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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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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세 삥땅, 분신을 부르다

등록 2004-05-12 00:00 수정 2020-05-02 04:23

‘국세청 규탄대회’에서 택시노동자 조경식씨 온몸으로 절규… 정부와 사업주들은 여전히 ‘무책임’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순간, 1천여개의 눈동자가 연단 위로 쏠렸다. 숨막힐 듯한 적막은 다급한 절규와 비명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을 얼어붙게 했던 커다란 불덩이는 연단 밑으로 떨어져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택시회사 부가세 부실운영 국세청 규탄대회’가 열리던 지난 5월7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열린시민마당. 나른한 봄날 오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서울 정오교통 소속 택시노동자 조경식(43)씨는 집회 사회자의 발언 도중 갑자기 연단 위에 뛰어올라, 1.5ℓ 플라스틱 우유통에 든 시너를 몸에 붓고 불을 붙인 것이다. 모든 것이 순간이었다.

“노동탄압 중단… 부가세 지급하라”

불길에 휩싸여 뒹구는 조씨에게 주위에 있던 조합원들이 급히 물을 뿌리고 입던 옷을 덮어 불길을 잡았다. 그러나 2, 3분 남짓한 시간은 몸의 절반을 3도 화상으로 채우기에 충분했다. 머리에 불이 붙은 상황에서도 조씨는 “노동탄압 중단하라” “부가세 지급하라”고 외치면서 기도가 크게 손상돼,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다. 조씨는 현재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택시운전 7년차의 ‘중견기사’인 조씨의 갑작스런 분신에 동료들은 경악했고, 통곡했다. 조씨가 분신 직전 주위에 뿌린 유서에는 택시노동자로서의 비애와 정부·사업주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대학노트 한장의 앞뒷면을 가득 채운 유서에는 택시사업주 위주로 행정을 하는 정부를 개탄하면서, “나는 떳떳한 택시노동자로 살고 싶다” “부가세 감면분 전액을 운전자에게 지불하지 않는 택시사업주들을 왜 처단하지 않는가”라며 사업주들의 불법 경영과 이를 묵인하는 정부의 무책임한 행태를 질타하고 있다.

이날 집회는 부가가치세 경감세액이 애초 목적인 택시노동자 처우 개선에 쓰이지 않는 현실을 규탄하기 위해 서울 등 전국 13곳의 도청, 시청, 택시조합 앞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됐다. 근로조건과 처우 개선이라는 목적은 사라지고, 사업주의 ‘짭짤한 수입원’으로 전락한 부가세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기 위해서다.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민택노련) 관계자들은 이날 국세청 관계자를 만나 △부가세 경감세액 부실운영 실태에 관한 특별 세무점검 △택시회사에 만연한 구조적·상습적 탈세행위 근절을 위한 특별 세무조사 등을 요구했다. 물론 “검토해보겠다”는 ‘당연’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평범한 노동자를 분신에 이르게 한 부가세 경감제도의 문제는 ‘고질적’이다. 지난 1995년 8월, 정부는 택시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근로조건 향상을 목적으로 부가가치세 경감제도를 입법화했다. 입법 취지는 ‘운전자 처우 개선 및 근로조건 향상’이지만, 2003년까지 7700억원이 넘는 경감세액 가운데 택시노동자에게 지급된 경감세액은 35%인 2700억원에 불과하다. 나머지 5천억원은 사업주의 ‘경영비용’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건교부, 다시 준수지침 내려보냈지만…

경감세액을 사업주가 보관·관리하기 때문에, 정작 ‘수혜자’로 지정된 택시노동자는 사업주가 합의해주지 않으면 침만 삼켜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 제도에는 ‘운전자 처우 개선을 위해 부가세를 50% 깎아준다’는 내용 외에는 경감목적과 사용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어, 사업주들은 야유회비나 명절선물 비용으로 사용했다고 신고하면 그만이다. 물론 이런 비용들은 부가세 경감을 해주기 전부터 사업자가 부담해왔던 것이다. 감독관청인 건설교통부와 지자체는 ‘노사합의’라는 한가한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나 최근 부가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지난 3월26일 건설교통부는 ‘부가세 사용 개선방안’ 지침을 감독을 맡고 있는 각 지방자치단체와 택시사업주들에게 내려보냈다. “점검 결과 일부 사업장에서 노사간 합의를 하지 않았거나 사업자가 임의로 유용하는 사례”가 발견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교부는 △부가세 경감분을 노사간 합의 없이 사용하거나 수입·지출 내역을 별도로 관리하지 않아 정확한 사용내역 파악이 어려운 경우 △가스보조금, 콜센터 직원 급여 등 사업자가 부담해야 할 부분에 경감액을 사용하는 경우 △운전자가 아닌 관리직 직원의 복지금액으로 사업자가 임의대로 사용하는 경우를 지적했다.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건교부는 몇 가지 준수사항을 제시했다. 경감액 사용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별도 통장 및 지출장부를 관리하고 사용내역을 종사자들에게 알릴 것, 필요한 경우 노사협의체를 구성할 것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노사의 자율적 합의’라는 ‘대원칙’은 여전히 유지됐다. 여기에다 경감액을 부당 사용한 업체에 대한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다. 처음 적발되면 과징금 120만원을 물고, 두 번째 적발되는 경우에는 60일 사업일부정지 처분이 고작이다. 그나마 이 제도가 시행된 1995년 7월부터 2004년 5월까지 부가세 경감분을 부당 사용한 사업주들의 처벌 건수는 과징금 10여건뿐이다. 사업정지 60일 처분은 아예 없다. 정부가 불법을 ‘조장’하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택노련 관계자는 ‘노사의 자율적 합의’를 되풀이하는 건교부에 대해 “택시회사의 특수한 노사관계를 묵인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노조가 제대로 조직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업자가 합의하지 않고 지급하지 않으면 운전자는 한푼도 받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사용내역을 둘러싼 노사간 분쟁과 민원이 계속 일어나며 갈등을 빚는데도 정부는 뒷짐을 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택시사업주들이 자진해서 경감분을 노동자들에게 모두 돌려주지 않을 바에야, 아예 경감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의 ‘사전적 경감제도’를 ‘사후적 환급제도’로 전환하거나, 감면세액의 관리사용을 제3의 공적기관에 맡기는 방안이다. 경감제도를 보조금 지원제도로 바꾸어 운영하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모두 사업주의 자의적인 운용을 막기 위한 장치다.

조경식씨의 분신으로 택시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민택노련은 대정부 총력투쟁을 결의하고, 차량시위와 총파업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부가세 경감분 유용과 과중한 사납금 문제 등 택시업계의 불합리한 제도와 실상을 쟁점화하겠다고 나섰으며, 민주노동당도 지난 5월8일 단병호 당선자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조씨가 소속된 정오교통도 8일 오후부터 사장 구속과 특별 근로감독 실시, 부가세 감면분 전면 환급 등을 요구하며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가장 많은 ‘열사’를 배출한 택시업종

지난 1984년 이후, 택시회사의 부당한 행태에 항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택시노동자의 수는 30여명에 이른다. 모든 업종을 통틀어 가장 많은 ‘열사’가 나왔다. 하루 12시간, 주 7일 근무에 평균 월소득 110여만원. 아무리 일해도 준극빈층을 벗어나지 못하는 택시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복지를 위한 부가세 경감분까지 사업주들에게 빼앗기며 거리로 밀려났다. 이제 누군가는 답을 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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