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의문사 결정에 불거진 색깔논쟁… 한국 민주화의 수준 판단하는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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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에 대한 ‘마녀사냥’이 진행 중이다. 의문사위가 비전향 장기수 3명을 의문사로 결정하면서 온 나라가 때 아닌 색깔 논쟁으로 들썩인다. 언론에는 ‘간첩’과 ‘빨갱이’라는 해묵은 단어가 실로 오랜만에 등장했고, 이른바 보수단체들은 앞다퉈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의문사위의 결정에 대한 견해는 그 사람의 ‘성향’을 판단하고, ‘너는 어느 쪽이냐’를 규정하는 잣대가 되어버렸다.
‘너는 어느 쪽이냐’ 규정하는 잣대
논란은 지난 7월1일, 의문사위가 1970년대 사상전향 공작 과정에서 숨진 최석기·박융서·손윤규씨 등 비전향 장기수 3명에 대해 의문사 인정 결정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들 비전향 장기수는 군홧발로 짓밟고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가혹한 전향 공작에 맞서다 죽음에 이르렀다.
의문사위는 남파 간첩과 빨치산 출신인 비전향 장기수들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설명하면서, 우선 사상전향제도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사상전향제도는 좌익 수형자에게 기존 사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질서 및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적극적으로 수용·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제도다. 물론 ‘말로만’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향서’라는 문서를 써야 했고, 이러한 사상의 변화를 공식적으로 선언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향을 거부하면 처참한 고문과 가혹행위가 뒤따랐다.
의문사위의 논리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다. 의문사위는 사상전향제도가 민주주의의 대전제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사상전향제도가 한 인간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이분법으로 단순 분류하면서 폭력과 고문을 동원해 인간의 주체성을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비전향 장기수들이 목숨을 바쳐 저항한 끝에 위헌적인 사상전향제도와 이를 대체한 준법서약서가 폐지된 것도 사실이다. 의문사위는 이들의 저항이 “우리 사회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국가 공권력에 의해 강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요컨대 비전향 장기수는 권위주의 체제의 위헌적 행위에 저항하다 국가 폭력에 의해 숨진 만큼, 민주화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은 복잡하고 또 거칠었다. 가장 즉자적인 모습은 이른바 보수단체들의 집회다. 발표 이후 의문사위가 자리한 서울 종로구의 한 건물 앞은 매일 다른 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붐빈다.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가 의문사위 간부들과 공개 설전을 벌이는가 하면, “의문사위 해체”부터 “의문사위 전원 할복 자살”이라는 섬뜩한 구호까지 등장했다. “뒤통수 조심하라”는 협박은 오히려 ‘애교’에 속한다. “시너 뿌리면 잘 타겠다” “방금 초산 들고 올라갔다”는 등 협박 전화가 이어지면서 업무에 지장까지 줄 정도다. 최근에는 한상범 위원장 등 의문사위 위원들에 대한 ‘체포조’가 결성됐다는 첩보가 접수되면서, 경찰이 신변 경호에 들어가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간첩=민주인사’라는 공식이 성립되면서 또 다른 ‘국가의 희생자’들도 역차별을 당한다며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월남참전고엽제전우회 소속 회원 100여명은 “우리도 아직 피해보상을 못 받고 있는데, 어떻게 남파 간첩과 빨치산에게 보상을 해줄 수 있느냐”며 의문사위 앞에서 거칠게 항의했고, ‘구월산 유격대’로 알려진 육군첩보부대 전우회 역시 “‘간첩’들은 민주인사로 인정되는데도 국가를 위해 특수 임무를 수행했던 자신들은 무시당한다”며 “정부는 첩보부 대원들을 국가 유공자로 대우하고 합당하게 보상하라”고 주장했다.
명예회복법이 제시한 ‘민주화운동’의 범위
의문사위 결정에 대한 문제제기는 두어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남파 간첩이나 빨치산이라는 애초 ‘신분’이 문제다. “민주적 헌정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던 민주화운동 희생자들과 민주적 헌정질서 파괴를 위해 남파된 간첩의 죽음이 동일시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의문사위는 이들의 전력과 행위는 다른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의문사위는 “이들이 전향을 거부한 이유가 북에 있는 가족 때문이었는지 사상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그리고 그들의 사상 문제가 전향제 폐지라는 결과적 행위를 평가하는 데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양심의 자유를 지키려다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공권력에 의해 인권을 침해당하고 끝내 가혹한 전향 공작으로 숨진 것까지는 인정하되, 이를 민주화운동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주화운동을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한 정치운동’으로 한정짓는 일반적인 견해와 ‘민주주의의 근본을 구현하는 행위’라고 보는 시각의 차이가 바탕에 깔려 있다.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보통 민주화운동을 말할 때 반유신, 반군부독재만 생각하는데 이는 지극히 축소된 정치적인 의도”라고 잘라 말한다.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행위에는 반독재 운동에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양심과 사상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는 행위도 포함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해석이다. 또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인권임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안 교수는 “전두환, 박정희가 없어진다고 민주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단지 표면적인 타깃일 뿐, 진정한 민주사회는 헌법 정신이 구현된 사회이고, 민주화운동은 이에 도움이 되는 행위”라며 “민주화운동을 단순히 반독재 정치운동으로 국한해서 시비를 거는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사회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고 꼬집었다.
법안을 살펴보더라도 논란의 불씨가 된 ‘민주화운동’을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명예회복법 2조 1항은 “69년 8월7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 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항거’의 의미는 “학교, 언론, 노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사용자나 기타의 자에 의하여 행하여진 폭력 등에 항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권력의 통치에 항거한 경우”(명예회복법 시행령)를 포함하고 있다. 즉, 비전향 장기수들의 죽음은 시기적으로 ‘69년 3선개헌 이후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벌어진 일이며, 부당한 폭력에 저항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했다’는 관련성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진정한 체제 우월성은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이번 결정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는 좌표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됐던 사상범 문제에 대한 대응이 민주화의 ‘마지막 장벽을 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이 사안은 국가의 도덕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비전향 장기수는 국민이길 거부했지만, 국민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국가는 인권이라는 보편타당한 잣대를 적용해 ‘빨갱이’마저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해야 한다. 체제의 우월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해석에 대한 이견은 엉뚱하게도 의문사위 존폐 문제로 번지는 양상이다. 3기 의문사위의 출범을 두고 보수언론과 정치권에서 ‘재검토’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번 비전향 장기수 문제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지만, 사실 의문사위는 과거 권위주의 통치 아래에서 일어난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해 지난 2000년 10월 출범한 조직이다. 의문사위는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받다 숨진 고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고, 허원근 일병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는 등 국가 폭력으로 인한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는 성과를 거둬왔다. 그러나 조사 권한이 없어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 국방부 등 관련 기관들의 비협조에는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조사 권한 강화와 대상 확대, 실질 조사기간 보장 등은 출범 당시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은 지난 6월30일,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96명의 동의를 얻어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숙원사업’이던 의문사위의 조사 권한 강화와 조사대상 확대를 뼈대로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원혜영 의원도 조사대상을 확대한 내용의 의문사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이번 논란이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의 경우 개정안에 서명한 의원들 일부가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하는 등 법안 통과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보수언론에서는 “의문사위가 ‘의문’스럽다”며 여론몰이에 앞장서고 있다. 의문사위를 둘러싼 논쟁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번 민주화운동 논란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민주화의 수준을 판단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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