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22일 대전지방법원은 7년 전 ‘세종시 집단 성폭력 사건’의 주범 김아무개씨에게 징역 8년, 공범 2명에게 각각 징역 4년과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관점’의 재판 진행 절차로 피해자의 회복을 도모했다. 한겨레 자료
“안녕하세요, 집단 성폭행 피해자입니다.”
2025년 8월18일, 한 통의 전자우편이 도착했다. ‘세종시 집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정연수(가명)씨였다. 정씨는 7년 전 미성년자 시절의 집단 성폭력 사건을 용기 내어 고발했다. 경찰의 부실하고 무성의한 수사, 검찰의 재수사 요청과 직접 보완수사 등 우여곡절 끝에 재판으로 넘어간 이 사건은 정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론화 계정을 만들어 사건을 알리고 연명 탄원서를 받으면서 관심을 얻고 있었다. 기사로 읽었을 때는 피해자 국선변호사도 연결돼 있고, 각종 지원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개인 활동가인 나에게 연락할 이유가 무엇일까.
2018년 성폭력 피해 당시에도, 2024년 2월 고소 후 수사·재판 진행 과정에서도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혼자 싸우던 그는 2025년 재판 중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피해자 변호사는 재판에 출석하기 어려웠다. 의료·상담 지원 연계도 안 된 상태였다. 게다가 피고인 네 명 가운데 주범인 김아무개씨는 공소사실 대부분을 부인하고 있었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대 전략이 필요했다.
8월25일 첫 공판을 앞두고 할 일이 많았다. 공소장을 비롯해 각종 수사와 재판 기록물을 정리하고 분석했다. 시민들의 연명 탄원서 역시 제출 방법과 시기를 조율했고, 재판 당일 피해자 의견진술서를 작성했다. 대전지방법원 232호 법정 앞에서 정씨를 처음 만나 그의 손을 잡고 재판부에 ‘활자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피해자를 봐달라’ 말하자고 했다.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시민 연대자들과 재판을 지켜보다 인정신문이 끝나고 피해자가 방청 중임을 재판부에 알렸다. 일반인 연대자의 발언을 제지하지 않는 재판부를 보며, 이 사건은 피해자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효과적일 것이라 판단했다.
이어진 검사의 모두진술을 듣다 정씨는 눈물을 흘렸다. 공소사실을 낭독하며 공판검사 역시 수차례 격앙된 감정을 토로할 정도로, 2018년 당시 14살 청소년이던 정씨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범죄사실이 법정에 울려 퍼졌다.
공범들이 공소사실을 인정했지만 주범 김씨가 대다수를 부인했기 때문에 피해자 증인신문이 결정됐다. 재판 뒤 피해자를 부른 공판검사는 손을 꼭 잡고 ‘대단하다’ ‘용기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서명한 탄원서를 제출하고, 공판조서 등 재판기록물의 열람복사를 신청하며 첫 공판은 마무리됐다. 의료·상담 지원과 시효가 얼마 안 남은 민사소송에 대한 법적 지원이 절실하던 차, 세종시 종촌종합복지센터 가정·성폭력통합상담소에서 정씨를 지원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피해자는 잘해나가는 것 같다가도 한순간 무너지는 시간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9월12일 한국피해자학회가 여는 ‘검찰개혁’ 관련 세미나에서 ‘다른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며 피해 당사자로서 발언하기로 결정한 정씨는, 세미나 전날 불안을 드러냈다. 나 역시 홀로 버텼던 시간의 외로움이 있었다. 정씨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말을 오래 듣고 이야기를 나눴다. 정씨는 평정을 되찾고 다시 자신의 싸움을 준비했고, 세미나 역시 잘 마무리했다.
10월27일 피해자 증인신문을 앞두고 주범 김씨 쪽이 입장을 바꿔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며 합의해달라는 연락을 했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고 정씨가 당당하게 대응하면서 김씨도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거다. 주범이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기 때문에 피해자 증인신문은 진행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대신 피해자 대상의 양형조사를 하겠다고 전했다. 양형조사는 대개 피고인 대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재판부가 피해자를 배려한다는 생각을 했다. 즉시 피해자 의견진술을 요청했다. 재판부는 방청석이 아닌 증인석으로 정씨를 나오게 해서 그의 말을 들었다. 정씨의 의견진술 뒤 재판부는 주범 김씨 변호인에게 ‘피해자의 의견진술 내용에 맞게 피해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가 재판 중 회복을 시작하게 된 장면이다.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이라고 하면 흔히 합의금만 떠올린다. 그러나 정씨는 돈으로 형량을 거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합의 과정이 모멸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실한 수사로 제대로 조사되지 않은 김씨의 1차 가해, 김씨와 가족, 지인들의 2차 가해에 대한 인정과 반성, 재발 방지 대책, 접근금지 등 안전장치를 정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여러 차례 조율했고, 안전한 장소에서 이행각서와 합의서를 작성했다. 합의시 으레 피해자들이 요구받는 ‘처벌불원서’도 쓰지 않았다.
남은 두 명의 공범(공범 한 명은 수사 과정에서 이미 합의했다)은 합의를 시도하면서 새벽에 연락하거나 합의액을 조정해가며 정씨를 모욕했다. 합의 과정에서 겪은 ‘2차 가해’를 알리고, 사건에 대한 피해자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결심 전 의견진술 요청서를 제출했다. 정씨는 12월5일 다시 한번 증인석에 섰다. 그는 재판 과정이 오히려 회복의 길이 되었다고, 다른 피해자에게도 이를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피고인에 대한 엄벌 의사도 밝혔다.
12월22일 주범 김씨에게는 징역 8년, 공범 2명에게는 각각 징역 4년과 5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피해자와 연대자가 함께 이뤄낸 단죄였다. 판결문에는 정씨의 바람이 담겼다.
“피해자는 성인이 되어 비로소 어렵게 용기를 내 고소하여 고통스럽고 지난한 수사 과정을 거쳐 이 사건 재판에 이르게 되었는바, 이 법원으로서는 피해자의 용기가 헛되지 않도록 하고, 피해자와 비슷한 처지에서 오래전의 성폭력 범죄에 대하여 쉽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로 하여금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하며, (…) 아무리 오래전 미성년자 시절의 성범죄라 하더라도 응분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널리 경고하기 위하여 피고인들에게 죄책에 상응하는 처분을 할 책무가 있다.”
1심 선고 직후 정씨는 바다를 보러 홀로 부산으로 향했다. 늪에서 뭍으로, 뭍에서 길로, 길에서 광장으로, 그리고 도달한 바다에서 그는 자신 앞에 펼쳐진 넓은 세상과 미래를 보고 왔다고 했다.
피고인들이 항소한 지금, 아직도 싸워야 할 일이 남아 있지만 그는 더 이상 외롭지도, 두렵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싸움을 선택한 당사자가 그 과정에서 존중받았을 때 결과 역시 수용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정씨는 보여준다. 용기 낸 모든 피해자가 형사사법 절차를 통해 피해를 인정받고 일상을 회복하는 일이 ‘일상’이 되기를 바라며 2025년의 마지막 글을 남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구형 밤 늦게 나올 듯…지귀연 “징징대지 말라” 변호인 질책 [영상] 윤석열 구형 밤 늦게 나올 듯…지귀연 “징징대지 말라” 변호인 질책 [영상]](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5/1219/20251219502837.jpg)
윤석열 구형 밤 늦게 나올 듯…지귀연 “징징대지 말라” 변호인 질책 [영상]

김경 “강선우에 1억원 줬다 돌려받았다”…경찰에 자술서 제출

울산의 한 중학교 졸업생이 1인 시위에 나선 이유

‘윤석열 측근’ 서정욱 “사형 구형될 것, 그러나 과해”

‘채 상병 수사 외압’ 맞선 박정훈, ‘별’ 달았다…준장 진급

6월부터 월소득 509만원까지 국민연금 안 깎는다
![말해놓고 웃음 터진 윤석열…“계엄 역풍 경고도 안 해주고!” [영상] 말해놓고 웃음 터진 윤석열…“계엄 역풍 경고도 안 해주고!” [영상]](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108/53_17678399102847_20260108501573.jpg)
말해놓고 웃음 터진 윤석열…“계엄 역풍 경고도 안 해주고!” [영상]

‘제멋대로’ 트럼프 “국제법 필요 없다…날 막을 건 내 도덕성 뿐”

홍준표 “윤석열·한동훈 두 용병 난투극이 당 망쳐…응징해야”

배현진 “코박홍·입꾹닫 하더니 이제 와서 남 탓?”…또 홍준표 직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