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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_고백은_저항 #곽혈수님과_연대

2025년에 다시 부는 미투 해시태그 운동…피해자를 더는 외롭게 두지 않아야 한다
등록 2025-11-20 22:09 수정 2025-11-25 11:50
2025년 11월1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성평등가족부 역차별 부서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여성의당 제공

2025년 11월1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성평등가족부 역차별 부서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여성의당 제공


유튜버 곽혈수씨는 2025년 11월2일 ‘이 말을 꺼내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제목의 영상을 올려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렸다. 곽씨는 2024년 술을 마시고 탔던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해 1년 반 정도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그는 영상에서 1년 넘게 산부인과에서 치료받으며 겪었던 고통, 수사 과정에서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며 2차 가해를 당했던 경험, 아무 일도 없는 듯 유튜브 영상을 올려야 했던 고충 등을 토로했다. 그의 피해 고발은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 표명으로 이어졌다. 2025년 하반기, 세대를 뛰어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투쟁은 곽씨의 고발 이후 사회운동으로 확장하고 있다.

곽혈수 유튜브 채널 갈무리.

곽혈수 유튜브 채널 갈무리.


멕시코 대통령의 당당한 성추행 고소

2025년 10월27일 아침 대전지법에서 ‘세종시 집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정연수(가명)씨를 만나 연대자들과 인근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2018년 권력형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씨, 청소년 때부터 성폭력 피해를 알리고 싸웠던 20대 여성, 방청 연대를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시민들, 피해자를 돕는 단체 관계자들이 서로의 존재와 용기에 위안을 얻었다. 김지은씨는 피해자가 법정에서 당당히 의견진술을 하고, 피해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를 당연시하는 게 그토록 바라던 변화의 단면이라고 했다. 2018년 피해자였던 그는 형사 법정에서 재판을 기록했고, 가해자 안희정이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뒤 민사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2025년 10월29일, 프랑스 상원이 본회의 참석 의원 342명 중 327명의 찬성으로 동의 없는 모든 성적 행위를 강간 및 성폭행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는 약물 성폭력 피해자인 지젤 펠리코의 투쟁으로 동의 모델(동의 없는 성적 행위는 폭력으로 간주한다는 원칙)로 전환했다. ‘나도 해냈으니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말하기를 원한다던 지젤의 투쟁은 결국 사법시스템의 변화로 이어졌고, 한국 내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용기를 줬다.

11월5일 멕시코 첫 여성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은 전날 길거리에서 당한 성추행을 신고하고,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는 “나는 대통령 당선 전 학생이었을 때도 이런 일을 경험했다”며 “내가 고소하지 않으면 모든 멕시코 여성이 어떤 처지에 놓이겠느냐”며 고소장을 제출한 배경을 설명했다. ‘마초 국가’로 불리며 ‘페미사이드’(여성살해)가 빈번했던 멕시코도 드디어 변하고 있다. 국가수반이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건넨 이 메시지는 피해자가 공적 시스템을 신뢰하는 계기가 됐다.

11월7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560호 법정에 성폭력 피해자 13명이 모였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45년 만에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시작했다. 이들은 그간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지내다 2023년에야 성폭력 피해를 처음 증언했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직권조사로 계엄군이 저지른 성폭력 실태 일부가 드러났다. 이들은 생존자 모임 ‘열매’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며 “진실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고 서로를 살게 한 힘”이었다며 투쟁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퇴행적인 오영수 항소심 선고 재판

이처럼 국내외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침묵 또는 입증을 강요한다. 곽혈수씨는 영상을 올린 뒤 ‘증거를 대라’는 요구를 받고 공소장까지 공개했다. 하지만 일부 시청자는 곽씨의 과거 영상과 기록을 뒤지며 공소장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피해를 조롱했다. 이들은 공소장과 고소장을 구분하지 못했고, 형사소송이 아닌 민사소송일 것이라 주장했다. 피해자를 검증하려는 작태가 또 벌어진 것이다.

11월11일 영화배우 오영수씨의 강제추행 항소심 선고에서도 법원의 퇴행을 목격했다. 수원지법 형사항소 6부(곽형섭·김은정·강희경 부장판사)는 다른 사건과 분리해 이 사건 선고에 20분을 할애했다. 이런 일정을 보고 무죄 선고를 예감했는데, 예상대로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증인신문에서 “피고인과 안 좋은 일이 있었냐, 서운한 일이 있었냐, 일기장에 가식적인 내용을 적기도 하냐”고 물었다. 오씨 변호인이 ‘또 다른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했냐’고 질문해 피해자 변호인과 검사로부터 항의를 받자, 재판부는 되레 “왜 이 질문이 부적절하냐”고 말하기도 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고사하고 균형 잡힌 판단조차 사라진 재판이었다.

항소심 선고를 함께 지켜본 김지은씨는 눈물을 흘리며 분노했고, ‘광주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 김산하(가명)씨도 기자회견에서 “예술계에서 일어난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여전히 사소한 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사회적 신호”라고 지적했다. 피해자를 대리한 김예지 변호사는 “피고인은 피해자가 미투 이후 용기를 얻어 피해 사실을 말한 것을 두고 ‘미투를 이용해 무고하려 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피해자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피해 사실을 대면하고 용기 내게 해준 미투를 오히려 가해자의 항변으로 이용하고 잘못된 통념에 호소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법원에서도 성폭력 피해자들을 짓밟으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곽혈수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11월7일과 9일, 성폭력 피해 고발 및 연대를 의미하는 ‘미투 2025 해시태그 운동’(#곽혈수님과_연대합니다, #내_고백은_저항이다, #세상 모든_곽혈수를 위해, #비동의 강간죄_당장 입법하라)을 펼쳤다. 또 11월12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관한 청원’)을 시작했다. 이 청원은 글을 올린 지 하루 만에 청원 인원 5만 명(11월13일 오후 6시께)을 넘겼다. 곽씨는 공소장 외 추가 증거를 대중에 밝힐 이유가 없음을 천명하고,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해 노력하는 영상을 계속 올리고 있다.

60대 여성이 부르짖는 ‘타는 목마름으로’

11월15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성평등가족부 역차별 부서 폐지’ 시위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특히 시위 후반 발언대에 오른 60대 여성은 앞선 발언자의 노래에 화답한다며 ‘타는 목마름으로’를 즉석에서 불렀다. 40여 년 전 운동권 안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했던 그는 2018년 이를 고발하며 미투의 한 주역으로 거듭났다. 이렇게 피해자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고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그 노력에 답해야 한다. 그들을 더는 외롭게 두지 않아야 한다. ‘피해자다움’은 없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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