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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네트워크, 가난을 구제한다

등록 2005-01-06 00:00 수정 2020-05-03 04:23

마포 시민단체·사회복지기관이 직접 나선 빈곤실태조사… 일정 성과 바탕으로 민관 의료모임 씨앗 마련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김 할머니는 60살이다. 남편과 둘만 산다. 할아버지는 농약 중독으로 사고력이 아이 수준이다. 할머니는 고혈압·관절염이 있다. 게다가 몇년 전 계단에서 넘어져 한쪽 다리를 전다. 딸은 지난해 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몸이 성치 않은 38살 아들은 친구 집에서 지낸다. 건설일용직으로 본인 용돈 정도 번다. 할머니네는 정부지원금 29만원에 동네 아이들을 돌봐주고 받는 30만원 등 59만원으로 산다. 전세금은 딸 병원비로 다 써버렸다. 월세로 20만원씩 낸다. 주인은 집을 비우라고 한다. 반찬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노인가구 실태조사 “질병 퇴치 시급"

“39살 박. 남편과 이혼한 뒤 아이 둘을 키우며 산다. 정부지원금 20만원에 건설일용직으로 월 50만원을 번다. 전세 600만원. 초등학교 6학년 큰아이는 아토피 피부염이 심하고 지적 수준이 떨어져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치료를 미루고 있다. 한의사 선생님과 연계해 무료 진료를 시행 중이다.”

한 가정의 실태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이 보고서는 번듯한 행정기관의 보고서가 아니다. 서울 마포의 시민단체인 마포연대와 사회복지기관인 이대성산종합사회복지관, 마포자활후견기관 3곳이 지난해 5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집들을 방문해 조사한 자료다. 마포연대 등은 ‘건강지원 방안 마련을 위한 지역실태조사-아현1동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40여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는 조사 대상자들의 구체적인 실상뿐 아니라 이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가 담겨 있다. 국가처럼 생활에 필요한 돈을 직접 쥐어주지는 못하지만, 건강 상태는 어떤지, 무료 진료가 가능한지, 그 밖에 간병이나 식사 지원이 필요한지 등을 파악해 지역사회의 자원들과 끈을 이어주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이다. 시민단체와 복지기관의 이런 움직임은, 어쩌면 오래전에 중앙과 지방정부에 의해 이뤄져야 했을 일인지도 모른다.

조사는 아현1동 빈곤지역 거주자 중 60살 이상의 노인 가구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79명, 차상위 계층이 38명이었다. 수급자는 공공기관의 명부에서, 차상위 계층 포함자는 교회·성당 등 종교기관과 동네 사정에 밝은 통·반장을 통해 파악했다.

이번 조사가 의미 있는 대목은 그저 조사를 위한 조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마포의 빈곤계층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일단 단체들이 해왔거나 할 예정인 일들과 연관된 부분에 집중했다. 빈곤의 위험을 높이는 가장 큰 요인인 보건 분야가 채택됐다. 가난이 병을 부르고 그 병이 헤어나지 못할 만큼의 가난으로 다시 몰아넣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태조사는 바로 지원으로 이어졌다. 마포 아름다운 가게의 수익금으로 12가구에 대해 반찬 지원이 6월부터 시작됐다. 의료 실태를 조사하다가 전반적으로 부실한 건강 상태가 먹을거리에서 비롯된 것을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1월엔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협의회 등 의료단체의 후원을 받아 건강한마당 행사를 열었다. 실태 조사를 벌였던 아현동을 비롯해 마포에서 돈이 모자라 선뜻 병원을 찾지 못했던 50여명이 왔다. 내과·치과·한의학과 의료진들이 참여했다. 노인 1명은 정밀검사가 필요해 바로 입원했다. 건강 상태가 나빠 재검사가 필요하거나 꾸준한 진료가 필요한 15명은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기관을 연결해줬다. 만성질환, 노인성 질환의 경우는 아현동 보건지소를 잘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새해부터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과 자원봉사자로 꾸려진 건강 도우미들을 결연시켜주는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반찬 지원·건강진단 등 대책 이어져

조사에서 지원사업까지 물 흐르듯 진행된 이 활동은 마포 보건의료인모임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마포에서 병·의원을 열고 있는 의료인들과 여러 복지관의 보건 관련 사회복지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 마포보건소의 의학과장도 참여키로 해 민관 협력 체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진행된 마포에서의 이런 움직임은 ‘지역복지’에 관해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참여복지 5개년 계획에서 알 수 있듯이, 향후 몇년 사이에 사회복지 예산이 대폭 늘어날 가능성은 낮다. 중앙·지방정부의 사회복지 분야에서 ‘말초신경’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복지 전문요원들이 갑자기 확충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공공의 사회복지망의 그물코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넓을 수밖에 없다. 그 틈새를 지역의 시민단체, 복지기관 등이 지역복지 네트워크를 만들고 관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우울한 터널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깔려 있는 것이다.

지역복지 네트워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방향이나 강도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민과 관 양쪽 모두 절감하고 있었다. 아현1동의 사회복지 전문요원인 황은경씨는 “이번 조사가 보건쪽에 초점이 맞춰져 내 일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실태조사나 지원활동이 도움이 되고 유기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있다. 특히 복지관 등에서 지원할 경우 구체적인 내역에 관해 동사무소에 꼭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나 개별 단체들이 지원 의사를 밝혀올 때가 있는데 특정 가구에 집중되지 않고 따스함을 고루 나누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했다. 황씨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 등 약 200가구 지원 및 조사 사업을 혼자서 맡고 있다.

관은 민간 네트워크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민의 조사사업이 주로 수요자들의 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생기는 정보의 왜곡을 막는다. 읍·면·동의 사회복지 전문요원들은 간혹 수급자 가운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적지 않은 금융자산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한 경험이 있다. 지원을 중단하면 “네 돈도 아닌데 왜 그리 야박하게 구느냐”고 하고, 원칙 적용에 느슨한 구석이 비치면 “네 돈이 아니라고 마구 쓰느냐”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해 아현1동 조사와 지원 사업을 주도한 마포연대 설현정 사무국장은 “빈부격차의 심화, 빈곤의 세습 등은 구조적인 문제다. 빈곤층 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이 일회성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번 활동으로 단기적으로 파편적인 방안이 아니라 복지제도, 민간자원, 공공 인프라가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이것이 지역사회에 밀착된 형태로 가동돼야 함을 느낄 수 있었다. 즉, 지역사회의 활용 가능한 자원들을 찾아내고 모으는 지역복지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 조사의 헛점, 관에서 매워야

최근 지역복지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취약한 중앙과 지방 정부의 사회 안전망의 빈틈을 민간 영역에서 촘촘히 만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호 한국도시연구소 주민운동실장은 “지역복지운동에서 중요한 과제는 지역 내의 다양한 자원들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라며 “서로간의 자원교류를 통해 보다 전문적이고 알찬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를 보다 공동체적으로 만드는 데에도 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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