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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자적 소신은 어디로 갔나

등록 2004-12-10 00:00 수정 2020-05-03 04:23

김대환 노동부 장관과 정운찬 서울대 총장의 ‘전혀 다른 모습’…민교협 경고조처, 제명 여부 주목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교수 시절 개혁 성향의 학자로 평가받던 정운찬(58) 서울대 총장과 김대환(55·전 인하대 교수) 노동부 장관이 입길에 오르고 있다. 이들의 최근 행동이 학자 시절의 소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지난 12월3일 대학교수 사회의 대표적 진보단체인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회장 서울대 김세균 교수)로부터 경고 조치를 통보받았다. 김 장관과 정 총장은 민교협 창립 멤버로서 이 단체를 대표하는 교수들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민교협은 “두 회원이 민교협의 회원 신분을 유지하면서 권력의 편에 서서 민교협의 명예를 훼손하고 민교협의 목적에 위배되는 활동을 했다고 판단된다”며 “12월28일 열릴 중앙위원회에서 이들의 제명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교협이 회원에 대해 징계 조치를 내린 것은 지난 1987년 창립 이후 처음이다.

재벌해체 주장하다 공무원노조 탄압

1987년 ‘6월항쟁’의 산물인 민교협은 그동안 대학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 단체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보수 일색인 국내 학계에 진보적 이론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들은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실천하기 위해 노동자, 농민 등 소외 계층과의 연대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김 장관과 정 총장도 민교협 회원으로서 이런 개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나 이번 조치로 그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김 장관은 비정규직과 공무원노조에 대한 대처 방식이 징계 사유로 거론됐다. 민교협은 “김 장관이 비정규직의 양산을 가져올 노동 관련 법안을 주도적으로 발의하고,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공무원노조를 탄압하는 데 앞장선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노동자·민중의 권리 신장을 위해 활동해온 민교협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민교협 관계자는 “김 장관의 최근 모습은 민교협 회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라며 “너무나 급격하게 변해서 뭐라고 평가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김 장관은 인하대 교수 시절 각종 토론회나 신문 기고를 통해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재벌 해체를 일관되게 주장해 진보진영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재벌 해체는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97년 5월 학술단체협의회 주최 ‘6월항쟁과 한국사회 10년’ 토론회 등), 노동자의 경영 참여는 노동의 인간화와 그에 따른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제도적으로 꼭 보장돼야 한다(97년 9월1일 )는 것이다. 그는 또 노동자의 희생만 강조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에도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보호하려면 정부의 노동정책이 산업정책에 종속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소신은 진보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높이 평가돼 진보적 학술단체인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와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을 맡게 됐고, 참여정부의 첫 공정거래위원장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김 장관의 이런 ‘경력’은 노동계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이해가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는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난다. 단병호 의원(민주노동당)은 “당시 김 장관에 대한 노동계의 일반적 평가는, 좌파는 아니지만 매우 균형감각이 있는 개혁 성향의 학자라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우편향적으로 가고 있다. 노동정책이 시장논리에 따라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다”고 비판했다. 김 장관의 고교 동창인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학자로서의 소신은 온데간데없고 관료로서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았다”고 혹평했다.

>“개혁적이지 않은데 과대평가 됐다”

김 장관쪽은 이런 지적에 곤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학자와 장관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정책을 집행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학자 때의 소신과 다를 수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비정규직 법안은 권기홍 장관 때 만든 것인데, 후임 장관으로서 전임자가 만든 것을 고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공무원노조 문제는 행자부가 주관부처이기 때문에 김 장관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 장관쪽은 민교협의 조치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김 장관도 장관으로서 소신에 따라 행동할 뿐인데, 학자의 소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민교협이 징계 운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라고 꼬집었다.

김 장관이 최근 민주노총의 총파업 사태와 관련해 쏟아낸 발언을 보면 그의 ‘변신’의 폭을 더욱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김 장관은 공무원노조의 파업이 실패한 지난 11월17일 기자간담회에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계 스스로의 성과가 아니라 대학생, 넥타이부대, 야당, 재야세력 등이 나서서 만든 민주화 공간에 편승한 것”이라며 “민주화가 노동운동만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노동계의 전술에 대한 비난을 떠나 노동계의 도덕적 근거를 부인하는 것이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 발언은 우리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얼마나 천박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며 “(김 장관은) 참여정부의 장관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노동계에서는 김 장관의 최근 모습이 그의 본래 소신에서 나온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는 전혀 개혁적이지 않은데,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과대포장됐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이갑용 울산 동구청장은 “민교협 멤버 중에서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분은 고 김진균(서울대) 교수나 오세철(전 연세대 상경대학장), 김세균(서울대), 김수행(〃) 교수 정도”라며 “김 장관은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는 그냥 평범한 학자였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정운찬 총장은 김 장관과 달리 학내 문제로 민교협의 징계를 받았다. 정 총장은 김민수 전 서울미대 교수의 복직 문제와 관련해 교수 시절의 소신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민교협은 “김민수 교수 문제에 대한 정 총장의 처신은 학문의 자유와 대학사회의 민주화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징계 사유를 밝혔다. 김민수 전 교수쪽은 정 총장이 총장 후보 시절에 김 전 교수의 복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한다.

김민수 전 교수 복직 뒤집었나

특히 정 총장은 김 전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지난 98년에 김세균, 김수행 교수 등과 함께 김 전 교수의 복직을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98년 8월24일에 작성된 김 전 교수의 복직을 촉구하는 탄원서에는 정 총장의 이름이 ‘김민수 교수 재임용을 바라는 교수 일동’ 11명의 명단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정 총장쪽은 김 전 교수의 복직을 약속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총장 비서실 관계자는 “김 전 교수의 복직은 총장 선거공약에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약속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정 총장쪽은 탄원서에 대해 “자필 서명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탄원서 내용에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해명했다.

정 총장에 대한 민교협의 조치는 단순히 김 전 교수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 총장이 고교평준화 문제가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평준화 폐지를 역설했던 것도 교육 기회의 평등을 중시하는 민교협 교수들을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정 총장은 최근 고교등급제가 문제가 됐을 때도 정부에 ‘3불 정책’(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본고사 금지)의 재검토를 요청해 파문을 일으켰다. 정 총장쪽은 민교협의 조치에 대해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비서실 관계자는 “총장이 되는 순간 이미 교수직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민교협의 회원이 아니다”라며 “이미 사퇴했는데, 민교협에서 명예회원으로 대우하고 있다가 다시 제명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두 지식인을 둘러싼 논쟁을 바라보는 민교협 소속 교수들은 대체로 씁쓸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교수들은 김 장관과 정 총장이 학자로서의 소신을 버리고 관료주의와 쉽게 타협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김세균 민교협 공동의장은 “두 회원이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를 입증하는 사례가 된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김민수 교수 사건’이란?

정운찬 서울대 총장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김민수(43·디자인이론 전공) 전 서울미대 교수 재임용 탈락 사건의 발단은 지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전 교수는 당시 서울대 개교 50돌 기념 심포지엄에서 한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이 그를 ‘떠돌이’ 강사 신세로 만들고 말았다.
김 전 교수는 서울미대의 역사를 다룬 이 논문에서 장발 초대 학장과, 동양화과 교수 출신의 장우성·노수현을 학계에서 친일파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각주를 달아 소개했다. 이는 이태호 전남대 교수의 92년 발표 논문인 ‘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에 실린 내용으로 실증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김 전 교수는 이 논문을 발표한 뒤 선배 교수들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일부 교수들은 이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 전 교수는 “당시 미대 교수 회의에 나가 친일 문제를 거론한 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기도 했다”며 “내가 학문의 자유를 거론하며 뜻을 굽히지 않자 논문집에도 실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전 교수는 2년 뒤인 98년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당시 재임용 대상자는 42명이었는데 탈락자는 김 전 교수가 유일했다. 미대쪽은 그의 탈락 사유에 대해 “연구 내용이 부실했다”고 밝혔지만, 김 교수가 재임용을 위한 연구실적 최저요구치의 4배나 되는 단행본과 논문을 제출했다는 점에서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서울대 교수협의회는 김 교수가 96년에 발표한 문제의 논문 때문에 ‘괘씸죄’에 걸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미술계에서도 김 전 교수가 미술계에서 가장 예민한 ‘원로들의 친일 문제’를 거론해 재임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법정싸움으로 비화해 6년 동안 답보 상태에 있던 김 전 교수 사건은 최근 최순영 의원(민주노동당)의 ‘폭로’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서울대는 당시 김 전 교수 재임용의 3차 심사를 학외 인사에게 의뢰했다고 밝혔는데, 최 의원은 심사에 참여했던 인사가 학내 인사라는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최 의원은 “법원에 제출된 심사보고서 필체와 당시 서울미대 임용이 예정된 ㄱ교수의 인사기록카드 필체를 국내외 3곳의 감정기관에 의뢰한 결과 동일인의 것으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 전 교수에 대한 심사의 공정성은 크게 훼손된다. 최 의원은 서울대쪽에 당시 심사위원 명단의 제출을 요구했으나, 서울대는 이를 거절한 채 ”ㄱ교수는 당시 심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만 밝히고 있다. 김 전 교수 사건은 2심에서 “행정소송 대상이 안된다”며 패소했으나, 지난 4월 대법원에서 “행정소송 대상이 된다”는 취지로 파기 환송돼 현재 고등법원의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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