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정치권 일각 논의에 청와대는 벙어리 냉가슴… 김대중·박근혜 특사 카드보단 현 대통령의 결단이 중요</font>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바야흐로 ‘특사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11월2일 미 대선이 다가오면서 정치권이 마치 망망대해에서 폭풍우를 대비하는 것처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미국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을 지켜보면서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이나 존 케리 민주당 후보 가운데 누가 당선되든 북한 핵 문제 해결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고, 일이 꼬이면 이들 모두 북한을 선제공격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는 듯하다. “북한, 북핵 문제가 큰 쟁점으로 부각된 이상 미국 대선이 끝나면 누가 당선돼도 사태가 첨예한 쪽으로 발전할 수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의 기본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수수방관하고 앉아 있을 처지가 아니다.”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10월12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밝힌 내용은 집권당의 초조감을 잘 보여준다.
열린우리당, 미 대선에 초조해져
그는 이어 “북한과 주변 4개국에 한반도 평화특사를 파견하는 방안을 대통령과 협의해 추진코자 한다”면서 (대북)특사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적임자이며, 박근혜 대표도 가능할 것이라고 특사 바람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켰다. 사실 특사 문제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먼저 끄집어낸 터다. 그러나 정 장관의 발언은 이 의장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그는 10월8일 출입기자간담회에서 “남북대화 재개를 위해 특사 파견을 포함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당연하며, 남북 정상회담은 현재로서는 추진하고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에 비춰보면 특사 파견은 그저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의 선택사항이지, 특사 파견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겠다는 뜻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사 파견은 그리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대북특사는 상대방이 손바닥을 마주쳐주어야 실효성이 크다. 북한도 지금의 위기인식을 공유하고, 뭔가 공조의 필요성을 느낄 때,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축적돼 있을 때 남쪽 특사를 반길 것이고, 어느 정도의 성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김대중 정권 시절 임동원 특보가 수시로 대통령 특사로서 평양을 오갈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뢰는 화해협력의 달성이라는 대북정책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흔들림 없는 정책이 실천에 옮겨질 때만 쌓인다.
그렇다면 지금 남북 사이는 어떤가. 10월16일 을 통해 나온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담화는 현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평통은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 대안으로 내놓은 4가지 안에 대해 ‘본질상 제2의 보안법이자 반통일 악법’이라고 규정했다. 열린우리당이 내놓은 4가지 대안 모두 여전히 대화·협력의 상대이며 동족인 우리를 적대시하는 내용들로 돼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나온 결론은 이러하다. “국보법 대체입법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남조선 당국과 집권당을 과연 대화·협력의 상대로 하겠는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남북은 또 10월12일부터 사흘간 개성에서 철도·도로 연결 실무협의를 열었으나 도로 개통식 일정을 합의하지 못해 이미 합의한 10월 중 경의선·동해선 본도로의 개통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쪽은 남북간 대화가 중단된 상태에서 당국간 합의 없이 도로 개통 행사 시기 등을 확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남북 당국간 대화 중단의 여파가 경협에까지 파고들고 있는 셈이다.
물론 북한 당국의 태도가 앞으로도 요지부동일지는 두고 봐야 한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신의 기존 신념과 태도를 흔들림 없이 붙들어놓기 위해서는 현실적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북한이 처한 나라 안팎의 어려움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남쪽 당국과 정치권을 향해 거친 언사를 쏟아내면서도 얼마 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가을비료 10만t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정부도 북한의 이런 취약점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꼬인 상황에 ‘특사’는 도박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남북 당국간 대화 중단 사태가 좀더 지속될 것으로 본다. 심지어 11월2일 미 대선이 끝나도 북한은 남쪽과의 대화 테이블에 쉽게 나오지 않을 거라고 지적한다. 이제 미국과의 협상에 온 힘을 쏟으면서 담판지을 기회만 모색하다 보면 남쪽과의 관계는 더 멀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북한이 4차 6자회담 거부 이유로 내세운 남한의 핵실험 의혹 해명 요구도 이런 속셈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지난 9월16일 “남조선 비밀 핵실험 사건의 진상이 완전히 해명되기 전에는 우리의 핵무기 계획에 대해 논의하는 마당에 나갈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남쪽의 비밀 핵물질 실험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6자회담이고 남북대화고 지금은 나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제스처로 읽힌다.
또 전문가들은 지금의 교착상태 타개는 실무자 수준에서 이뤄질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특사 파견과 남북 정상회담이 그나마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배경이다. 지금은 누군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 꼬인 매듭을 풀어야지 다른 처방은 백약이 무효라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김 위원장을 상대할 만한 특사는 누구일까. 정치권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지속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은 김 위원장과 직접 대화를 나눠본 경험이 있는데다 주요한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 합의들의 실천을 촉구할 수 있는 적임자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성명에서 지적한 대로 “북핵 문제가 정치 논쟁의 중심 이슈인 상황에서 수구정당이라는 일각의 비판을 받아온 한나라당의 대표를 대북특사로 파견한다는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제안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지하고 획기적인 발상”이며 박 대표의 두 어깨에 분단의 질곡에 신음해온 한반도 민중의 평화를 위한 중대한 역할과 임무가 주어질 수 있다.
김 위원장이 과연 이들을 특사로 받아들일까. 정보기관의 한 핵심 관계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들은 ‘중재자’에 지나지 않는 만큼 남북한 당국 모두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들이 특사로 파견돼 지금의 교착상태를 풀 수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느냐. 그러나 지금 꼬일 대로 꼬인 상황에서 이들을 특사로 보낸다는 것은 도박과 다름없다. 그만큼 성과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중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직접 책임 있는 당사자끼리 만나 서로의 입장을 명확히 주고받고 주요 합의들을 얼마나 흔들림 없이 실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과 의지 그리고 결단이 중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식도 비슷해 보인다. 그는 얼마 전 이부영 의장을 만나 특사 제안에 난색을 표시하면서 “전직 대통령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직 대통령이 중요하다. 북도 나와 합의해서는 책임질 수 없을 것이다. 현 대통령과 약속해야 책임 있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반응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청와대 김종민 대변인은 10월13일 대북특사 파견 문제와 관련해 “내부에서 아직 검토된 바 없을 뿐만 아니라 방침이나 계획이 거론된 바도 없다”면서 “현재 정부 내에서 대북특사와 관련한 조치를 준비하거나 기획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의장이나 천정배 원내대표와 만찬을 함께 했을 때도 남북 정상회담이나 대북특사를 주제로 얘기 나눈 적이 없다”며 적어도 예측 가능한 시점에서의 대북특사 파견 필요성이나 계획이 정부 차원에서 논의된 바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북의 요구사항에 난처한 청와대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의 특사 파견이나 정상회담 논의는 공허할 뿐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남쪽에 먼저 특사를 보내라고 신호를 보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특사 교환이나 정상회담이 성사돼도 그 성과는 역시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북한 지도부는 남쪽 당국에 매우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족 공조와 한-미 동맹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 민족 공조와 한-미 동맹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노무현 정부가 대북특사 논란을 지켜보면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핵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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