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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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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굴린다, 천겹의 차별을 뚫고

등록 2004-09-16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인간 평등의 희망을 쏘아올리는 2004 장애인올림픽…‘보치아’ 유망주들의 함성을 들어본다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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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화합과 인간 평등을 주제로 한 2004 아테네장애인올림픽이 9월17일 개막해 12일간의 열전에 들어간다. 전세계 6천여명의 장애인 스포츠인들이 참가하는 이번 대회는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지는 장애인 최고의 축제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소외 계층인 장애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온 은 이번 대회 소식과 우리 선수들의 활약상, 장애인 스포츠 현주소 등을 아테네 현지 취재를 포함해 세 차례로 나눠 다뤄본다. - <i>편집자</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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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푸른 공이 붉은 공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흰 공 앞에 멈춰 서자 안명훈(25·뇌성마비 1급) 선수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자신이 던져놓은 붉은 공보다 상대방의 푸른 공이 흰 공에 더 가깝게 붙어 점수를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안 선수는 권철현(31) 코치에게 딱딱한 공을 주문했다. 흰 공을 가로막고 있는 푸른 공을 밀어내기 위한 선택이다. 권 코치의 도움을 받아 홈통의 높이와 각도 조절을 끝낸 안 선수는 머리에 쓴 금속 막대로 공을 밀어냈고, 공은 힘차게 굴러 푸른 공을 비껴 때린 뒤 기적처럼 흰 공에 달라붙었다. 극적인 뒤집기승! 안 선수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지난 9월8일 경기도 분당의 장애인공단 체육관은 두 뇌성마비 장애인 선수의 ‘보치아’ 실전 훈련으로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안 선수의 상대인 박성현(21·뇌성마비 1급)은 국내 대회에서 항상 안 선수를 괴롭힌 경쟁자다.

뇌성마비 장애인 ‘환상의 복식조’

지난 봄 전주에서 열린 장애인전국체전 때도 둘은 결승에서 만났다. 결과는 경험이 많은 안 선수의 승리였지만, 박 선수의 기량도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둘은 9월17일(한국시각) 개막해 30일 끝나는 2004 아테네장애인올림픽 보치아 대표선수로 나란히 선발됐다. 이번 대회에서 둘은 개인전에서 선의의 경쟁을, 2인조 경기에서는 환상의 호흡을 과시해야 하는 운명이다. 두 선수는 지난 2002년 부산아태장애인경기 때도 2인조 경기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낸 ‘환상의 복식조’다.

안명훈과 박성현은 똑같은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다.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대표선수들 중에서 가장 장애 정도가 심하다. 두 선수 모두 휠체어가 없으면 전혀 이동할 수 없고, 밥이나 물을 스스로 먹지 못한다. 목욕이나 ‘볼일’을 보는 것도 남의 도움이 없이는 전혀 할 수 없다. 둘은 장애 부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안명훈은 손과 발을 전혀 움직일 수 없지만, 박성현은 손을 약간 사용할 수 있다. 전동 휠체어를 타면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다. 보치아 경기 때도 어색하지만 손으로 공을 굴린다. 반면 안명훈은 발음은 분명치 않지만 말을 할 수 있다. 일상적인 의사표현이 대화로 가능하다.

안명훈은 3살 때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다른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의사가 ‘손쓸 틈도 없이’ 장애가 찾아왔다. “어릴 때 부모님 원망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 남동생 둘은 모두 멀쩡하거든요.” 안명훈은 특수학교인 숭덕학교에서 사회인으로 생존하기 위한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1997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업체가 부도를 맞아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어머니까지 생업 전선에 나섰지만 특수학교의 학비를 부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명훈은 1997년 종교시설로 비용이 저렴한 강원도 원주의 ‘소쩍새 마을’로 옮겼다. 인천에 있는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한동안 슬픔에 빠졌지만,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이번 대회에 코치 겸 보조자로 함께 출전하는 권철현 교사를 만난 것이다. 권 교사는 그에게 보치아를 직접 가르쳐줬다. “보치아는 나처럼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놀이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죠.” 안명훈은 보치아의 묘미에 푹 빠졌다. 자신의 힘으로 남과 경쟁할 수 있는 기쁨은 예전엔 결코 상상해본 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경기장에 당당히 선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것이었다.

금메달 따서 부모님 돕고 싶어

그러나 보치아 경기에 처음으로 출전한 날 안명훈을 응원하러 온 부모님들의 반응은 예상밖이었다. “경기에 집중하다 보면 사지가 뒤틀리거나 심하면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시고는 무척 안쓰러우셨나 봐요. 경기 끝나고 나서 선생님한테 ‘몸도 불편한 우리 애한테 꼭 이런 운동을 시켜야 하냐’고 항의하시더라고요. 나는 신나고 재미있어서 좋은데….” 권 교사의 끈질긴 설득과 안명훈의 강한 의지는 결국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고, 그들은 지금 안명훈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안명훈과 박성현의 기량은 아직 세계적 수준에는 못 미친다. 보치아 강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수들에 비하면 경력도 짧고 실력도 떨어진다. 하지만 한국 대표팀이 이들에게 기대를 갖는 것은 이들의 기량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영태 보치아 대표팀 감독은 “세계 랭킹 9위이던 두 선수가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유럽의 내로라 하는 강팀을 제치고 5위를 차지해 1년 만에 랭킹을 두 단계나 뛰어올랐다”며 “유럽 선수들에 비해 젊어서 머리가 좋기 때문에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보치아 대표팀은 지난해 세계선수권 우승팀인 스페인의 보조장비(공을 굴려 보내는 홈통)를 몰래 사진으로 찍어와 최근 두 선수에 맞게 개량화하는 데 성공했다. 권 코치가 사진을 분석해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박성현의 도우미로 출전하는 이상억(60·주몽학교) 코치가 직접 자재를 구한 뒤, 서울 왕십리의 한 기계제작업체에 맡겨 스페인팀의 보조장비와 똑같은 장비를 만들어냈다.

안명훈과 박성현은 이번이 올림픽 첫 출전이다. 그들에게는 이번 대회에서 꼭 금메달을 따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안명훈은 개인전과 2인조 경기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내 연금 상한선인 월 80만원을 지급받는 게 목표다. 그 돈이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부모님과 동생들의 품으로 돌아가 함께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아테네를 생각하면 벅찬 가슴

주몽학교 고교과정 3학년인 박성현은 대학에 진학해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는 게 꿈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대학 수시모집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지난 2000년 시드니장애인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선수들 중 대입 수험생들은 모두 수시모집에서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보치아는 이번 아테네장애인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경기다. 그래서 안명훈과 박성현의 가슴은 더욱 뛴다. 세계 각지에서 온 3천여명의 취재진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공을 굴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때마다 그들의 가슴은 희망으로 용솟음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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