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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한표 차의 충격

등록 2005-06-09 00:00 수정 2020-05-03 04:24

‘정치권 인사는 회원 탈퇴’ 회칙개정안 또 불발
천정배·임종인 의원 필사적 표결참여로 자격 유지

▣ 화순= 황예랑 기자/ 한겨레 사회부 yrcomm@hani.co.kr

찬성 161표, 반대 162표.
‘국회의원·지방자치단체장·정무직 공무원이 되면 회원 지위를 잃는다’고 회칙을 개정해, 정치권과 ‘거리를 두려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시도가 ‘한표’ 차이로 또 불발에 그쳤다. 표결 결과가 말해주듯, 지난 5월28일 전라남도 화순에서 열린 제18차 민변 총회의 분위기는 내내 뜨거웠다.

민변과 정치권의 관계에 대한 논쟁

회칙개정안이 통과되면 민변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한 현역 국회의원들도 직접 총회에 참석했다. 회칙개정안 논의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 절묘한 타이밍에 총회장에 등장한 열린우리당 천정배 의원은 “정계에 진출하는 민변 회원이 많아질수록, 민변의 영향력도 확대된다”며 “민변의 공식 입장과 다르게 행동하는 회원들을 징계하면 될 일이지, 민변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회원들을 설득했다. 임종인 의원은 방러 일정을 마치고 공항에서 총회장으로 직행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두 의원은 이날 필사적인 표결 참여로 민변 회원 지위를 지킨 셈이 됐다.

열띤 토론은 3시간여 동안 계속됐다. 민변과 정치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논쟁점은 명확했다. 회칙 개정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민변과 정계에 진출한 회원, 서로를 자유롭게 하자”고 주장했다. 민변은 운동단체라는 원래의 ‘색깔’을 확실히 하고, 정치인이 된 회원은 자신이 속한 정당이나 정부의 입장에 따라 자유롭게 의견을 표명하며 ‘각자의 길’을 가면 된다는 것이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실용론’을 폈다. 국회에 진출한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개혁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굳이 왜 회원자격을 뺏냐는 주장이다. 회원자격을 그대로 둔 채, 잘못하는 회원이 있을 때마다 탈회를 요구하거나 징계하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입장도 있었다.

참여정부 초기 소속 변호사들이 국정원장·청와대 비서실장·법무부 장관 등 정권의 요직에 중용되면서 민변의 위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참여정부의 실세’라는 시샘 어린 눈총에, 민변 안에서도 정치권과 지나치게 밀착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같은 논란이 회칙개정안으로 표출된 발단은 지난해 이라크 파병 문제였다. 민변이 ‘파병 반대’라는 공식 입장을 밝힌 것과 달리, 몇몇 민변 출신 의원들이 파병처리안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총회 결과 회칙개정안은 부결됐다. 그때는 찬성이 198표로 반대표의 2배를 넘었지만, 재적 회원(431명) 과반수의 찬성이라는 엄격한 회칙 개정 요건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 때문에 민변 안에서는 올해는 ‘당연 통과’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 뒤 ‘출석회원 과반수 찬성’으로 요건을 완화해둔 터였다. 그만큼 회칙 개정을 낙관했던 젊은 변호사들에게 ‘한표 차 부결’의 충격은 컸다.

당연히 통과할 줄 알았는데…

총회가 끝나자 “좀더 적극적으로 회칙 개정을 주장했어야 한다” “당연히 통과될 거라고 생각하고 너무 입을 닫고 있었다”는 등 자책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한 변호사는 “이번 총회에서 원로 변호사들과 젊은 변호사들 사이의 인식 차가 확연히 드러났다”며 “회원이 400여명이 되다 보니 민변 안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민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전에 방어막을 쳐두려 한 건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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