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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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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 스태그플레이션

등록 2004-08-13 00:00 수정 2020-05-03 04:23

경기불황에 기름값 급등 겹치며 위험 고조… 정부도 뾰족한 정책수단 갖고 있지 못해

▣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밖에 내다팔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실업은 무엇보다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또 직장이 있든 없든 물가가 오르는 것은 물가상승률만큼의 소득을 사실상 빼앗기는 것으로,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미국의 경제연구기관인 와튼계량경제연구소는 매년 각국의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을 합해 ‘고통지수’라는 이름으로 발표를 하고 있다. 고통지수는 연구기관에 따라 산정 방식이 다르지만, 특별한 설명 없이 고통지수라고 할 때는 바로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합한 수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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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물가 7% 상승

한국인들의 고통지수가 올 들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고통지수를 끌어올리는 것은 실업률보다는 물가다. 지난 6월의 실업률은 3.2%, 연초의 3.7~3.9%에 비하면 체감경기가 나빠지는 가운데서도 지표상의 실업률은 오히려 좋아지고 있다. 그러나 물가쪽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해 같은 달에 견준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올해 초엔 3.3~3.4%대였으나 7월에는 4.4%까지 뛰어올랐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7월까지 이 정도라면 물가 급등이라고 할 만하다.

물가상승세는 결코 심상치 않다. 한국은행은 애초 올해 물가상승률이 3% 정도에서 안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가 7월 들어 전망치를 대폭 수정한 바 있다. 하반기에 전년 대비 3.9% 올라, 연간으로 3.6%가량 오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망대로 물가가 안정되기는 이미 어려워 보인다. 원자재 가격 상승의 영향을 직접 받는 생산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7월 현재 전년 동월 대비 7.0% 올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크게 웃돌고 있다. 특히 공산품은 8.5%나 올라 있다. 물가 상승 요인이 아직 소비자 물가에 다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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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이 환율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물가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재정경제부는 거시경제를 책임지는 곳이지만,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을 책임지는 기관이다. 재경부는 내수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수출이라도 늘어야 고용이 유지될 것이라며, 다른 부작용이 있더라도 환율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외국에 파는 우리나라 제품의 달러표시 가격이 낮아져 가격경쟁에서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환율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의 가격을 끌어올려 국내 물가에 악영향을 준다. 한국은행은 “환율 상승이 오히려 설비투자를 위축시킨다”며 재경부의 환율 정책에 이의를 달고 있지만, 핵심은 역시 물가 때문이다.

과거 오일쇼크와는 다르지만…

재경부가 이동통신 회사들에 요금 인하를 압박하는 것도 물가상승률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서다. 재경부는 지난 2002년과 2003년에도 이동통신 회사들로 하여금 요금을 7~8%가량 떨어뜨리도록 유도해, 물가상승률을 낮추는 데 활용한 바 있다. 그것이 이동통신 회사들의 수익에 별 영향이 없었던 만큼, 올해도 두 자릿수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이동통신 회사들은 늦어도 10월께는 요금을 내릴 예정이어서, 소비자물가지수의 상승률을 낮추는 데 또 한번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가지수를 둘러싼 이런 신경전은 최근 한국 경제를 휘감고 있는 검은 그림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 물가가 오르는 데서 끝나지 않는, 심각한 사태의 징조가 엿보이고 있다. 바로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반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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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 경제의 고민은 내수 침체와 투자 부진이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풀리기도 전에 한국 경제는 기름값의 상승이라는 또 다른 충격에 짓눌리고 있다. 최근까지도 유가 급등은 어디까지나 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자동차 이용자들은 기름 소비에 매우 높은 세금을 내고 있어서, 기름값 상승에 누구보다 먼저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름값 상승의 여파는 이제 자동차 이용자를 넘어 경제 전체로 서서히 번지고 있다. 사실 높은 물가상승률 자체가 기름값 상승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원유수입량은 8억600만 배럴로, 평균 도입단가는 배럴당 28.65달러였다. 총원유수입액은 230억달러에 이르렀다. 따라서 원유가가 10% 오를 경우, 우리나라의 경제주체들이 추가 부담해야 할 돈은 23억달러에 이른다. 세금이 줄든, 국민의 실질소득이 줄든, 기업의 이윤이 줄든 누군가는 그 부담을 져야 한다. 단지 우리나라가 외국에 제품을 수출할 때 석유값이 오른 부분을 반영할 수 있는 만큼만 부담이 감소된다.

문제는 올 들어 석유 가격의 상승세가 예상했던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서부텍사스중질유(WTI) 익월물 선물 가격은 연초 배럴당 31.89달러였다. 그러던 것이 8월 들어서는 44달러 안팎까지 치솟았다. 상승률은 40%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로 중동에서 석유를 도입하기 때문에, 도입 가격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것은 두바이(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의 원유 가격인데, 두바이유도 연초 29달러대에서 최근 38달러 이상으로 올랐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물가상승 속에 경기 불황이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이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원리는 이렇다. 기업은 원자재(기름값) 가격 상승으로 인한 부담 때문에 부득이 상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물가가 오른다. 그러나 시장 경쟁 때문에 비용 상승을 전부 가격에 전가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채산성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생산, 즉 고용을 줄이게 된다. 결국 경제가 석유 가격 상승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함께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정부는 낙관적인 전망

물론 최근의 기름값 상승률을 가지고 과거 오일쇼크 때와 같은 경제적 충격을 말하기에는 이르다. 지난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는 기름값 상승률이 전년 대비 126%, 1979~80년의 2차 오일쇼크 때는 상승률이 64.4%에 이르렀는데, 올 들어 상승률은 그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미 한국 경제가 미국 등 선진국 경제와 달리 스태그플레이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 5일 발표한 ‘2004년 하반기 이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하반기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을 상반기의 5.4%(예측치)보다 낮은 4.6%로, 내년 성장률은 그보다 훨씬 낮은 3.7%로 내다봤다. 이 정도면 회복하던 경기가 다시 급랭한다는 얘기가 된다. 모건스태리는 내년 우리 경제의 성장률이 3.8%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으며, 특히 7월 중순과 8월초 낸 보고서에서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관리들은 민간연구소와는 달리 비교적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헌재 부총리는 지난 8월6일 열린 정례 브리핑에서 “올해 5%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며, 내년에도 잠재성장률 수준인 5.2~5.3%의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총리는 “배럴당 30달러대의 유가는 올해 상반기 5%대 중반의 성장률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소비와 투자, 생산 등에 이미 충분히 반영됐다”며 “물가도 충분히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있어 전통적 의미의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부총리의 발언은 기름값이 더 이상 고공 비행을 하지 않고, 각종 정부 대책이 예상대로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나온 것이다. 또 가뜩이나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정부까지 불안심리를 키울 수는 없는 사정도 감안해 읽어야 한다.

기름값이 얼마나 더 오를지를 예측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8월 들어 기름값이 6월 초의 전고점인 42달러대를 넘어섰다는 것은 아주 불길한 징조다. 가격 상승을 막을 심리적 저항선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홍익대 전성인 교수는 “미국이나 중국이 기름값 상승의 영향을 덜 받는다면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요인으로 경제의 활력이 크게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기름값이 오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름값 상승의 충격이 다른 나라보다 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물가와 실업률 사이의 선택

걱정스런 것은 기름값 상승으로 인한 충격에 대해서는 정부로서도 뾰족한 정책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기름값 상승의 여파는 경제주체들이 그 부담을 최종적으로 나눠지는 순간까지 경제를 교란하게 된다. 전 교수는 “어차피 뺨은 맞아야 한다. 단지 어느 쪽 뺨을 내밀 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물가 안정쪽에 좀더 초점을 두고 실업률의 상승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실업률의 악화를 막기 위해 물가 상승을 용인하느냐의 선택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악재는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올해는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했던 한국 경제는 지금 돌파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자꾸만 쫓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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