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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고해성사, 통하겠느냐

등록 2004-08-26 00:00 수정 2020-05-03 04:23

국정원장이 의문사 진상 규명 의지 밝히고 나서… 시민단체는 의심의 눈길, 자료접근권 보장 요구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최근 국정원 관련 의문사에 대한 진상 규명 의지를 밝히고 나섬에 따라 군사독재 정권 때 발생한 의문사의 실체가 드러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국정원 관련 의문사 사건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원회)가 3년 가까이 조사를 벌였으나 최종길 교수 사건을 제외하고는 실체가 드러난 게 없다.

3기 의문사위 출범 저지 술책?

고영구 국정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 청산’ 발언이 나온 다음날인 지난 8월16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천주교인권위원회, 인권운동사랑방 등 7개 시민·인권단체 대표들과 만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한 시민단체 대표는 “과거사 청산 의지를 밝히고 진상 규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고 원장의 의지가 강해 보였다”며 “하지만 그날 모임에서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고 밝혔다. 국정원과 시민단체들은 조만간 다시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국정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과거사 청산 작업을 준비해왔다고 밝혔다. 국정원 관계자는 “이번 조치가 노 대통령의 8·15 경축사 발언 때문에 나왔다고 해석하는 시각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한 나라의 정보기관이 그렇게 가볍게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이번 조치가 참여정부 출범 때부터 꾸준히 진행된 개혁 작업의 결정체로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인권침해 사건을 털고 가지 못하면 국정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결코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내부에 형성돼 있다”며 “과거사 진상 규명을 통해 우리가 사과할 것은 진솔하게 사과하고, 불필요한 오해는 풀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권·시민단체들은 국정원의 이번 조치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고 있다. 그동안 의문사위원회의 자료 요청에 비협조적 태도를 보이는 등 의문사 진상 규명을 사실상 방해했던 국정원이 스스로 과거 청산을 외치고 나선 배경에는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민단체들은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한이 최근 만료됐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즉, 제3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출범을 저지하기 위해 국정원이 고도의 술책을 쓰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어차피 국정원에서 자료를 완벽하게 공개하지 않으면 진상 규명은 생색내기로 끝나게 된다”며 “이런 점을 잘 아는 국정원이 생색도 내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무력화할 수 있는 카드를 선택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발 더 나아가 국정원이 이보다 더 ‘야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국정원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인사들의 개인적 ‘약점’까지 공개해 이들의 민주화 운동 경력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군사독재 정권 때 정보기관들이 민주화 인사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자주 써먹던 방식이다. 장준하 선생의 장남 호권씨는 “국정원이 스스로 의문사를 밝히겠다고 나섰으니까 일단 지켜보겠지만, 일부러 엉뚱한 정보를 흘려 진상 규명에 냉소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스로 과거사 청산을 결심했다는 국정원의 주장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가 많다. 현재 국정원 내부의 분위기를 볼 때 아직까지 ‘고해성사’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정원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간부들은 이번 방침에 강하게 반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사독재 정권 때부터 대공·수사 부문에서 성장한 중견 간부들은 과거사를 치부로만 여길 뿐, 과거사 청산을 통한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염규홍 조사1과장은 “민변 출신의 고 원장이 현재 국정원 조직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장의 의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중견 간부들의 자발적 동의가 없다면 과거사 청산은 어렵다”고 지적했다.

자료 공개 비협조부터 사과하라

염 과장은 그 근거로 국정원의 자료 공개 비협조를 들었다. 염 과장은 “국정원이 진짜 과거 청산 의지가 있다면 자료 공개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을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정원은 장준하 선생 사건의 경우 관련 자료를 보낼 때 쪽 순서를 뒤바꿔버렸다. 워낙 정교하게 순서를 뒤바꿔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이 이를 제대로 맞추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 또 자료를 맞춰보니 군데군데 내용이 빠진 것도 있었다. 염 과장은 “국정원은 자료를 보낼 때 표지와 목차는 아예 안 보냈다. 어떤 내용이 빠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며 “장준하 사건 말고도 이런 사례가 많았는데, 고 원장은 최근까지 국정원이 자료 공개 요구에 잘 협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꼬집었다.

이 때문에 국정원의 이번 조치는 청와대의 뜻이 강하게 반영됐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고 원장의 의지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청와대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며 “국정원에는 고 원장 혼자서 상대하기에 버거운 수구세력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의지는 올 초 노무현 대통령과 과의 인터뷰에서 목격됐다. 노 대통령은 지난 2월 창간 1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국정원의 과거 청산 의지를 우회적으로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날 국정원 개혁을 언급하면서 “(국정원 개혁은) 과거에 묻혀 있는 비밀들을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국민들 앞에 공개할 것은 공개하고, 그 다음에 냉전적 시각을 불식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일찌감치 국정원의 인권침해 사건들을 털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그것이 참여정부식의 국정원 개혁”이라고 설명했다.

국정원 “자료접근권 주겠다”

국정원의 고해성사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진상 규명에 참가한 외부 인사들의 자료접근권을 전면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염 과장은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자료도 환수해서 공개해야 한다”며 “또 정권이 바뀌었을 때 폐기된 자료의 내용을 밝히고 책임자의 사과를 받아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정원은 자료접근권 보장 요구에 대해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 8월21일 의 공식 질의에 대해 “진상 규명 작업에 참가하는 외부 인사들에게 비밀취급 인가를 내주는 등 국정원 내규에서 정한 방법으로 자료접근권을 최대한 보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정원 관계자는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시민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진상 규명 작업의 원칙을 마련해나갈 것”이라며 “이번만큼은 우리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시민단체들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고해성사’가 민심을 감동시키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과거의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는 과정에서 국정원 내부의 강한 반발도 예상된다. 국정원이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진심 어린 고해성사를 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524호 ‘국정원 고해성사, 통하겠느냐’ 기사와 관련해 국가정보원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했다.

국정원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9200여쪽에 달하는 자료를 지원, 열람케 하는 등 의문사위 활동에 적극 협조했습니다. 특히 의문사위의 요청 자료 중 일부가 사인규명과 직접 관련이 없고 제3자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음에도 마이크로 필름에 보존된 자료를 의문사위에 제공했습니다. 과거사 청산 문제는 국정원이 지난해부터 강력히 추진해 온 혁신 작업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직원들 간에 폭넓은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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