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몽둥이가 때려부순 오빠의 일생

등록 2005-06-28 00:00 수정 2020-05-02 04:24

군대폭력으로 33년간 정신병원 생활하다 시한부 암 선고받은 강여달씨
여동생은 차마 본인에게 알리지 못한 채 “억울한 삶 보상해주세요”호소

▣ 글=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강여달(55)씨가 병을 발견한 것은 지난 4월 초의 일이다. 췌장에서 시작한 암세포는 벌써 온몸으로 퍼진 상태였다. 국립의료원은 강씨에게 “길어야 두달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6월9일 그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남은 삶을 평안히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경기 용인시 ‘샘물의집’에 입소했다. 얼굴은 황달기로 누렇게 떠 있었고, 복수로 가득 찬 배는 거북해 보였다. 가족을 암으로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강씨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명백했다.

‘관행’의 탈을 쓴 그 무시무시한 폭력

강씨는 15년째 입원해 있던 의정부 ㅎ정신병원에서 자신이 병든 사실을 알았다. 올해 1월부터 배가 견딜 수 없이 아파왔다. 한달 동안 설사를 거듭했고,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곧 급격히 체중이 줄기 시작했다. 병원은 소화제와 진통제를 처방했다. 올해 4월 “죽을 것처럼 배가 아프다”는 강씨의 호소로 건강진단을 받았다. 1시간을 넘기지 않는 간단한 검사였다. 의사는 췌장암을 선고했다. 가족들은 조금 더 큰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같았다. 첫 병원에서는 앞으로 “두달 남았다”고 말했고, 두 번째 찾은 곳에서는 “한달 남았다”고 했다. 그는 정신병원을 퇴원해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국립의료원으로 병실을 옮겼다.

<한겨레21> 취재진이 6월13일 샘물의집을 찾았다. 강씨의 동생 금희(49)씨는 “33년 동안 오빠는 정신분열증을 앓아왔다”고 말했다. 병이 심해지면 자주 집에서 뛰쳐나가려 했고, 헛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옮긴 국립의료원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병실을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수소문 끝에 샘물의집을 알게 되었다. 33년 동안 이어진 강씨의 병원 생활은 이제 종착역을 향해 치닫고 있다.

목포가 고향인 강씨의 신산한 삶이 시작된 것은 스무세살 때인 1973년. 부친이 일찍 세상을 뜬 뒤로 그는 홀어머니와 세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고,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금희씨는 “오빠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 3년 내내 장학금을 탔다”고 말했다. 서울로 올라와 출판사에 다니던 강씨는 1973년 4월3일 입대해 강원도 원주 통신훈련소에서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26사단 73연대 본부 중대 통신대로 배치됐다. 제대는 1976년 2월2일이었다. 가래가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그는 “군생활을 마치고 어머니와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신의 새파란 칼날이 번뜩이는 시절이었다. 군내 폭력은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일상적이었다. 강씨는 ‘관행’의 탈을 쓰고 자행되는 폭력을 견딜 수 없었다. 밤마다 몽둥이 찜질과 원산폭격이 이어졌다. 물론, 폭력의 이유는 있었다. 통신병은 무선 전문을 한자한자 신중하게 받고 보내야 하는 중요 보직이었다. 강씨는 자주 중요 대목을 놓쳤다. 남아무개 병장과 김아무개 상병은 철모로 그의 머리를 짓이겼다. 그는 자주 정신을 잃었다. 강씨는 “언제부턴가 머리가 자주 아프고 정신이 왔다갔다 했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히 지내는데 왜 혼자만 유난을 떠냐”고 말했다. 아마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래들은 그 무차별한 폭력을 무덤덤하게 받아냈다. 몽둥이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환상 속에서 불이나고 사람들이 타죽고…

강씨는 제대를 3개월 앞두고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다가 혼자 일어나 엉엉 우는 일이 많아졌다. 후임병들이 울고 있는 그를 달래 자리에 눕혔다. 강씨는 그 병사들의 이름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강씨의 환상 속에서 이따금 내무반에서 불이 나고 사람들이 타죽었다. 귀에서 “웅웅웅”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졌다. 군의관은 그에게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을 붙였다.

결국 그는 1975년 11월 서울 창동 국군병원으로 후송됐다. 그곳에서 한달쯤 있다가 1976년 1월께 국군 진해통합병원으로 후송됐다. 제대 날짜가 다가오자 강씨를 치료하던 간호장교 김아무개 대위가 “강 상병은 상태가 너무 나쁘니까 6개월 더 치료를 받은 뒤에 의병 제대를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의병 제대를 하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었다. 고민하던 강씨는 이를 거절했다. 군대를 만기 제대하지 못하면 사람 대접을 못 받던 시절이었다. 그는 “빨리 병을 떨치고 일어나 홀로 된 어머니와 동생들 치다꺼리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동생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강씨는 그때 몰랐다. 이미 그의 정신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동생 금희씨는 “제대를 며칠 앞두고 마지막 면회 갔던 날을 못 잊겠다”고 했다. 늙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빠를 불러달라”며 면회소 앞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주변의 쑥덕거림이 귀에 거슬렸다. 3시간 남짓 지나 양쪽에서 동료 병사의 부축을 받고 끌려온 오빠의 모습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강씨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금희씨는 “왜 이렇게 됐냐고 항의도 못했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정신분열증이 도졌다. 그는 자주 소리를 지르고, 이따금 집을 뛰쳐나갔다. 집안의 기둥 구실을 해줄 것으로 믿었던 큰오빠의 병은 청천벽력이었다. 치료비는 날품팔이로 행상을 다니던 어머니의 몫이었다. 셋방살이로 떠돌아야 했던 강씨의 가족을 받아주는 집은 없었다. 가족들은 수십통의 탄원서를 청와대로 올렸지만 답은 없었다.

제대 후 33년 동안 강씨는 서울시립정신병원, 국립정신병원, 용인정신병원, 의정부 ㅎ정신병원 등 6곳이 넘는 병원을 전전했다. 강씨는 1991년부터 2005년 4월까지 15년 동안 의정부 ㅎ정신병원에 머물렀다. 병원비에 기진한 77살 노모는 단칸 월세방에서 하루하루를 난다. 노모는 한달 전에 강씨의 수발을 들다 쓰러져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금희씨의 남편 김중백(43)씨는 “결혼한 지 올해 13년째지만 정신병을 앓는 오빠가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몰랐다”며 울먹였다. 금희씨는 “너무 아픈 과거라 차마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오빠 얘기를 처음 낯을 대하는 기자에게 털어놓은 금희씨의 참담함을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김씨 부부의 표정에서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사람의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김씨는 “형님에게 두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개별 과거사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금희씨는 “억울한 오빠의 삶을 보상해달라”며 지난 6월3일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지난 5월27일 국방부가 어두운 과거를 스스로 밝혀내겠다고 출범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이 시작됐지만 개별 사건은 조사 대상에서 빠졌다. 위원회는 ‘실미도 사건’과 ‘학원 녹화사업’ 등 정치성이 큰 사업들만을 중심에 놓고 있다.
강씨는 “좋은 기사를 써달라”며 밝게 웃었다. 맑은 웃음이었다. 그는 “원호병원에 입원해 병을 고친 다음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소박한 소망이 이뤄질 수 있을까. 금희씨는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얼굴을 돌렸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