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선고’의 주인공 이정렬 판사 단독 인터뷰… 비종교적 병역거부 사건이 더 ‘엑기스’
▣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그의 사무실 옷걸이에는 특전사 베레모가 걸려 있다. 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베레모를 보면서 견딘다”며 웃었다. 그는 또 비양심적인 사람이다. 금연 빌딩에서 담배도 피우니까. 물론 이 때 양심이란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는 전문용어가 아니라 ‘착한 마음’이라는 일상어다. 대학 3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1997년 법관으로 임용된 서울 남부지법 이정렬(35) 판사. 그는 짐작과는 다른 (혹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법대로’ 판사라고 주장하는 그를 5월24일 오전 법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재판 진행과정을 말해달라.
=1년6개월형의 기계적인 법적용은 내키지 않았다. 병역법 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가 뭘까 고민하게 됐다. 병역거부도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관련 판례가 없었다. 그러다가 피고인이 제출한 참고 자료인 를 읽게 됐다. 판결에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반대논리를 알고 싶었는데, 그 책에 국방부 관계자가 쓴 글이 있어서 도움이 됐다.
-상급심에서 유죄 선고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그럴 수도 있다. 내 판결문의 약한 고리를 알고 있으니까.
-약한 고리가 뭔가?
=‘정당한 사유’에 대한 대법원 판례가 없다는 것이다.
-왜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양심의 자유에 근거해 무죄 판결을 내렸는가.
=이단 취급을 받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양심의 자유로 판단해야 종교인뿐 아니라 비종교인 병역거부자도 ‘정당한 사유’에 해당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현재 비종교적 병역거부자 사건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사실 그 사건이 더 ‘엑기스’다. 평화운동 등으로 양심이 진지해 보이기는 하는데…. 양심은 마음속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추론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곤혹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양심을 속이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법정 최고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가 간다. 병역거부권이 인정되는 상황이라면, 판사가 아닌 독립적인 심사위원회가 대체복무 허용여부를 심사하게 돼 있다. 부담스러웠겠다.
=독일의 심사제도를 참고했다. 독일의 심사위원회도 어차피 심사위원장이 법관이었다. 독일의 제도에 준해서 병역거부 소견서, 학적부 등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한번 더 하지 않고 무죄 판결을 내렸는가 하는 의문도 있다.
=한국법은 헌법재판소가 전체 위헌이나 합헌이냐만 판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일부 합헌, 일부 위헌일 경우 법원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죄 선고를 내렸다.
지난 21일 그는 두 건의 사고를 쳤다. 이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선고에 묻혔지만, 집단행동을 한 전국공무원노조원 23명에게도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 것이다. 실질적인 무죄와 같은 판결이었다. 물론 이것도 ‘처음’이었다.
-선고유예 판결에 대해 말해달라.
=대학원에서 노동법을 전공했다. 공무원 노조로 석사논문을 쓰려고 한다. 노동3권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없다. 그저 잘해줄 테니 노조 만들지 말라는 정도다. 학술 논리가 아닌 것이다. 나도 한국 현실에서는 공무원의 노동3권 중 일부가 제약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단체교섭권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교원노조에 비해서도 차별적이다.
-사람들은 이번 판결을 보고 이정렬 판사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시민 이정렬은 그렇게 진보적인 사람이 아니다. 법관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법해석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보적일 수 있겠는가. 단지 법대로 했을 뿐이다. 시민으로서 나는 누가 나라를 지키느냐를 걱정한다. 병역거부에 반대하니까 특전사에 자원한 것 아니겠는가. 지금도 전쟁이 나면 당연히 나가서 싸울 생각이다.
-병역거부에 대한 판단은 오히려 법조인이 일반 시민보다 더 진보적인 것 같다. 왜 그런가?
=양심의 자유가 그만큼 법률적으로 중요한 문제니까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문제다. 사법고시 2차시험의 단골 예상문제기도 하다. 답은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배운 대로, 법대로 했을 뿐이다.
-우리법연구회 활동은 언제부터 했나?
=1997년부터 회원이었다. 하지만 열성회원은 아니었다. 8년에 세미나 한번 한 뒤, 지방법원에 가 있고 하느라 3년 동안 제대로 활동을 못했다. 5월1일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세미나를 한 것이 두 번째 세미나 참가다. 선배가 이번달 발제할 사람이 없으니까 네가 하라고 해서 하게 됐다. 병역거부 주제는 내가 정한 것이다.
-특전사는 자원한 것인가?
=그렇다. 당시 우리 연수원 동기들 중에 특전사에 갈 사람 6명을 뽑는다고 하더라. 일단 지원을 받고, 모자라면 차출을 한다는 거다. 나는 안경을 써서 차출당할 가능성이 낮았지만, 그냥 지원했다. 뭐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몸도 튼튼하고 하니까 다른 사람보다 내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는 발제를 마친 뒤 곧바로 아들의 학교로 갔다고 한다. 그 뒤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투표가 벌어졌다. 결과는 ‘반대’가 더 많았다. 진보적인 법조인들의 모임에서도 반대 여론이 더 많았던 것이다.
-사법적극주의자라는 평이 있다.
=아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판사들과 다를 바 없다.
-이번 판결로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왕따’당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나도 보수적인 사람이다. (웃음) 법해석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보적일 수 있는가. 다만 법대로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는 튀는 판결을 많이 해왔다. 그는 2002년 월드컵 당시 노트북 등을 훔친 중학생에 대한 영장을 기각했다. 판결문에 “한국 대표팀이 준결승전에 진출, 피의자가 경기를 관전하면서 우리 팀을 열렬히 응원할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이 판결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 나이를 속이고 매매춘 업소에 취업한 청소년은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에 이 판결을 비판하는 사설이 나오기도 했다”며 웃었다.
-한편에서는 튀려고 ‘오버’한다는 평도 있다.
=예전에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승진에도 도움이 안 되고,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정치할 마음도 없는데 일부러 튀려고 그러겠는가. 나는 꼴통일 수는 있어도 정치적이지는 않다.
-법조인이 아닌 주변 사람들 중에 ‘왜 그런 판결을 했느냐’고 하는 사람은 없는가.
=아직은 없다. 다들 나를 잘 아니까. 사실 불특정 다수가 문제다. 오늘부터 사무실로 전화가 쇄도할 것 같다. 그나마 집 전화번호는 모를 테니 다행이다.
그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군복 입은 중년들을 만났다. 그들은 승합차에서 내려 법원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이날 오후 재향군인회가 남부지법 앞에서 무죄 선고 규탄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는 몸 조심하라는 농담 섞인 인사에 “후문으로 다녀야겠다”며 웃었다. 어려울 때마다 베레모를 본다는 그가 혹시 오늘도 베레모를 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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