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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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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은 왜 미쳐버렸는가

등록 2004-08-19 00:00 수정 2020-05-03 04:23

바닥난 산유국 추가생산 능력 · 투기자본 농간 등으로 브레이크 없는 고속질주


유가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원인을 진단한다. 20년 동안의 저유가 등으로 산유국들의 추가생산 능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데다, 투기자본도 기승을 부린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금의 국제유가는 ‘미친’(mad) 수준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의장인 푸르노모 유스기안토로의 말처럼 국제유가는 그야말로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국제유가는 지난 5월 초 배럴당 40달러(미국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기준) 돌파로 인한 충격과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벌써 50달러대 진입을 코앞에 두고 있다. 지난 8월13일 뉴욕상품거래소(Nymex)에서 거래되는 서부텍사스 중질유 9월물은 배럴당 46.58달러로, 1983년 선물시장 개장 이후 또다시 최고치를 깼다. 런던 국제석유거래소(IPE)의 북해산 브렌트유도 42.29달러로 마감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우리나라가 주로 수입하는 중동산 두바이유도 배럴당 38.91달러까지 올라 40달러 선을 눈앞에 두고 있다. 두바이유가 38달러를 넘어선 건 제2차 오일쇼크 때인 지난 81년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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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과 ‘불확실성’이 시장 지배

유가 급등으로 전세계 경제가 충격을 받고 있지만, 기름값이 너무 비싸 자동차를 못 타고 다니겠다고 운전자들이 아우성을 치거나 대형 승용차 대신 연비가 높은 소형차를 구입하려고 줄서는 풍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요즘의 유가폭등세는 1, 2차 오일쇼크 때와 견줘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기름값의 실질 가격을 보자. 유가가 명목가격으로는 사상 최고치를 깨고 있지만 달러화 환율과 과거 20∼30년간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1, 2차 오일쇼크 때에 비해 아직은 낮은 수준이다.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1차 오일쇼크(1973년 10.90달러) 때 유가는 약 50달러, 1990년 걸프전(1990년 38달러) 당시는 60달러, 2차 오일쇼크(1980년 41달러) 때는 약 90달러에 이른다. 따라서 실질가격으로 따지면 1차 오일쇼크 때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세계 경제의 석유소비 의존도가 낮아졌고 석유소비 효율화로 유가 급등이 경제에 미치는 쇼크는 1, 2차 오일쇼크 당시에 비해 훨씬 줄었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유가는 어느 정도 감당할 있는 수준이지만 배럴당 100달러까지 오르면 세계 경제가 결딴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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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국제 원유시장을 수요-공급 측면에서 보면 1분기에 하루 30만 배럴, 2분기에 하루 150만 배럴 ‘공급 과잉’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의 폭발적인 석유소비 증가 등 전세계 경기 회복에 따라 석유 수요가 크게 늘고 있지만 시장 펀더멘털로 보면 아직 공급 과잉인 것이다. 결국 지금은 과거의 오일쇼크와 달리 갑작스런 공급 차질 없이 유가 상승세가 장기화되는 형국이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에는 하루 430만 배럴, 2차 오일쇼크 때는 하루 560만 배럴 공급 차질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재의 유가 급등은 수급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정치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패닉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석유공사 해외조사팀 구자권 팀장은 “최근 고유가 상황은 공급 차질이나 대응 능력, 유가상승 속도와 수준 면에서 두 차례의 오일쇼크 상황과는 다르다”며 “3차 오일쇼크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라크 사태 악화로 원유 공급이 전면 중단되는 시나리오가 전개되지 않는 한 ‘3차 쇼크’로까지 빠져들 가능성은 낮다는 얘기다.

현재 국제유가 시장을 지배하는 건 ‘불안감’과 ‘불확실성’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막연한 불안감이 팽배해 유가 ‘거품’이 형성되고 있는 건 아니다. 유가 급등의 한복판에는 석유공급 시장의 잉여생산 능력이 바닥에 달했다는 관측이 퍼져 있다. 그만큼 석유 수급이 빡빡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터지는 작은 악재에도 국제유가가 고공행진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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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유가 체제가 추가생산 능력 약화해

OPEC은 당초 생산 쿼터가 하루 2350만 배럴(이라크 제외)이었으나 지난 5월 유가가 급등하자 7, 8월에 증산을 결정해 생산 쿼터를 하루 2600만 배럴로 늘렸다. 쿼터만 늘린 게 아니라 실제로 산유량도 크게 늘렸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를 뺀 나머지 OPEC 회원국(이라크를 뺀 10개국)들은 추가로 생산할 만한 여유가 바닥난 상황이다. 시장에는 OPEC이 이미 생산능력을 총동원해 증산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를 제외한 잉여생산 능력이 하루 100만 배럴 수준에 불과하다는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수요-공급과 관련해 OPEC 의장,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 베네수엘라 석유장관, 중국 당국자 등 주요 산유국과 소비국 관계자의 발언이 한마디씩 나올 때마다 유가가 급등하는 양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러시아 최대 석유재벌 유코스사의 파산위기 역시, 비록 유코스의 생산량이 전세계 수요의 2%에 불과하지만 러시아에서 원유공급 중단 사태가 터질 경우 OPEC의 추가생산 능력이 바닥난 상태라서 대응할 카드가 없다는 점이 유가 폭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게다가 OPEC이 하루 150만∼200만 배럴 추가생산 여력이 있다고 발표하거나 사우디아라비아쪽에서 추가공급 능력이 있다고 말해도 시장은 이를 ‘빈말’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일하게 잉여생산 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조차 추가생산 능력이 하루 35만 배럴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작은 규모라도 공급 차질이 빚어질 경우 이를 방어할 ‘완충제’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추가생산 능력이 고갈된 상황에서 잇단 통계전망 수정도 유가 폭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해 10월 중국의 석유 수요가 올해 100만 배럴가량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그 뒤 120만 배럴, 160만 배럴, 230만 배럴, 250만 배럴 식으로 매월 전망치를 바꾸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부가 자국 석유수요량을 제때 제출하지 않으면 IEA통계에서 빠지는 일도 생기는데다, 중국은 OPEC 회원국이 아니라서 자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해 추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SK경영경제연구소 김세진 연구원은 “중국의 석유 수요량이 얼마나 되는지 도대체 알 수 없고, 작은 물량이라도 추정했던 것보다 틀리면 그때마다 ‘어, 이게 아닌가 보다’하는 분위기가 퍼져 유가가 큰 폭으로 뛰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원유시장에서 추가생산 능력이 바닥 수준으로 떨어진 이유는 뭘까? 전세계 원유 중 OPEC 생산량은 40%, 러시아 등 비OPEC 국가들의 산유량은 60%에 이른다. 비OPEC 국가는 쿼터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생산능력을 풀 가동해 원유를 있는 대로 시장에 뿌려왔다. 비OPEC은 원유가격이 15달러 이상만 되면 생산에 들어갈 유인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OPEC은 석유가격을 지키기 위해 회원국별 쿼터를 배정했지만 일부 회원국이 쿼터 합의를 상습적으로 깨고 생산량을 늘려왔다. 이럴 경우 게임의 룰을 지켰던 회원국도 “한번 해볼 테면 해보자”며 배반에 대한 보복 전략으로 증산에 나섰고, 이에 따라 유가가 더 폭락하게 되면 위기감을 느낀 회원국들이 모여서 또다시 감산에 합의하는 과정을 되풀이해왔다. 이런 사정 때문에 지난 20여년 동안 배럴당 15∼20달러대의 ‘비정상적인’ 저유가 체제가 지속된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들어 OPEC 카르텔은 다시 뭉쳤다. 만신창이가 된 OPEC이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안되겠다”고 반성하고 재결속에 나선 것이다. 특히 상습적으로 합의를 깨던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좌파 정권이 들어선 뒤 오히려 OPEC을 이끌면서 석유가격을 올리는 대표적 국가로 부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고유가 체제로 지난 5년간 생산을 20% 줄였는데도 OPEC의 수익은 오히려 50% 이상 높아졌다. 굳이 많이 생산해 파는 것보다는 조금씩 적게 팔면서 오랫동안 많은 이익을 내는 게 더 낫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고유가의 매력 깨달은 OPEC

그러나 ‘고유가 체제’로의 OPEC의 전략 변화와 더불어 이제는 OPEC이든 비OPEC이든 증산이 한계에 봉착해 수급 불안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석유자본은 그동안 저유가 시대에 채산성이 안 맞자 석유개발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옛 유전이 고갈되면 옆의 다른 유전을 파서 송유관을 깔고 도로를 연결해야 하는데, 저투자로 인해 추가생산 능력이 소진되고 만 것이다.

OPEC의 추가생산 능력이 한계에 이른 상태를 틈타 이때다 싶게 원유 선물시장을 휘젓고 있는 투기자본도 유가 급등을 이끌고 있다. 실물시장에서 하루 150만 배럴 초과 공급인 상황인데도 유가가 급등하는 건 헤지펀드 등 투기세력이 뛰어들어 베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뉴욕상품거래소에 따르면, 원유선물 순매수 포지션(Net-Long)은 유가가 42달러로 치솟았던 지난 6월1일 6만5천 계약이었으나, OPEC의 증산 결정으로 유가가 하락하자 6월29일 1만4천 계약까지 감소한 뒤 8월 초 4만 계약으로 다시 늘었다. 원유시장에서 활개치고 있는 투기자금은 전세계적인 저금리에다가 달러 약세가 이어져 금융시장 수익률이 떨어지자 지난해부터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석유시장으로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투기자본은 중동 불안 등 리스크가 터질 때마다 원유 선물시장에 막대한 자금을 찔러넣어 리스크 프리미엄을 챙기고 있다. 석유공사 구자권 팀장은 “석유시장에서 움직이는 투기자본의 규모를 추정하긴 어렵지만 원유 선물시장은 금융시장에 비해 덩치가 작기 때문에 몇십억 달러가 움직여도 출렁거리게 된다”며 “투기세력에 원유시장이 끌려다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특히 중동 산유국들과 투기자본이 결탁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SK(주) 원유팀 관계자는 “수급 이외의 요인 때문에 유가가 배럴당 7∼8달러 정도 과대 평가돼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산유국이 선물시장에서 플레이하려면 특정 펀드에 뒤에서 돈을 대주는 형태가 될 텐데, 투기자본에 산유국 자금이 섞여 있다는 건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라크 상황이 가장 큰 변수

앞으로 국제유가 흐름을 좌우할 가장 큰 변수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꼽히는 이라크다. 이라크는 하루 280만∼300만 배럴 생산능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테러 공격으로 인해 향후 170만 배럴로 뚝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반면 이라크 사태가 안정되면 1∼2년 안에 하루 100만∼200만 배럴 정도 추가 생산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노후한 석유생산 시설을 복구하고 미국자본이 들어가 이라크에서 석유를 마구 캐내기 시작하면 유가가 급락세로 돌아설 가능성도 있다. 또 고유가 체제로 수익성이 높아짐에 따라 석유개발 자본이 새 유전 발굴에 본격 나서고 있고, 유가가 30∼40달러 이상 돼야 생산에 들어갈 수 있는 유전도 가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장기적으로 공급이 크게 늘어날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50달러대에 육박하는 ‘초고유가’는 OPEC 스스로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유가가 지나치게 폭등하면 세계 경제가 침체되고 전세계가 대체에너지 개발에 주력하게 돼 석유 수요는 둔화되고, 결국 석유값이 떨어져 OPEC의 수익성도 악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추가생산 능력’과 ‘목표 유가’는 OPEC의 2대 비밀인데, 요즘은 급하니까 OPEC이 추가생산 능력을 연일 발표하고 있다. 이문배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OPEC이 고유가 체제로 전환한 건 맞지만 기대한 고유가보다 더 높은 40달러대가 지속되고 있다”며 “배럴당 35∼40달러대 이상은 OPEC도 부담스러워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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