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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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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이 노조를 흔든다

등록 2005-01-06 00:00 수정 2020-05-03 04:23

LG칼텍스정유 노조 탄압 과정 발전노조와 비슷… ‘노하우’ 조언해주는 전문가 집단 있나

▣ 여수=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노조를 파괴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정유업계 사상 최초로 파업을 벌였던 LG칼텍스정유 노조의 ‘와해’ 과정을 지켜본 노동계의 반응이다. LG칼텍스정유는 지난해 12월23일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 647명 전원에 대해 중징계(해고 23명, 정직 235명, 감급 142명, 견책 247명)를 내렸다. 김정곤 위원장(구속) 등 노조 간부들은 별도로 31억원의 손배 가압류에 걸린 상태다. 노동계는 이 과정에서 회사쪽의 치밀한 ‘노조 와해 공작’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민주노동당 여수을지구당 이준상 위원장은 “파업이 끝난 뒤 노조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침해 속에 노조 활동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며 “회사쪽은 정교한 시나리오에 따라 차근차근 노조를 와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약서 요구, 개별 면담…

실제로 박주암 직무대행 체제의 LG칼텍스정유 노조는 지난 10월29일 임시대의원 총회에서 34 대 2의 압도적 ‘지지’로 민주노총 탈퇴를 결의하고, 공장 담장에 ‘불법파업을 이끈 죄인들입니다. 지난 잘못된 활동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드립니다’라는 펼침막까지 내거는 등 완전히 ‘백기 투항’한 상태다. 노동계는 노조의 이런 변신이 회사의 집요한 ‘노조 길들이기’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른바 ‘강성 노조’를 파괴하는 노하우를 조언해주는 전문가 집단이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계는 그 근거로 LG칼텍스정유 파업 이후에 벌어진 사태가 지난 2002년 발전노조 파업 때와 똑같다는 점을 제시한다. 민주노총 법률원의 권두섭 변호사는 “발전노조 파업이 끝난 뒤 회사쪽은 노조 홈페이지 접속 차단과 서약서 강요, 단계적 징계 절차 등으로 노조를 와해시키려고 했는데, 이런 노조 파괴 프로그램이 LG칼텍스정유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LG칼텍스정유의 파업 수습 과정은 발전노조 때와 많이 닮았다. 회사쪽은 먼저 파업을 끝내고 회사에 복귀하려는 노조원들에게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노조원들의 출근을 막았다. 이 때문에 대다수 노조원들이 해고 위협을 느껴 서약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회사쪽은 또 서약서와는 별개로 경위서를 작성하도록 해 파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노조원들을 색출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원들은 파업을 주도한 동료를 고발하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서약서 강요 행위는 불법으로, 지난 발전노조 사태와 관련된 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에 의해 부당노동행위로 판결 받은 바 있다(서울행법 2003구합32930). 이에 대해 LG칼텍스정유 회사 관계자는 “불법 파업을 벌인 노조원들이 업무에 복귀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며 “그러나 서약서나 경위서 작성을 강요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회사쪽은 그 근거로 20여명의 노조원들이 서약서를 쓰지 않은 사실을 제시했다. 서약서 작성이 강제로 이뤄졌다면 어떻게 이를 거부한 노조원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가 결국 해고됐다는 점에서 회사쪽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징계 예고 뒤 벌어진 ‘기이한’ 사태

회사쪽은 또 노조원들을 상대로 개별 면담을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 활동 불참을 유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여수지역 시민단체로 구성된 LG정유인권실태조사단의 보고서를 보면, 개별 면담 때 회사쪽은 ‘노조가 파업을 하면 또 동참할 것인가’ ‘앞으로 회사와 노조의 지침 중 어느 것을 따를 것인가’ 등을 물었다. 이는 정당한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려는 부당노동행위라는 게 노동계의 주장이다. 회사쪽은 이에 대해 “개별 면담은 억울하게 징계를 당한 노조원이 없도록 구제 차원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발전노조 사태 때도 ‘개별 감사’라는 면담이 진행됐는데, 그 질문 내용은 이와 비슷했다.

조합원에 대한 징계를 단계적으로 진행하면서 노조를 무력화하는 과정도 발전노조 때와 닮았다. 발전노조는 네 차례에 걸쳐 징계가 진행됐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원들의 조합 탈퇴가 잇따랐다. LG칼텍스정유도 사규에 없는 ‘징계예고제’를 만들어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회사쪽은 지난 11월20일 징계 예정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김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과 대의원 등 53명을 해고하고 나머지 조합원은 견책·감봉·정직 조치를 내릴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달 뒤에 단행된 실제 징계는 해고자가 23명(권고사직 8명 포함)으로 줄었다. 해고가 예고됐던 대의원들이 모두 구제된 것이다. 회사쪽은 “징계예고제는 징계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로 회사가 ‘선처’를 베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노동계는 이 조치를 교묘한 노조 길들이기로 보고 있다. 민주노총 여수시협의회 천중근 의장은 “징계 예고자 명단이 발표된 후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노조의 ‘어용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며 “해고가 예고된 대의원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회사쪽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징계 예고와 실제 징계 사이의 약 30여일 동안 LG칼텍스정유 여수 공장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대의원들은 출근 시간에 회사 정문에서 ‘사죄’의 피켓을 들고 출근하는 임직원 차량에 대고 인사를 하고, 몇몇 노조원들은 비노조원들 앞에서 파업 때 입었던 노조 조끼를 가위로 조각내는 ‘조끼 절단식’을 벌였다. 대의원들의 ‘참회’ 펼침막이 내걸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에 대해 회사쪽은 “노조에서 자발적으로 벌인 일일 뿐 회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의원들은 노조에 대한 충성도가 높고 강성인데 어떻게 관리가 가능하겠느냐”고 해명했다. 하지만 노동계의 견해는 다르다. 천 의장은 “대의원들은 단 한 사람도 해고되지 않은 반면, 평조합원 중에는 5명이나 해고를 당한 사실이 회사의 공작을 입증한다”며 “대의원들은 파업 후에 민주노총 탈퇴를 결의하는 등 회사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기 때문에 구제됐다”고 주장했다. 박주암 현 노조위원장 직무대행도 파업 때 부위원장으로 활동해 해고 예정자 명단에 포함됐지만, 최종적으로는 정직 3개월에 그쳤다. 그는 회사쪽의 인권침해에 항의해 LG정유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는 여수시민대책위원회를 찾아가 불매운동 중지를 요청하는 등 부쩍 ‘친회사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노동계는 파업 경험이 전혀 없는 LG칼텍스정유 회사쪽이 이처럼 치밀한 노조 길들이기를 추진하고 있는 것을 의심의 눈길로 본다. 민주노동당 이준상 위원장은 “과거 대우자동차 노조 파업 때 회사쪽에 ‘노조 파괴’ 노하우를 자문해준 컨설팅 팀이 있었는데, 이 팀이 발전노조 때도 맹활약했다”며 “LG칼텍스정유도 이런 역할을 하는 자문팀이 지난 여름 파업 때부터 구성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LG칼텍스정유는 파업 당시 대규모 법률자문단을 구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회사 관계자는 “파업 사태에 합법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들과 노무사들의 자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회사쪽은 노조 와해를 목적으로 법률 자문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2000년 이후 파업 컨설팅 그룹 활동”

권두섭 변호사는 “2000년 이후 주요 파업 현장에서 노동법 전문 변호사와 노무사, 그리고 대기업 노무팀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파업 컨설팅’ 그룹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들은 법의 맹점을 악용해 합법적으로 노조를 탄압하는 노하우를 자문해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조 간부들에 대한 테러 등으로 ‘무식하게’ 노조를 깨뜨리는 80년대식 방식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노조를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채찍과 당근’으로 노동자들을 교묘하게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력적이다.



파업을 회사쪽이 유도했다?

LG칼텍스정유 노조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지난 여름의 ‘불법’ 파업이 회사쪽에 의해 유도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LG칼텍스정유 노조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신범식 의장은 “파업 때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인 중질유 분해 공정(RFCC)이 중단돼서 노조원들이 공장을 이탈했는데, 이는 회사쪽이 출입문 열쇠를 관리하고 있는 변전소에서 전원이 차단됐기 때문”이라며 “회사쪽에서 노조의 ‘산개투쟁’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전원을 차단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 의장은 “공장이 가동될 때는 위험 요소가 많기 때문에 공권력 투입이 안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장 전원이 갑자기 차단되자 이를 공권력 진입의 조짐으로 해석하고 산개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RECC 공정 조정실은 노조원들이 점거하고 있었지만, 조정실에서 500여m 떨어진 곳의 변전소는 회사쪽에서 열쇠를 관리하고 있었다.
실제로 경찰 조사 결과 RFCC 공정 중단은 변전소에서 전원이 차단됐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회사쪽은 이런 주장에 펄쩍 뛰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막대한 손실이 발생할 게 뻔한데 그런 일을 저지를 회사가 어디 있느냐”며 “노조가 궁지에 몰리니까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여수경찰서도 노조쪽 주장에 대해 큰 신빙성을 두지 않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변전소는 회사가 키를 관리하고 있는 정문 말고도 후문과 창문 등으로도 침입할 수 있다”며 “변전소 안에 설치된 CCTV는 감시만 가능한 제품으로 당시 상황이 녹화돼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여수서는 아직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이 의혹은 LG칼텍스정유 노조 파업 사태를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만약 회사가 고의로 전원을 차단했다면, 노조원들이 ‘불법’ 파업을 일으켰다는 공소 사실을 전면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실의 신언직 보좌관은 “당시 변전소의 CCTV는 24시간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모니터링하는 부서의 근무일지를 조사해서 근무자를 찾아내 조사하면 정확한 사실을 밝힐 수 있다”며 “하지만 경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런 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수서 관계자는 이에 대해 “근무자들을 찾아서 조사를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실효성이 없을 것 같아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원조’ 노조 파괴범, 제임스 리



‘노조 파괴’의 원조는 지난 1990년대 초 노조 간부에 대한 테러 지휘로 악명을 떨쳤던 제임스 리(한국이름 이윤섭·54)다. 제임스 리는 1989년 1월 현대중전기 노조원과 해고자들에 대한 각목 테러를 지시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일약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도 노조 탄압에 관여한 경력을 갖고 있던 제임스 리는 민주노조 출범으로 골머리를 앓던 현대그룹 경영진의 노조 파괴 청부사로 활동했다. 제임스 리는 현대 노조원 각목 테러로 물의를 빚은 뒤에도 인천 지역에서 몇몇 기업체의 노무 담당 이사로 활동하면서 노조를 파괴하는 공작을 맡았다. 그가 얼마나 악명을 떨쳤던지, 제임스 리를 고용한 한 병원의 노조 간부가 그의 퇴사를 요구하며 자해 소동을 벌인 사건도 있었다.
그는 기업체 노무 담당 직원들을 상대로 자신의 노하우를 강의하기도 하고, 조합원들을 ‘개종’시키는 교육 프로그램의 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현대중전기 노조원 테러 사건에 대해 “노조가 빨갱이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충정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해명하고 다녔다고 한다.
제임스 리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현대 노조원 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이 지난 지금, 제임스 리보다 더 영악하고 세련된 ‘노조 파괴 청부사’들이 노조 탄압 현장에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조짐이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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