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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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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게 거북한 나라

등록 2004-06-17 00:00 수정 2020-05-03 04:23

해외원조나 국제연대에 뒷짐 지는 한국… 아시아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라

엄기호/ 우리교육 정보자료팀장 · 전 팍스로마나 아시아팀 활동가

국제연대운동을 하는 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 있다. 이제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어떤 몫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강조할 때마다 평범한 시민부터 정부관료까지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하다. 먼저 한국이 이제 그 정도의 국제적 위상이 되었다는 것에 몹시 뿌듯해한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면 ‘우리 사회에도 아직 결식 어린이가 얼마나 많은데…’ ‘아시아를 돕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우리 동포인 북한부터…’라는 대답이 한결같이 돌아온다. 가히 ‘우리 민족 우선주의’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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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우선주의’라는 변명

그러나 ‘우리 민족 우선주의’가 정말 우리 민족 내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의식이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성적 소수자의 경우, 한국은 아직도 미국이나 유럽의 단체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북한을 돕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 민족 우선주의’는 민족 외부와 연대하는 것을 외면하는 변명거리에 불과하다. 왜 그럴까?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한국은 참 ‘다름’과 함께하는 것에 서투른 나라이다. 이미 한국 안에 수십만명의 이주노동자가 살고 있고, 아프리카에서 남미까지 한국 기업과 한국인이 진출해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말이다.

아마 ‘다름’에 서투른 이유 중에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지리적 특성이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섬나라나 다름없다. 반도국가라지만 북쪽은 북한에 의해 막혀 있고, 해외여행이 자율화될 때까지는 외국과의 일상적 접촉이 거의 차단돼 있었다. 거기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경험은 외국은 곧 잠재적 침략국이라는 무의식이 됐다. 또 이 네 나라의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이 네 나라를 제외하곤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한국에게 세계, 외국은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사회와 중국, 일본, 러시아였다. 여기에 스리랑카나 버마 같은 아시아 나라는 달나라보다 더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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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장벽 또한 존재한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을 여행하거나 국제회의에 참석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영어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가 훨씬 많고, 영어가 안 통하는 나라가 많은데도 워낙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훈련돼 있는 터라 영어를 못하는 것이 곧 의사소통의 불능이라고 생각하고는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영향 때문일까? 사실 평범한 시민에서 국가 관료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극단적으로 이중적이다. 이른바 잘사는 나라에 대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낮추어 바라본다. ‘우리도 이만큼은 살잖아’라고 항변하면서 실제로는 서구나 일본 등 잘사는 나라에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한국이 아주 못사는 나라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다른 한편 못사는 나라에 대해서는 한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한국의 위치를 제대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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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의 위치는 아주 애매하다.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 것이다. 무역이나 개발과 관련된 국제 의제에서 어느 쪽의 입장을 취하기도 참 애매하다. 한국 내의 사회 문제 역시 선진국형도, 후진국형도 아니고, 그 어느 쪽의 의제와도 비슷하지 않다. 그러니 어디에도 적극적으로 끼어들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에이즈 문제의 경우 한국의 전개 양상은 선진국과 후진국, 양쪽 모두와 아주 다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나누면서 같이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시민단체의 연대운동 싹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독특한 위치를 잘 활용하여 어떤 역할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 자리는 차지하고 있지만 도대체 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허다하다.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이사국인 한국이 인권과 관련된 결의안을 발의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버마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가장 좋은 친구라던 김대중 정부 때도 버마 인권과 관련된 결의안에 적극적인 의사 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몇 차례나 유엔 인권위 회원국으로 피선됐으면서도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냉소를 받고 있다.

원조 역시 마찬가지다. 잘사는 나라처럼 해외원조나 국제연대를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선진국처럼 하기에는 멀었고 우리부터 더 잘살아야 하는 것이다. 일례로 한국 정부는 국제보건정책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에이즈 문제에 10원 한장 내놓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못사는 나라처럼 자기네들끼리 뭉치는 데 끼이지도 않는다. 에이즈 약값을 낮추기 위한 빈곤 국가들의 연대에 동참하지도 않는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형편이다.

이렇게 한국은 아시아의 친구가 되기는커녕 ‘같이 할 것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아시아에서 고립된 딱한 처지다. 그러나 이미 한국 안에는 아시아가 있으며, 아시아 속에 한국은 이미 깊숙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버마나 스리랑카를 먼 나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우리와 아주 가깝다. 한국에 버마에서 탄압을 피해 온 이주노동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을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기는커녕 대기업이 버마에 진출해 독재 권력의 협조를 받고 있다. 스리랑카의 자유무역지대에는 한국의 이름 모를 작은 기업들이 수도 없이 진출해 있으면서 아무런 인권 감시 없이 현지인을 착취하고 있다.

다행히 요즘은 제법 많은 시민단체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평범한 시민들도 한국의 결식 어린이와 북한의 동포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시민들과 연대하고 나누며 조금씩 다름과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아시아에 진출한 한국계 기업이 독재정권과 야합하는 것이나 현지인을 착취하는 것을 감시하고 이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연대운동 또한 조금씩 싹이 트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한국 정부에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한국의 낀 위치를 변명거리로 삼아 뒤에서 팔짱 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그 위치를 활용하게끔 해야 한다. 인권위에서도,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자리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간 협력과 책무를 하게끔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한국은 아시아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인권위 회원국으로서 국가인권기구 설립과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결의안도 제출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에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들에게 ‘에이즈를 조심하세요’라는 홍보물만 나누어주는 것을 넘어 그 나라의 에이즈 예방 및 치료 사업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고, 에이즈 약값을 낮추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에 보조를 맞추라고 정부에 요구했으면 한다.

한국은 아시아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 말은 지금 우리는 아시아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의 고백이다. 만약 지금처럼 우리 안의 그들과 그들 안의 우리를 부정하기만 한다면 아마 그것은 힘들 것이다. 또 지금처럼 우리의 처지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만 강조하며 뒤로 한발 물러난다면 더더욱 그들과 가까워지기는 힘들 것이다. 아시아의 친구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르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며 더불어 살려는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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