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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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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도용 피해 당한 홈리스, ‘세금 굴레’ 벗은 배경은

범죄 피해 구제커녕 자립 막는 제도적 족쇄… 재활 위한 증명 자료 덕에 세금소송 이겨
등록 2026-03-19 20:32 수정 2026-03-25 09:15
2019년 12월16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홈리스 추모주간 선포식에서 한 참가자가 홈리스 명의범죄 피해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12월16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홈리스 추모주간 선포식에서 한 참가자가 홈리스 명의범죄 피해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솔직히 그런 거(명의도용 피해) 잘 몰랐어요.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만 생각했고요. 가족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다른 걸 신경 쓰기도 어려웠어 요. 그냥 ‘내가 힘이 약하고 싸움을 못하니까 이런 일을 겪는다’는 생각뿐이었어요.”

2025년 9월 ㄱ(39)씨는 홈리스 시절에 당한 명의도용 피해를 법원에서 인정받았다. 16년 전 범죄자들이 체납한 세금을 ㄱ씨가 덤터기 쓸 뻔했는데, 소송으로 이를 해결한 것이다. 많은 홈리스가 범죄 피해에 노출되지만 ㄱ씨처럼 구체적으로 피해를 입증한 사례는 드물다.

피해 입증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ㄱ씨는 오히려 “명의도용 피해 회복이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어릴 때 겪은 폭력의 상처와 당장의 생계 걱정이 머릿속을 꽉 채운 탓이다. 그를 도운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ㄱ씨가 겪은 가족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고 생계 안정에 필요한 절차를 밟아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모인 기록이 의도치 않게 ㄱ씨의 피해를 입증하는 근거가 됐다.

가정폭력 피해 탈출했는데 가출인 취급

“한번 읽어보세요.”

ㄱ씨가 손때 묻은 회고록을 내밀었다. 대구에 살던 유년시절의 고통스러운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 집사가 ‘마귀가 씌었다’며 제 팔과 다리를 꽉 붙잡았습니다. 제 몸을 세차게 흔들고 손자국이 생길 정도로 때렸으며….” ㄱ씨의 부모는 ㄱ씨가 신앙에 대해 회의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청소년기를 맞이한 ㄱ씨의 질문이 많아지자 어느 날 ‘안수집사’라는 사람을 불러왔다. 그때부터 의심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안수집사의 폭력이 자행됐다.

견디다 못한 ㄱ씨는 2009년 서울행을 택했다. 22살 무렵이었다. “가족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기관이 대구에는 없었거든요. ‘당장 지낼 데가 없어도 노숙인 시설에 들어가면 된다’는 조언을 듣고 서울로 왔어요.”

그러나 현실은 차가웠다. 많은 노숙인 지원 시설이 ㄱ씨가 젊다는 이유만으로 단순 가출인 취급했다. 가정폭력에서 도망친 ㄱ씨를 도리어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거나 ‘뇌전증 질환자는 단체생활에 부적합하다’며 내쫓았다. 정부의 주거 지원도 받지 못했다. 당시 기초생활보장법상 주거 지원을 받으려면 가족 단절을 증명해야 했는데, ㄱ씨의 부모가 이를 원치 않았다.

“ 사회는 청년 홈리스를 인정하지 않아요. 가정을 이상적인 공동체로 상정하고 거기서 나온 청년을 가출인 취급하죠. 그러니까 노숙인 지원 같은 공적 체계가 ㄱ씨와 같은 사람들을 계속 밖으로 내모는 거예요.” 홈리스 인권 단체 ‘홈리스행동’의 이동현 활동가가 말했다.

결국 ㄱ씨는 영등포역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범죄에 노출됐다. 범죄자 일당은 ㄱ씨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며 꼬드겨 인천의 한 주택으로 끌고 가 감금·폭행했다. 그리고 온갖 것에 ㄱ씨 명의를 가져다 썼다. ㄱ씨 명의로 법인 2개를 세우고 휴대전화 11대와 차량 5대를 등록했으며 각종 은행 대출을 받고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ㄱ씨가 탈출하지 못하게 건물 밖 계단을 아예 시설물로 막아놓기도 했다.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홈리스들

당시 ㄱ씨 스스로도 피해를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오래 쌓인 무력감에 대응할 용기가 없었다. “제가 워낙 싸움 못하고 약해서” “바보기가 있어서” 폭력을 당한 것 같다는 자책을 되풀이했다. 그는 6개월가량을 버티고서야 감금된 곳을 떠났다 . ‘뇌전증약을 타 오겠다’며 병원에 간 뒤 되돌아가지 않았다.

많은 홈리스가 무방비로 범죄에 노출된다. 경찰은 홈리스를 잠재적 피해자로 보호하기보다 가해자로 통제하는 데 더 익숙하다. ㄱ씨도 노숙인이 밀집한 영등포역에 머물렀지만 범죄자 일당에게 끌려갈 때까지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홈리스행동이 2014년 홈리스 100명의 명의도용 피해를 전부 형사고소한 적도 있으나 차량 추적이 가능했던 1건만 범인을 잡았다.

ㄱ씨의 삶이 달라진 건 2010년 그를 돕는 여러 단체를 만나면서다. 홈리스행동 활동가들과의 만남이 시작이었다. 당시 ㄱ씨는 허위로 등록된 차량 때문에 재산이 과다하게 잡혀 생계급여를 신청할 수 없었다. ㄱ씨가 활동가들 도움을 받아 범죄자 일당을 형사 고소하자 그제야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가족과의 단절을 소명하는 ‘가족해체증명서’를 제출했더니 주거 지원도 가능해졌다. 뒤늦게나마 ㄱ씨 삶에 조금씩 제도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ㄱ씨가 감금·폭행 및 명의도용 피해를 당한 건물의 외관. ㄱ씨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샌드위치 패널로 막아놓은 모습이다. 홈리스행동 제공.

ㄱ씨가 감금·폭행 및 명의도용 피해를 당한 건물의 외관. ㄱ씨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샌드위치 패널로 막아놓은 모습이다. 홈리스행동 제공.


또 다른 홈리스 지원 단체인 향린교회도 만났다. 향린교회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교회다. ㄱ씨는 그곳에서 함께 기독교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과거의 폭력이 종교기관의 독선에서 비롯됐음을 깨달았다. “향린교회에 가서야 부모님과의 기독교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어요. 대구에선 적당히 진보적인 교회를 찾아가도 전혀 해결할 수가 없었거든요.”

삶이 점차 안정되자 ㄱ씨는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활동가들 권유를 받아들여 약을 먹고 병원을 다녔으며 장애 진단을 받았다. 잡지 판매원으로 일해 생활비를 벌었고 이따금씩 부모에게 용돈도 보냈다. “살기 위해 근로를 했”는데 막상 돈을 벌어보니 “생활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범죄 피해로 생긴 2700여만원의 세금은 여전히 ㄱ씨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서울 강서구청 등 지방자치단체는 ㄱ씨 명의로 된 차량에 매년 꾸준히 세금을 매겼다. ㄱ씨가 ‘나는 명의도용 피해자’라며 자동차세 부과 처분 무효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자체는 “실제로 피해자인지 알 수도 없고 맞다 해도 납세 의무는 져야 한다”며 맞섰다.

적절한 지원 없이 자립만 요구하는 사회

이때 ㄱ씨의 적극적인 문제 해결 노력이 승소에 일조했다. 그가 정신과 진료 과정에서 “범죄로 인해 피해의식이 생겼다”고 진술한 내용과 범죄자 일당을 형사고소한 기록 등이 고스란히 ㄱ씨의 피해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 것이다. “대부분은 명의도용 피해를 주장해도 ‘대가를 받고 빌려준 것 아니냐’는 의심을 벗기 어려워요. 그런데 이 사건은 ㄱ씨가 형사고소도 하고 수사에도 적극 협조한 점이 참작됐죠.” 사건을 대리한 김광훈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가 말했다.

2025년 9월 서울행정법원은 ㄱ씨 손을 들어줬다. “범죄 피해에 관한 원고(ㄱ씨)의 주장을 신빙할 수 있다”며 “소유권 등록이 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과세가 유효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판단했다. 지자체가 항소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됐다. 15년 동안 발목을 잡던 범죄 피해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된 것이다.

홈리스는 어떻게 삶을 재건할까. 거리로 내몰린 삶의 복잡한 실타래를 단번에 풀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제도적 지원이 있다면 이를 디딤돌 삼아 나아갈 수는 있다.

“개인이 한두 가지 문제만으로 노숙에 이르지는 않죠. 실업만 해도 부부관계 악화나 가족 해체 등이 맞물려 있잖아요. 그만큼 회복을 위해선 다양하고 중층적인 지원과 시간이 필요한데요. 사회는 홈리스에게 아주 짧은 기간 특정 서비스를 주곤 ‘자립하라’는 식이에요. 그마저도 ㄱ씨처럼 아예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경직된 지원 체계를 그대로 둔 채 ‘맞추라’고 할 것이 아니라, 왜 그 도움을 못 받는지 복합적 원인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 이동현 활동가가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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