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정치권의 주요 이슈로 본격 점화… 17대 국회에서 기존 노동법 대폭 손질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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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5월21일 낮, 서울 남대문시장 건너편 우리은행 본사 정문. ‘원직복직’이라고 적힌 조끼를 두른 10명 남짓 되는 여성들이 길가에 한데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비정규직도 사람이다. 부당해고 철회하고 차별을 철폐하라.” 그 흔한 깃발도 확성기도 없는 조촐한 집회였다. 작은 마이크에 실린 이들의 목소리는 도심의 번잡한 소음 속에 금세 묻혀버렸다. 이들은 우리은행 각 영업점에서 공과금 수납업무를 전담해온 사무행원들이다. 올 1분기에 사상 최대 실적을 낸 우리은행이 상여금 140%를 정규직에게 나눠주는 동안, 이들은 개인 이메일과 내용증명 우편으로 날아온 ‘계약만료 통보’를 받고 조용히 해고됐다.
우리은행 계약직의 외로운 집회
우리은행은 2002년 공과금 서비스 전담 계약직 120명을 뽑아 각 영업점포에 배치한 뒤 3개월마다 계약을 연장해왔다. 그동안 비정규직이라서 겪는 고용불안, 저임금 그리고 참기 힘든 직장 소외감을 견디다 못해 상당수가 떠났고 남은 건 57명. 그러나 지난 2월 은행쪽은 남은 57명 전원에 대해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추진해온 공과금 수납 전담센터 설치가 백지화되고 공과금 서비스 업무가 대폭 감소해 계속 고용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끝까지 남아 싸우겠다”고 밝힌 해고 동료들 가운데 한명인 허남주(40)씨가 집회 도중 한장짜리 ‘고용계약 만료 통지서’를 꺼내 보였다. ‘귀하는 2004년 1월1일에 체결한 고용계약서에 의거 2004년 3월31일자로 고용계약이 만료됨을 예고 통지합니다.’
우리은행 인천광역시 간석동 지점에서 일해온 허씨는 “2002년 9월에 장기 근무가 가능하다는 취업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면접 때 회사쪽이 ‘오래 다닐 생각이 없는 사람은 뽑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며 “그동안 석달마다 자동적으로 계약이 갱신돼왔는데 갑자기 해고 통지가 날아왔다”고 말했다. 은행 하면 월급·퇴직금도 많고 복리후생도 잘 갖춰진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하지만, 허씨의 월급은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100여만원에 불과했다. 제일은행에서 정규직으로 13년간 일한 허씨는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직장을 떠났다가 외환은행에 재취직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계약직’이었다. “저임금도 저임금이지만 6개월마다 가슴 졸이며 재계약하는 게 너무 괴로워 결국 2년 만에 사표를 썼어요. 재계약할 때마다 회사가 무슨 큰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대하는데, 월급 적은 것도 속상하지만 무시당한다는 모멸감은 더 견디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당장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또 계약직 신세로 일해야 했다. “우리은행 간석동 지점에 처음 발령받고 갔더니 사무실에 책상이 없는 거예요. 어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창구 바깥의 청원경찰 자리에 앉으라는 거예요.”
허씨는 “우리는 1년6개월에서 1년9개월씩 같은 일을 계속 해왔다”며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2년 이상 반복 계약하면 해고를 제한하는 쪽으로 법적 보호장치가 마련될 움직임이 있으니까 은행쪽이 미리 선수를 쳐 우리를 해고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매일 고함 지르고 집회를 갖는다고 해서 “고용계약이 끝났으니 계약해지는 당연하다”는 은행쪽이 태도를 바꿀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외로운 집회는 2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재계는 정부 대책에 압박을 느끼는가
허씨의 말마따나 비정규직 문제가 올 하반기 사회적 이슈로 본격 점화되고 있다. 정부가 최근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내놓은데다 민주노동당도 17대 국회 개원에 맞춰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혀 비정규직 문제가 사업장 수준의 노-사간 이슈에서 정치적 공간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5단체는 이미 지난 5일 공동발표문을 내고 “비정규직 활용은 시대적 대세”라며 “규제 위주의 비정규직 대책은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늘려 비정규직 일자리마저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위기가 심상찮다고 느낀 재계가 먼저 포문을 열고 나선 것이다. 정부 대책이 비록 ‘생색내기’에 불과하더라도, 이제 비정규직 국면은 일단 ‘모범적 사용자’(?)로서 정부가 선도하는 외양을 갖추면서 민간부문 사용자들이 압박받는 양상을 띠게 됐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처우개선’을 골자로 한 이번 정부 대책이 민간부문도 비정규직 보호에 동참하도록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민간부문도 진지하게 고민하라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노동비서실쪽도 “이번 정부 조처가 사용자들을 압박하는 효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며 “앞으로 대통령이 기업인과 만날 때 대화 내용에 자연스럽게 비정규직 문제가 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정부의 비정규직 보호 의지가 강력하다면 공공부문 입찰에서 민간기업의 비정규직 해결 노력을 입찰 조건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럴 경우 과거에 돈보따리 들고 갔던 재벌 총수들이 대통령과 만나러 갈 때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하나씩 들고 가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한국경영자총협회 최재황 본부장은 “비정규직이 사회적 이슈라고 해도 민간기업에서 여건에 따라 알아서 하는 것이지 법이나 제도로 규제해서는 안 된다”며 “대통령을 만난다고 해서 덮어놓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처우 개선은 세금으로 하면 되지만 기업은 누가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얘기다. 특히 기업들은 “우리 회사가 먼저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면 다른 경쟁기업에 비해 인건비가 늘어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결국 한두개 기업의 모범사례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고, 법·제도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
전체 노동자 10명 중 5.5명이 비정규직일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그 누구한테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상자기사 참조). 개인·가족·기업 그리고 ‘성장’ 및 ‘빈곤’과 직결된 사회경제 전체의 문제이고,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보호 입법은 시급한 당면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은 “지난해 현대자동차 고임금에 대한 언론의 왜곡 보도가 일부 노동자 사이에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임금격차 및 소득격차 확대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고용, 경영개선 효과 없다”
780만명에 이르는 비정규직은 사회적으로 배제당하는 ‘2등 국민’으로 취급받으면서 일상적으로 거대한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 직장에서 내쫓긴 실업자들이 처음에는 회사와 동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다가 실업이 장기화될수록 분노를 자신한테 돌리고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것처럼, 비정규직도 저임금·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함정’에 빠져 패배감과 좌절감을 느끼다가 목숨을 끊고 있다. 저임금이라는 물직적 궁핍을 넘어 노동의 자존심을 상실하고 차별에 대한 분노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인데,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신자살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비정규직은 특히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빈곤한 ‘노동빈민’(working poor)층을 두텁게 형성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한 가구 안에 3명 이상의 취업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빈곤(가구총소득이 중간 평균소득의 70% 이하)에 빠져 있는 가구가 전체 상대빈곤 가구의 15.2%로 나타났다. 비정규직의 열악한 임금수준 때문에 한 가족이 모두 일해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인데, 이런 소득 감소는 소비 침체를 낳고 자연히 기업 생산도 위축시켜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흥미로운 건 비정규직 고용 증가로 기업의 성과가 좋아졌다는 어떤 실증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체의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이 1990∼97년 12.6∼14.0%에서 1998∼2002년 9.7∼10.1%로 감소했는데,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1990∼97년 6.5∼8.3%에서 1998∼2002년 5.5∼7.4%로 감소했다. 김유선 소장은 “비정규직 고용을 늘리면 인건비가 절감되고 수익성이 높아진다고 하지만 실제로 비정규직 고용이 경영성과를 개선한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며 “기업은 경쟁력의 원천을 비용절감이 아닌 ‘사람 중시’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을 통한 ‘임금 따먹기’로 가격경쟁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헌재 부총리가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늘려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주변부 노동자’인 비정규직으로 한번 낙인찍히면 평생을 비정규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규직으로 가는 통로가 완전히 막혀 있고, 저임금 비정규직과 계약해지에 따른 실업상태를 되풀이하는 ‘반복실업’을 항상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비정규직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이른바 ‘바닥을 향한 경주’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준비하는 ‘특별법’으론 보호 어려워
17대 국회가 열리는 대로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본격 논의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비정규직 급증에 따라 기존 노동법 체제를 대폭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상시근로자’ 등 주로 정규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현행 노동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법의 사각지대에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행 근로기준법 제5조(균등처우)는 성별·국적·신앙·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한 근로조건 차별을 금지하고 있을 뿐 ‘고용형태’를 이유로 한 차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법적 규제가 없다.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 임금과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을 명시해야 한다는 규정도 정규직한테만 적용되고 비정규직은 사실상 배제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근로기준법 자체를 크게 흔들지 않고 대신 특별법 형태로 비정규직 관련법을 제정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박영삼 국장은 “현행 근로기준법은 최저 근로기준을 정해놓고 이를 어기면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있다”며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방안을 특별법 형태로 추진하는 배경에는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적 조항만 도덕 교과서 수준으로 넣고 이를 어긴 사용자에게는 약간의 벌금 정도만 매기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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