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성 폭행 경험 고백글에서 소수자의 커뮤니티까지… 치유하고 정체성 찾는 자기 고백적 글쓰기</font>
▣ 글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홍대 앞 클럽에 가서 열심히 춤을 추는데 글쎄 외국인이 엉덩이를 쓰다듬는 거예요. 얼굴을 후려쳤죠. 또 그러면 죽인다고 큰소리로 욕을 해줬죠.” “오늘도 ‘번개’를 했는데 남자들은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다들 어떻게 하면 꼬여서 하룻밤 잘 수 있을까 하는 고민만 하죠. 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원하는데 왜 섹스에 안달을 하죠. 도대체 남자들 왜 그러죠?”
가슴 속 ‘납덩이’를 하나씩 덜어낸다
여성주의 사이트 ‘언니네’(www.unninet.co.kr)에서 자기고백적 글을 올리는 기능을 지닌 ‘자기만의 방’을 들여다보면 글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치유’의 도구인지가 쉽게 드러난다. 동거 경험을 털어놓는 회원이 있는가 하면, 어릴 적 성추행 등 성폭력 경험을 공개하는 회원도 있다. 그런 글이 뜨면 회원들은 저마다 지지·공감·감동의 느낌을 적는다.
송난희씨는 <여성의 자기고백적 글쓰기를 통한 상처받은 경험의 의미화와 치유에 관한 연구: 여성주의 사이트 ‘언니네’의 ‘자기만의 방’을 중심으로>(2002년 한양대 여성학 석사논문)에서 이곳의 구실과 효과를 연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가부장제 사회규범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경험은 사회적 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뉘는데 후자의 경험에 대해 여성들은 경험 자체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결국 상처로 남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고백적 글쓰기 공간인 이곳에서 여성들은 다른 곳에서 공개할 수 없는 경험들을 마음껏 풀어낸다. 이 때문에 고백의 주된 내용은 “성폭력·성추행·가정폭력·성경험·성정체성 등 가부장 사회의 중심담론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여성들은 이런 글쓰기를 하면서 가슴속에 들어 있는 ‘납덩이’ 하나씩을 없앤다고 한다. 글쓰기는 상처받은 경험을 의미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경험과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경험을 공유한 다른 여성들의 지지와 격려다. 물론 단 한번의 글쓰기가 ‘정신적 외상’을 단박에 고쳐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심리적 치료의 출발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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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조지혜 대표는 “이곳에서 치유적 글쓰기가 가능한 이유는 회원들에 대한 믿음과 커뮤니티에 대한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내가 쓰는 글에 대해서 나 혼자만의 잘못이나 경험이 아니구나 하는 공감을 얻고 지지·격려를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남성 동성애자 사이트인 ‘이반시티’(ivancity.com)의 ‘이야기마당’에는 하루 수백건의 글이 올라온다. 처음 글을 쓰는 회원들은 “내 감정을 눈치보지 않고 드러낼 수 있어 기쁘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한다. 이 사이트에는 동성애자로 살면서 겪는 고충과 이성애자들과 나눌 수 없는 동성애자들만의 ‘뒷담화’가 넘쳐난다.
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 ‘친구사이’ 이민철 회원은 “일상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힘든 소수자에게 신분 노출의 위험이 적은 인터넷 글쓰기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며 “글쓰기의 힘이 숨어 살던 동성애자들을 현실의 동성애자 커뮤니티로 끌어내는 중간 단계로 기능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상처를 재가공하는 자기 치유의 힘
글이라는 매개가 사람의 마음을 보듬고 쓰다듬는 마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오랜 학문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하지현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어떤 글을 읽고 나서 마음의 고통을 잠재우거나 우울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열알의 ‘발륨’(valium)이나 백알의 ‘프로작’(prozac)보다 훨씬 낫다”고 말한다. 그가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치유의 글은 성경이나 불경 같은 종교 경전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씨는 또 같은 맥락에서 “일기쓰기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치유적 글쓰기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일기는 부끄러운 욕망과 좌절 등을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그대로 펼쳐놓고 실체를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괴롭거나 부끄러운 일일수록 인간의 특권인 ‘망각’과 ‘착각’에 기대어 잊어버리고 싶을 텐데 굳이 글쓰기로 풀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하씨는 “자기 치유의 본능적 욕구 때문”이라고 답한다. “뭔지 모르게 괴롭고 힘든 경험으로 기억돼 있는 감정의 덩어리를 글을 써서 정리하고 재평가하면서 견딜 만한 수준의 내용으로 재가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게 이런 의미가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한결 그 일을 돌아보는 게 쉬워진다는 얘기다. 글쓰기는 아픔의 상처를 다른 느낌으로 재생한다는 뜻에서, 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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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는 “부부심리 칼럼을 쓸 경우 아무래도 우리 부부의 경험이 글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데 한번 쓰고 나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면서 “부부 사이의 문제라는 게 대부분 서로의 감정을 살짝 넘어가면서 생기는데, 글쓰기가 하나의 경고 기능을 해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소수자와 심리적 피해를 겪은 이들에게 글쓰기가 치료제 구실을 한다면, 인생 전체 또는 일상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려는 이들에게 글쓰기는 자기를 발견하고 생활의 갈래를 잡아주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지난 4월28일 오전 10시30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한겨레문화센터. ‘수필교실’이라는 이름의 강좌가 막 시작된 502호 강의실로 들어섰다.
자기를 발견하고 생활을 돌아본다
대부분 50~60대들로 구성된 20여명의 수강생들이 ㄷ자 형태로 앉아 자신이 써온 글을 차례로 읽어내려갔다. 사뭇 진지한 표정의 수강생들은 흰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가끔씩 밑줄을 긋는다. 집에서 꽃을 키우면서 느낀 소회를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이 낭독된 뒤 이에 대한 소감이 이어졌다. 강의를 맡은 수필가 이정림(계간 <에세이21> 발행인 겸 편집인)씨가 빙그레 웃으면서 한마디 한다. “낭독이 좋으면 다 넘어간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이 꼭 그런 것 같네요. 목소리도 좋은데다 미남이니까 정신이 없구만.”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수강생 중에 내부고발자의 대표격인 이문옥 전 감사관도 포함돼 있었다. 5년 동안 글쓰기를 닦아온 이씨는 올여름 에세이집에 <천리향>이라는 수필을 발표한다. 정식 등단하는 셈이다. 이씨는 “향이 너무 좋지만 ‘꽃의 적’이라고 일컫는 천리향을 양심자들에 빗대어 써본 글”이라고 수줍어했다. 그는 사회수필을 쓰는 게 자신의 사회적 구실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5년째 강의를 듣고 있는 최제영(67·경기 용인)씨는 “글쓰기가 가져온 변화를 꼽아보라면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게 됐다는 점”이라며 “남의 흠에 유난히 비판적이었는데 글쓰기를 한 뒤부터는 남의 처지를 나와 비교해보는 버릇이 생겼고 그런 단점이 보완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수필가 이씨는 “글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문학장르 중에서도 특히 수필은 자신의 얘기를 솔직하게 드러내야만 하는, 글의 속성 때문에 글과 사람이 따로 놀 수 없다”고 강조했다.
마음속 상처를 치료하거나 자기를 찾아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을 꿈꾸는 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글쓰기에 도전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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