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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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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라운드걸, 성조기 휘날리며

등록 2005-07-12 00:00 수정 2020-05-02 04:24

6월28일 세계여자권투협의회(WBCF) 챔피언 타이틀전 현장사진 단독입수
깍듯한 예의 보이면서 부시 행정부에 '상응하는 매너' 보여달라는 메시지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한 바퀴 휙 감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한 라운드걸이 미국 성조기를 앞세우고 링 위에 올라섰다. 그 뒤를 미국 선수가 뒤따른다. <한겨레21>이 입수한 현장 사진에는 13개의 붉은색·흰색의 가로줄과 푸른 바탕에 50개의 흰 별이 선명한 성조기를 든 북한 라운드걸이나 그 뒤를 따르는 미국 선수 모두 긴장된 얼굴 표정이 생생히 묻어난다.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기립?

6월29일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핵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조-미 대결전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정세 속에서 관람자들도 조선을 고립, 붕괴시키려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증오 감정이 꽉 들어차 있다”고 링 주변의 긴장된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이런 숨막히는 긴장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곧 사그라졌다. 잠시 뒤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국 국가가 울려퍼졌다.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을 가득 메운 1만2천여명의 관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으로 보기 드문 모습이다. 북한 관람객들이 미국 국기에 대한 예의를 표시한 것이다.

평양에서 미국은 철천지원수의 나라다. 지금의 지긋지긋한 가난과 고통은 미국의 압살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이 일반 주민들의 골수에 박혀 있다. 그런데 지난 6월28일 평양에서 열린 세계여자권투협의회(WBCF) 챔피언 타이틀 경기에서 북한 관중들은 격한 감정을 억누르고 기립 몸짓으로 미국 국기와 국가에 존중의 뜻을 표시했다. 북한 여자 프로복싱의 간판 선수 김광옥(27·중앙체육학원) 선수와 미국의 이븐 카플스 선수가 맞붙은 라이트 플라이급(48.98kg) 타이틀 경기가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조선신보>도 “경기장을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메운 북쪽 관중들이 미국 국가가 연주되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성숙한 관람 매너를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수도인 평양의 하늘 아래 성조기가 펄럭이고 국가가 울려퍼진 게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미국인이 직접 성조기를 들고 평양 땅에 들어간 것도 이례적이다. 북쪽 사회자는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을 소개하면서, 미국과 일본 선수에게도 박수를 보내줄 것을 관중들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이렇게 보기 드문 깍듯한 매너를 보여준 걸까. 평양 관중들은 이번 경기에서 성숙한 관중 매너를 보여주면서 지난 4월 평양에서 열린 2006년 독일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시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얻은 관중 난동 불명예를 씻어내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속뜻은 다른 데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6월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 일행을 만나서는 “내가 이제 부시 대통령 각하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부시 대통령 각하를 나쁘게 생각할 근거가 없다”며 공개적인 구애를 내보였다. 그리고 “6자회담을 포기한 적도 없고 거부한 적도 없다. 다만 미국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기 때문에 맞서보려고 했던 것”이라며 “그러나 상대방이 우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7월 중이라도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부시 행정부에게 ‘상응하는 매너’를 보여달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그리고 이번 평양에서 열린 WBCF 챔피언 타이틀전에서는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미국의 상징인 국기와 국가에 대한 존중의 뜻을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 듯하다. 6자회담 재개가 초읽기에 들어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북한 지도부는 미국에 6자회담 참가를 위한 마지막 명분을 달라고 애타게 손짓하고 있다.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북한의 현 체제에 대한 존중의 의지를 밝혀달라는 게 북쪽 관계자들의 입장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악의 축’이니 ‘폭정의 전초기지’ 등 북한을 겨냥한 표현들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이번 북-미간 첫 권투 시합에서 북쪽 선수는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미국 선수를 눌렀다. 미국의 이븐 카플스 선수를 꺾고 WBCF 라이트 플라이급 초대 챔피언에 오른 최은순 선수는 “미국은 우리 조선 인민의 철천지원수 아닙니까. 미국 선수에게 절대로 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국기와 국가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선수나 관중의 속내는 미국에 대한 강한 반감이 여전함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 선수,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

경기 현장을 지켜봤던 남쪽의 한 관계자도 당시의 상황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단다. “당시 경기의 관심은 역시 북한-미국, 북한-일본 선수가 격돌하는 순서였다. 정치적으로 워낙 민감한 나라들끼리의 싸움이라 주최쪽도 잔뜩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순조롭게 행사가 치러졌다.” 이번 행사를 성사시킨 박상권 한국권투위원회(KBC) 회장 겸 WBCF 총재쪽에서는 축포와 오색 풍선 5천여개를 미리 준비해 당일 북쪽 관중들의 손에 안겨주었다. 야간봉까지 가져갔으나 이는 북쪽 정서에 아직 맞지 않다고 해서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그냥 다시 가져왔다는 후문이다. 권투는 평양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경기이지만, 열기는 다른 어느 곳 못지않게 뜨거웠던 것으로 알려진다.

평양에서 처음으로 열린 이번 경기에서 북한은 여자 프로권투를 대표하는 김광옥, 유명옥, 최은순이 각각 일본의 모리모토 시로, 멕시코의 엘리자베스 산체스 그리고 미국의 이븐 카플스를 이겨 모두 WBCF 초대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북한 선수들이 일방적으로 상대방 선수를 몰아붙이는 바람에 판정 시비는 애초부터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은 이번 여자권투 경기에서 무적의 주먹을 뽐내면서 주민들의 사기를 한껏 높였다. “앞으로 딸이 태어나면 권투를 배우게 하겠다”는 평양 시민들의 목소리도 관중석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고 남쪽 관계자는 전했다.

WBCF는 전세계 130여개 회원국을 거느린 세계권투협의회(WBC)가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여자 프로권투의 흥행을 노려 신설한 국제 프로권투 기구다. 한국 대표단은 이번 방북 기간에 북한의 김광옥·류명옥·최은순의 세계여자권투협의회 타이틀 결정전을 주관했고, 한국의 한민주와 북한 한연순의 사상 첫 여자 프로권투 남북 대결에 참가했다. 한국권투위원회는 이번 평양 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남에 따라 9월 말에는 서울에서 남북 프로권투 대결을 열 예정이다. 바야흐로 북한은 스포츠 경기를 통해 주민들의 사기를 띄우고, 미국 등 껄끄러운 나라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윤활유로 삼으려는 속내를 살짝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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