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자본 규제에 ‘재벌 체제 강화’ 보태려는 재벌… 경영권 보장과 함께 지배구조 투명화도 필요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004년 11월 “한국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을 쫓아낼 방법을 모색하는 공무원이나 기업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이 (외국자본이 대주주인) 시중은행의 외국인 이사 수를 제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직후였다. 그런데 3월29일부터 증권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된다. 개정안은 국내외 자본에 의한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 시도를 규제하는 내용(보유목적 변경 보고 의무화, 주요 계약내용 상세 공시 등)을 담고 있는데, 주로 외국자본의 적대적 M&A 위협에 대한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 경제의 중심 화두로 떠오르다
최근 SK-소버린 사태 등 무분별한 외자 지배력 확대에 따른 폐해가 부각되면서 투기성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와 재벌 기업의 경영권 방어가 한국 경제의 중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2002년 진보적 경제학자 중심의 연구모임인 대안연대회의가 외국 투기자본 문제를 본격 제기한 뒤 삼성경제연구소가 외국자본의 부작용을 지적하고 나섰고, 최근에는 한국은행도 ‘투기성 외국자본의 문제점과 정책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상공회의소도 보고서를 내고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외국자본의 약탈적 이익 챙기기”를 지적했다. 한국은행은 보고서에서 △외국인투자촉진법에 사후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조사하고 투자 철회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을 신설하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투기성 외국자본을 선별하고 △금융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적격성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지펀드와 사모주식펀드 등 투기성 외국자본의 국내 상장주식 보유 비중은 2004년 10월 말 현재 163조원(전체 상장주식 시가총액의 42.5%)으로 헝가리·핀란드·멕시코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외국인들은 국내 53개 주요 기업에 대해 국내 최대주주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 있고 단일 외국인 지분율이 5% 이상인 기업만 해도 150개에 달한다. 이처럼 외환위기 이후 재벌 구조조정 과정을 보면 ‘외국자본의 개입’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띠고 있다. 사실 그동안,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회복된 데는 외국인 투자자 신뢰 회복을 통한 외국자본 유입이 결정적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경제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를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의 구원투수라고 생각한 것인데, 구조조정 매물기업을 헐값에 사들인 외국자본은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렸다.
한국은행은 “투기성 외국자본의 무리한 투자자금 조기 회수로 국내 기업의 성장성이 저해되고, 무리한 인력 감원·핵심자산 매각·고액 배당·유상감자 시도 등이 일어나 해당 기업의 수명이 단축되는가 하면, 설비투자가 감소하고 국부가 유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국자본에 팔린 뒤 공공성이 훼손되고 산업자본의 자금공급 기능도 크게 위축됐다. 물론 이런 대다수 행동은 현행법상 적법하게 이뤄지고 있다.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가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김영삼 정부 때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했는데,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 수준이 유럽은 물론 영국과 미국에 비해서도 완화된 상태다. 또 국제통화기금(IMF)의 적대적 M&A 허용 요구를 받아들이고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경영권 보호장치를 대부분 폐지해버렸다. 여기에는 “적대적 M&A를 자유화하면 ‘시장규율’이 형성돼 경영권 위협을 받는 기업들의 투명경영을 유도할 것”이라는 이른바 ‘외부 감시기능론’이 깔려 있었다.
재계와 정부·한국은행, 동상이몽 규제
그런데 투기성 외국자본에 의한 적대적 M&A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 전승철 국제경제팀장은 “무차별적으로 투기성 외국자본이 들어와서 당하고 나니 이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것”이라며 “투기성 외국자본 문제는 경영권 방어라는 재벌 오너의 입장이 아니라, 경영권 보호 조처와 함께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자본의 투기적 행태를 비판해온 투기자본감시센터쪽은 “이제 와서 외국 투기자본에 대해 제동을 걸려고 하지만, 이미 넘어갈 만한 건 다 외국자본에 넘어갔고 때늦은 감이 있다”며 “특히 투기자본 문제에 대한 초점은 재벌의 경영권 방어나 지배권 안정이 아니라 ‘국민경제 성장’이란 관점에 맞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투기성 외국자본 규제 및 경영권 방어 수단을 둘러싸고 전경련·대한상의·삼성경제연구소 등 재계쪽이 주장하는 대책과 대안연대·정부·한국은행이 제기하는 방안은 뚜렷이 구분된다. 재계에서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대주주가 보유한 보통주 지분에 대해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제’ 도입(매우 적은 지분으로 총수일가가 기업집단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재벌이 사실상 차등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견해도 있다) △출자총액한도(순자산의 25%까지만 다른 국내 회사 주식 취득을 허용하는 제도) 폐지 △계열 금융회사 의결권 제한 폐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참에 외자 지배 문제를 빌미로 출자총액제한이나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것이다. 전경련은 “출자총액한도 제도가 기업들의 출자를 규제하기 때문에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이는 역할을 해 사실상 외국자본의 적대적 M&A를 활성화하고 있고, 국내 기업을 역차별하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대한상의는 출자총액제한과 금융계열사 의결권 외에도 △집중투표제 도입 백지화 △대규모 기업집단 소유지배구조 공개 중단 등 새로운 요구를 내놓았다. 대한상의 기업정책팀 이경상 팀장은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일정 지분을 확보한 외국계 사모펀드가 소액주주 권리 행사라는 명분으로 경영진을 압박할 수 있다”며 “공정거래위원회의 소유지배구조 현황 공개도 외국자본이 소유지배구조가 약한 기업을 타깃 삼아 적대적 M&A를 쉽게 시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격”이라고 말했다.
삼성물산의 3대주주인 헤르메스로부터 적대적 M&A설이 제기됐던 삼성그룹은 최근 삼성전자의 적대적 M&A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금융계열사 의결권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삼성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 격인 삼성생명의 보유지분 의결권을 이슈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공회대 유철규 교수는 “삼성이 주도하는 금융계열사 지분권 문제는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며 “삼성생명의 고객 돈으로 총수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방식은 정당성이 없다. 특히 삼성전자의 지분율을 높이기 위해 다른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낮출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등 삼성의 자구 노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대안연대회의·정부·한국은행쪽은 출자총액제한이나 계열금융회사 의결권 폐지가 아니라 △우호적 기관투자가의 ‘관계투자’를 통한 투자기업 경영권 보호 △투기성 외국자본 대항 세력으로서 연기금의 국내 기업에 대한 우호지분 확보 △정부 등이 M&A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주식을 보유하는 ‘황금주’ 도입 등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김용기 연구위원은 “재벌의 경영권 방어를 반개혁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적대적 M&A의 방어수단으로 황금주·차등의결권 제도 등은 외국인 지분이 30%를 넘는 기업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쉽게 정관을 바꿔 도입하기 어렵고, 기관투자가도 당장은 육성하기 어렵다”며 “현실적으로 출자총액한도 제한이나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을 완화해 기업들이 내부 계열사들을 동원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삼성회장 ‘투명사회협약’의 의미
유철규 교수는 “현재의 기업지배구조에서 경영권 보호장치만 강화될 경우 재벌총수 지배 체제를 더욱 강화할 우려가 높다”며 “금융계열사 의결권 문제 등은 재벌 스스로 국민들이 인정할 정도의 실질적인 자구 노력과 지배구조 투명화가 이뤄져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기성 외국자본의 적대적 M&A와 이에 따른 재벌기업의 경영권 방어가 ‘당면 과제’라면, 재벌기업이 일자리 창출·사회적 책임투자·사회적 기금조성 등 반대급부도 내놓으면서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최근 노무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 회장 등이 맺은 ‘투명사회협약’을 “외국자본의 적대적 M&A로 재벌기업들의 경영권이 위협받자 정부가 어느 정도 재계의 요구를 수용해 이제는 더 이상 재벌 계열사 지분관계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니, 정경유착 근절과 투명성 제고 노력만 하라고 선언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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