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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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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슬픔, 광통신으로 넘는다

등록 2005-07-06 00:00 수정 2020-05-03 04:24

8·15 화상 상봉 위해 남북 기술실무자들 잇따라 회동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 6만명의 영상편지 등 준비중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경남 진해시에 사는 김찬구(78)씨. 그의 고향은 연평도에서 맑은 날이면 실루엣으로 저만치 희미하게 보이는 북녘땅 황해남도 해주다. 그는 북에 두고 온 하나뿐인 피붙이인 여동생을 찾기 위해 지난 10여년간을 그야말로 흰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다녔다.

여동생 등장한 비디오테이프에 감격

그의 누이가 어린 나이에 평안남도 덕천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홀로 남쪽으로 넘어온 지도 어느덧 쉰다섯해가 흘렀다. 김씨는 여동생에 대한 정이 남다르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자식들 생계를 위해 봇짐을 지고 이곳저곳 물건을 팔러 떠돌아다닌 탓에, 그의 머릿속 어린 시절 추억이라곤 여동생과 동고동락한 장면뿐이다. 고령인데다 지병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중국 옌볜 땅을 비롯해 국경 지역을 헤매면서 몰래 동생의 생사를 수소문하고 다녔다. 브로커를 만나 그들의 호주머니에 돈도 적지 않게 쑤셔넣어 주었다.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겨진 메모를 건네주며 몰래 여동생 생사를 알아봐달라고 사정도 했다. 그렇게 지난 10여년간 날린 돈만 수천만원에 이른단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더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즈음 뜻밖의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난 연말 북쪽에서 참으로 반갑고 귀한 선물이 날아든 것이다. 어릴 때 얼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분명히 같은 핏줄을 타고난 여동생의 얼굴과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비디오테이프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에게 생사 확인을 부탁했는데, 그가 뜻밖에도 비디오로 소식을 담아온 것이다. 김씨는 지금까지 마르고 닳도록 비디오를 보고 또 보면서 그간 못 나눈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다.

비디오에 담긴 여동생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단아한 모습이었고, 얼굴도 편안해 보여 그는 여간 다행스럽지 않단다. 북쪽 당국에서도 비공식적으로 비디오 촬영 때 편의를 봐준 흔적이 엿보인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김씨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허허, 나도 구세대지만, 이렇게 비디오로 동생의 소식을 받아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화질, 음질이 다 좋아 마치 텔레비전 보듯이 매일 꺼내보고 있어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비디오에 비친 동생의 얼굴을 보면서 텔레비전 화면을 쓰다듬어 보지만 왠지 아쉽다. 직접 목소리를 듣고 살갗을 어루만지고 싶은 욕심이 솟구친단다. 그러나 누런 편지지에 몇자 전해온 편지를 보면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다른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자신은 그래도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디오를 전해준 조선족 동포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자신의 음성과 얼굴을 비디오에 담아 여동생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족 동포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장담은 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당뇨병이 중증이라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김씨는 자식들에게 비디오를 복사해 자신이 죽더라도 여동생을 꼭 찾아 자신이 여동생을 위해 남긴 물건들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비디오 원본은 자신의 옆에 나란히 묻어달라는 유언도 미리 써놓았다.

북한 ‘조선인포뱅크’ 의 이메일 서비스

그런 김씨는 얼마 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올 8·15 때 이산가족 화상 상봉을 시범적으로 실시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릎을 쳤다. 그는 북한 당국이 조만간 화상 상봉은 아니더라도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남북 이산가족들이 비디오 촬영물을 교환하면서 비공식적인 상봉을 허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해오던 참이었다. 더구나 북한의 웹사이트인 ‘조선인포뱅크’는 최근 해외동포들에게서 이메일을 받아 북한에 사는 가족의 소식을 전달해주는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북쪽의 가족과 고향 소식을 알고 싶은 사람이 ‘chosun@dprkorea.com’으로 이메일을 보내면 관련 소식을 제공한다. 거의 이산가족 상봉 전문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김씨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에 비춰볼 때 이산가족 화상 상봉의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다고 말한다.

바야흐로 이산가족 화상 상봉 시대의 막이 오르고 있는 셈이다. 화상 상봉 면회소도 곧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이산가족 화상 상봉 제안에 대해 “매우 흥미롭고 흥분되는 제안이다. 당장 8·15 때 추진해보자. 시간이 짧으니 남북이 경쟁적으로 준비해서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며 강한 의욕을 비친 바 있다. 화상 상봉을 위해 남북한 기술실무자들이 6월25일에 이어 7월 초에 잇달아 만났다. 8·15 기념일에 맞춰 시범적으로 화상 상봉을 실시하려면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실무자들의 움직임이 매우 분주하다. 통일부 관계자는 6월29일 개성에서 이뤄진 기술실무자 접촉에서 “화상 상봉을 위한 전송로 연결 및 화상 단말기 구축과 관련한 기술적 사항을 협의했다”며 “협의가 원만하게 진행된 만큼 화상 상봉 성사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는 이미 이산가족 6만명의 영상편지 등을 준비 중이다.

현재 화상 상봉의 방법과 규모가 가장 큰 관심거리다. 남북은 서로의 정보통신 시설 현황을 비롯한 화상 상봉을 위한 기술적 문제를 논의한 뒤 7월10일께 이뤄질 실무접촉에서 상봉 규모와 구체적인 시기, 방법 등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정부가 생각하고 있는 상봉 방법은 광통신, 무궁화위성, 인터넷 등 세 가지이나, 비용 등을 감안할 때 광통신 연결이 가장 현실성 있는 방안으로 오르내린다.

화상 상봉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남쪽 이산가족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북쪽 피붙이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실 북한 당국은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체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떠나 전력, 도로·철도 인프라 부족 등으로 나이 많은 이산가족들을 금강산 상봉 장소까지 데려오는 게 여간 조심스런 일이 아니었다. 특히 비나 눈이 많이 내리는 계절이면 먼 지방이나 산간오지에 있는 이산가족들을 수송하기란 불가능하다. 화상 상봉이 당장 이런저런 불편함을 크게 덜 수 있고, 남쪽과 국제사회에 인도주의 문제 해결을 위한 북쪽 당국의 노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북쪽도 크게 반길 일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통신 인프라 수준 등을 감안하면 우선 주요 지역별 화상 상봉 면회소를 세우는 방법으로 남쪽 이산가족과의 화상 상봉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본다. 당장은 금강산, 개성공단 등 남북간 통신 전용회선이 연결된 북쪽의 특정 장소에 디지털 캠코더와 화상회의·전화 시스템을 갖춘 면회소가 들어서면 남북 이산가족들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화상 상봉을 할 수 있게 된다. 기술적으로 화상 접촉보다 간단한 화상 전화기를 이용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화상 상봉에 순조롭게 협력한다면 남쪽의 뛰어난 정보통신 분야 기술과 장비를 전수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을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화상 상봉 인원은 아직 유동적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이산가족들이 화상 상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정부쪽에선 우선 이산가족으로 등록된 10만여명의 명단을 몽땅 북쪽에 넘겨줄 작정이다. 그러면 북쪽에서는 생사 확인에 나서고, 확인이 되는 대로 화상 상봉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화상 상봉 인원은 매우 유동적인 상태다. 한적의 한 관계자는 “이산가족들이 서로 두손 마주 잡고, 얼굴을 비비는 등 피부가 맞닿아야 더 한을 푸는 데 보탬이 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직접 상봉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려운 만큼, 고령 이산가족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화상 상봉이라도 성사되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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