건과 시기 등에서 뚜렷한 대립을 보이고 있으며, 양쪽 모두 각 단계에서 상대방의 신뢰성을 철저히 따져가면서 한발한발 나아가겠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이 각자가 구상한 로드맵을 폐기한 채 공동성명에 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원칙을 실행하는 방법과 과정에 대해 각자의 복안을 이미 체계화된 형태로 가지고 있었으며, 합의가 어려운 부분들을 심중에 품은 채 추상적이고 모호한 원칙의 언어로 공동성명문을 작성한 것이다. 공동성명 발표 다음날부터 불거진 핵 폐기와 경수로 제공 순서를 둘러싼 대립은 단순한 실행 과정의 전술적 충돌이라기보다는 북핵 문제를 보는 양자간의 전략적 갈등의 한 양상이다. 많은 이들이 원칙은 합의됐고, 실행 단계의 문제점들에 관해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행 단계는 원칙상의 갈등과 연관돼 있고 시점의 문제는 전체의 해결 방식과 얽혀 있다. 이러한 갈등은 공동성명 조문의 표현과도 관련돼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 시점을 ‘at an early date’, 북한은 ‘머지않은 시기에’ 그리고 한국은 ‘조속한 시일 내에’라고 명기했다.
전술적 충돌이라기보다는 전략적 갈등
다른 뉘앙스를 가진 합의된 표현은 북핵 문제 실행 단계의 의견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전략적 선택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국가의 기본 목표 달성의 방법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성명은 미국과 북한 어느 쪽도 새로운 전략적 선택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최악을 피하기 위해 합의된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북한을 악의 축으로 간주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대북 정책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핵무기를 담보로 한 생존전략 자체를 수정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공동성명 이후 북한의 태도를 협상의 최대치를 향한 전술적 행보로 간주하고 있으나, 전략적 충돌을 보이는 북-미 사이에서 과연 어떠한 해결책을 또다시 마련해야 할지 많은 생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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